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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에 따라 우리의 힘을 빌린 대가로서 검의 주인에게 명한다.”

 

1년 전, 북쪽 산맥 깊은 곳에 숨겨진 용의 둥지에서 소녀의 모습을 한 용은 눈물 자국을 숨기면서 내게 말했다.

 

 

“나를 도와. 도와서 우리 아빠와 엄마를 죽인... 마왕의 일곱 그림자를 죽여.”

 

부모의 원수, 20년 전부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마왕. 그의 가장 강력한 수하들을 죽이라고.

 

 

 

 

 

 

***

 

 

 

 

 

 

내 가문은 용과 계약을 맺었다.

용들의 도움으로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는 용검을 제조하는 대신, 그들을 보필하는 계약. 

그렇게 손에 넣은 용검의 힘 덕분에 내 가문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다.

 

전부 옛날 일이다.

 

용과 인간의 합작으로서 엄청난 힘을 발하는 용검. 그를 사용할 적성을 가진 인간이 가문에서 몇 대 동안 나오질 않자 내 가문은 자연스레 몰락했다.

몰락한 가문은 용에게 대가를 치르지 못하였고, 그것이 쌓여서 나는 마왕의 일곱 그림자를 죽인다는 터무니 없는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용검을 사용할 적성을 타고 태어난, 나로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뭐, 그래도 이 일에 대해 가문을 크게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어머니의 가문을 원망할 수는 없었고, 덕분에 매우 불안했던 그 애를 도울 수 있었으니까.

 

에이르.

 

1년 전 나를 불러들인 용, 먼 옛날 가문과 계약을 맺은 레드 드래곤의 마지막 후손.

나에게 이 터무니없는 여정을 명령한 장본인.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던 그 애를 옆에서 돕고 싶었다.

부모를 잃었다는 그 억울함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었다.

에이르가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울 수도, 그녀를 웃음 짓게 할 재능도 없었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용검을 사용할 수 있는 적성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해왔던, 검을 휘둘러 적을 죽이는 일을. 마왕의 그림자라는 터무니없는 적과 싸우는 것을.

그렇게 5번째 그림자와 싸울 때 나는 생각하던 것과 다르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콜록! 콜록! 콜록!”

 

레드 드래곤다운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면서 괴로워하는 에이르.

거친 기침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에 나는 급히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걸 떨쳐냈다.

 

“방해... 하지 마. 4놈이야. 절반이 넘는 수가 죽었다고.”

 

악몽을 불러일으키는 서큐버스 여왕. 

영혼을 옮길 갑주만 있다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죽음의 기사. 

피에서 싹을 만들어내는 타락한 나무 정령.

수없이 많은, 시체가 뒤섞인 무언가. 

여태까지 나와 함께 죽인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에이르는 다시금 마법에 전념했다. 그림자의 위치를 찾는 추적 마법이었다.

 

“몸 따위 신경 쓸 수 없어. 그놈들을 한시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없애지 않으면...”

 

“에이르!”

 

안 좋은 몸 상태로 무리를 한 게 컸는지, 에이르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나머지 남은 그림자를 찾아 죽인다는 집념 때문인지 품에서 정신을 잃은 에이르는 아직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가지고 있는 포션의 뚜껑을 딴 뒤, 천천히 그녀의 목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나고 나서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게 들려오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타락한 나무 정령을 죽인 뒤부터 에이르는 이상하게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 쓰기도 힘든 용언 마법을 여덟 번을 쓰면서까지 그림자를 찾았고, 그를 죽여버리기 위해 위험한 마법을 쓰는 것까지 서슴치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위태로운 그 모습에 에이르를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으나, 언제나 돌아오는 건 끝이 얼마 안 남았다.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뿐.

 

이렇게 가다간 에이르가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너무나도 두렵다.

거슬린다는 표정과 함께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은 그녀가 나를 인격체가 아닌, 용검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아 괴롭다.

그렇게 이마를 부여잡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내 눈이 바닥에 있는 지도를 향했다.

 

반짝이고 있다.

 

20년 전 나타난 마왕 때문에 검게 물든 대지까지 포함해 대륙 전체가 그려져 있는 거대 지도의 일부분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것이 에이르가 용언 마법으로 찾아낸, 남은 3개의 그림자 중 하나를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던 나는 급히 그 위치를 확인했다.

 

“카티라...”

 

대륙의 서쪽에 위치하는,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꽃이 피기에 계절마다 다른 꽃의 축제가 열리는 아름다운 도시.

점점 정신이 피폐해지는 게 눈에 띄는 에이르의 요양을 위해 와 있는 도시였다.

 

“이런, 개 시발...”

 

적어도 그녀가 매일 밤 악몽에 괴로워하는 게 조금은 나아지길 바라면서 왔건만, 그림자가 모두 망쳤다.

나는 곧바로 용검을 잡았다. 그러면서, 아직 나와 에이르가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 그림자를 떠올린다.

 

걷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타락한 거인.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언데드 군세를 만들어내는 리치.

 

마지막으로 나로서는 절대 에이르가 상대하게 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기만한 사악한 악마……

 

“도플갱어.”

 

이곳에 와있을 그림자의 정체를 유추한 나는 두 번째 그림자를 처치하면서 얻은 보물로 방문 앞에 결계를 친 뒤 여관을 나섰다.

이번 그림자는 무조건 나 혼자서 없애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

 

 

 

 

늘 있는 일상과 똑같았다.

 

둥지를 나와 눈 덮인 설산 속에서 드문드문하게 보이는 얼음꽃을 찾기 위해 엄마 아빠가 돌아오라고 한 시간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꽃으로 둥지가 장식될 때마다 환하게 웃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아주 열심히.

 

그러던 와중 사람이 왕래하지 않을 이곳을 돌아다니는 두 개의 무언가가 보였다.

 

마왕의 그림자인 서큐버스 여왕과 죽음의 기사였다.

 

나를 인질로 잡은 그림자들은 둥지에 찾아가서 엄마와 아빠를 협박했다.

 

위대하신 분의 대업에 동참하라. 가족 전부가 시체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가족 전부가 시체가 되는 것도 위대하신 분의 대업에 동참하는 것도 바라지 않던 엄마와 아빠는 그 둘과 싸웠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목숨을 잃었다.

 

엄마 아빠의 말을 어긴 탓에 인질로 잡힌 나를 구하려다가.

 

돌이 되어가던 엄마가 마지막으로 걸은 마법으로 설산 어딘가에 나는 날려졌다.

 

둥지로 돌아가야 해. 

 

나는 몇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차가운 눈밭을 맨발로 걸어갔다.

 

둥지로 돌아오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해 엄마와 아빠를 불러본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현실을 인지했다. 

 

엄마와 아빠가 죽었다. 

 

그림자들에게 죽었다.

 

돌아오라는 시간을 어긴 탓에 인질로 잡힌 나를 구하려다 죽었다.

 

나 때문에 죽었다.

 

나... 때문에... 죽었다...

 

 

 

 

 

***

 

 

 

 

 

 

“……쿨럭. 콜록! 콜록!”

 

폐에서 목구멍으로 칼날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통증에 기침을 토하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마지막 기억을 되살린다.

 

‘그래 분명. 용언 마법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해서 목에 상처가 생겼었고, 쓰러졌지.’

 

기억 속에서 날카로운 칼로 목을 난자하는 통증에 시달린 것을 떠올린 나는 목을 매만졌다.

 

‘나았어.’

 

마법을 사용하다 무리해 쓰러졌다. 당연히 몸 안의 마나란 마나는 텅텅 비었을 테고, 마나로 인한 자연스러운 회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헤른이 치료해준 건가...’

 

이내 도달한 결과에 몸을 감싸고 있던 모포를 두 손으로 꽉 쥐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처음은 그저 용검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엄마와 아빠를 죽인, 몇만 번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림자를 없애고 나 또한 죽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목숨이 언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여정이란 험한 환경.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에 동한 걸까.

어느새 나는 모르는 사이에 헤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아프고, 무섭고, 싫은 여정이 아닌 그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엄마랑 아빠를 죽게 만든, 나로서는 바라서는 안 될 행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까, 빨리 남은 놈들을 죽여야만 해.’

 

엄마와 아빠를 죽인 그림자들. 그들을 죽여서 복수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엄마 아빠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게 된다.

떳떳하게 헤른의 옆에서 방금 생각했던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그 행복한 미래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그림자를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침대에서 모포를 걷어내며 일어났다.

 

‘지도. 가져갔구나.’

 

조금이라도 내 몸을 챙기려고 하는 헤른으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미안, 헤른.’

 

그리고 나는 그런 헤른의 바람과는 반대로 지도를 구해 그림자를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는 게 계속 느려질 테니까.

엄마와 아빠를 죽여놓고선, 조금은 천천히 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려는 내가 용서가 안 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내가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똑. 똑. 똑.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벌써 헤른이 온 건가 하고 열리는 방문을 바라보던 나는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엄마?”

 

문이 열린 뒤 보이는 건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껴안는 엄마였다.

 

 

 

 

 

 

 

***

 

 

 

 

“에이르. 너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둥지를 나오는 건 그래. 그렇다 쳐.”

 

“아니, 근데 다른 것도 아닌 마왕의 그림자를 사냥한다고? 그것도 남자에 눈이 멀어서?”

 

“아주, 진짜. 엄마 속을 파내어서 죽여버릴 생각인 거니?!”

 

“얼마나 걱정했는데. 마법에 재능은 있어도 생전 싸움 같은 건 하나도 안 하던 애가...”

 

“어디 다칠까봐... 다시는 이렇게 못 안을까봐...”

 

머리가 너무나도 아팠다.

왜 지금 눈앞에 죽은 엄마가 있는 거지? 마법 또는 능력으로 인한 환상? 그렇다면, 그림자가 이 카티라에 있는 건가? 남은 그림자는 분명…….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 엄마랑 아빠 속을 1년 동안 썩인 건 죄송하지도 않다 이거야?”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면서 목소리가 낮아지는 엄마.

그 모습에 갑자기 머리가 아프던 것이 싹 사라진다. 

방금까지 뭔가 중요한 걸 여럿 떠올리고 있던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엄마가 저런 눈과 목소리로 날 바라본다는 건 진짜 화났다는 거니까.

 

“죄, 죄송해요. 엄마. 하지만, 이것도 다 사정이 아아아파악!”

 

1년 전 둥지를 나오기 전까지는 화가 나면 매번 하셨던 볼 꼬집기.

마력으로 강화한 드래곤의 손길인 만큼 그 고통은 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정은 뭔 사정! 네 엄마랑 아빠 속 다 태워놨으면서도 사과를 바로 안 하는 불효녀가 뭔 사정이 있는데!!”

 

“아니, 좀! 들어 봐요!”

 

“들어 보기는 뭘 들어봐! 우리랑 계약을 맺은 인간 가문의 남자한테 혼이 다 빠져나가지곤 쫄래쫄래 따라간 주제에!”

 

그렇게 약 십분을 넘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나는 겨우 볼 꼬집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아 씨, 진짜 아프네. 겉에 꺼낼 수는 없어 속으로 짜증을 내던 나는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 얼굴을 찢어버릴 생각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란 놈이 남자 따라 집 나가는 게 아주 잘 하는 짓이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다 사정이...”

 

“됐고.”

 

말을 끊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으시는 엄마. 여태까지 볼을 꼬집혔던 탓인지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하던 나는 급히 몸을 빳빳이 했다.

 

“어디 갔어.”

 

“……뭐가요?”

 

“뭐긴, 뭐야 네 남자친구지.”

 

“나갔어요. 갑옷 수리를 맡겨야 한다고.”

 

“그렇구나.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또 뭔데요.“

 

”피임은 제대로 하는 거지?”

 

“푸웁! 콜록! 콜록!”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던 나는 그대로 물을 뿜다 못해 사례까지 들리고 말았다.

 

“……아니, 지금 무슨 개소리예요?”

 

“짐 내려놓은 거 보니까 방 하나밖에 안 잡았잖아.”

 

“급하게 갑옷 수리한다고 밖에 나가서 그런 거거든요! 방은 제대로 2개 잡아놨다고요!”

 

“그래서, 피임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지?”

 

“아니, 아아아! 진짜!!”

 

여태까지 삼키고 있던 짜증이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아니, 애초에 피임을 왜 자꾸 물어보는 건데?

안 그래도 헤른 그놈 겁쟁이라서 뭘 할 수도 없어서 답답해 죽겠는데.

 

“어휴. 됐다. 빨리 옷이나 제대로 갈아입고 나와.”

 

“나오라니요. 어디 가시게요?”

 

“어딜 가냐니. 여긴 꽃의 도시잖아. 그리고 오늘은 그 꽃의 도시에서 유명한 가을꽃 축제 기간이고.”

 

그렇게 말한 엄마는 씨익 웃으셨다. 

 

“엄마도 딸도 꽃 좋아하잖아. 기왕 왔는데 같이 구경하러 가야지.”

 

 

 

 

 

 

***

 

 

 

 

 

“……진짜. 너는 꽃을 좋아하다 못해 꽃에 미쳤구나.”

 

“갑자기 또 왜 시비인데요.”

 

“시비가 아니라 지금 네 손에 들린 걸 봐라.”

 

“꽃이잖아요.”

 

“그래. 근데 그게 몇 개가 있지?”

 

“6다발이요.”

 

이게 뭐가 문제가 있는 거지?

 

“……헤른이랬나. 네 남자친구는 고생이겠구나.”

 

“걔가 고생은 뭔 고생이요. 오히려 제가 걔를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하죠.”

 

“그게 아니라, 딸을 속여 먹인 인간 놈 손 좀 봐주겠다고 한 네 아빠가 방금 그 헤른을 찾아서 그런 거다.”

 

“흐음, 그래요?”

 

“뭐냐, 별로 안 놀란다?”

 

“걔가 다른 건 몰라도 싸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요. 제가 본 사람, 용 중에서 그 애만큼 잘 싸우는 얜 없어요.”

 

“넌 너희 아빠 싸우는 것도 못 봤잖아.”

 

“그래도 헤른이 질 것 같지는 않아요.”

 

“이 말을 너희 아빠가 들었다간 바닥에 앉아서 울 거다.”

 

“안 말 할 거잖아요. 그거 끌고 가는 거 귀찮아서.”

 

“그건 그렇지.”

 

하하 웃으면서 엄마와 함께 카티라의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앉는다.

꽃의 도시인 만큼 실려오는 꽃향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그렇게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을 때였다.

 

“……에이르.”

 

“왜요 엄마.”

 

“도망가.”

 

“네?”

 

도망가? 갑자기 들려온 이상한 엄마의 말에 나는 눈을 떴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엄마는 언덕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피칠갑을 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용검을 들고 있는…….

 

“헤른?”

 

“빨리 도망가라니까!”


갑자기 머리가 미친 듯이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헤른이 왜 피를 저렇게 칠하고 있고 엄마는 다급하게 도망가라면서 저리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건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듯 상황은 흘러갔고.

 

푹!

 

이내 엄마보다 더 살벌한 표정을 지은 헤른이 엄마의 가슴을 용검으로 꿰뚫었다.

 

 

 

 


***

 

 

 

 

실수했다.

 

도플갱어 놈이 보여준 환상, 그리고 놈이 조작한, 있을 수 없는 기억들에 속아 넘어가 결국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그림자가 카티라에 와 있었다면, 에이르를 지켜야 했는데. 

에이르와 도플갱어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에 몰두해 남은 도플갱어 한 마리에게서 그녀를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노는 도플갱어를 죽여버리고 제정신을 어떻게든 차린 나는 에이르를 찾아 카티라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내면서 찾은 에이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웃음을 보면서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도플갱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물에 젖은 모래성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몸을 혹사해 용검을 쥐고 그에 불을 지폈다.

도플갱어에게 싸울 힘은 거의 없다. 환상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지금 상황이라도 내가 질 일은 없다.

 

“빨리 도망가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도플갱어는 에이르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취하면서 소리 질렀다.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빨이 갈린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그녀의 기억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놀다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앞으로 내밀어 도플갱어의 가슴을 꿰뚫었다. 

 

부상이 심한 몸으로 기력을 전부 쥐어 짜낸 탓인지 들이쉬는 숨이 너무나도 아팠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겨우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가슴에 용검을 박아넣은 도플갱어와 함께 쓰러졌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이 온몸이 괴로웠다. 하지만, 이내 이쪽으로 달려오는 에이르의 모습에 그것을 전부 잊을 수 있었다.

 

에이르는 어느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그건 그녀의 곁에 있던 도플갱어가 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녀는 나와 같은, 소중한 사람이 너무나도 듣기 싫은 말과 함께 뒤를 찌르는 끔찍한 경험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너무 기뻤던 나에게 그녀는 손을 뻗었다.

 

콰악!

 

에이르의 손이 내 목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커헉! 컥... 에, 에이르...”

 

“나쁜 새끼! 죽어! 죽어! 죽으라고!”

 

에이르는 아직 도플갱어가 조작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즉, 그녀의 눈에 헤른은 여태껏 사랑한다고 말한 주제에 자신의 가족을 죽인 배신자이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새끼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정도로 헤른의 상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어째서...”

 

12살이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 살아계셨다면 곱게 늙었을 그 모습에 등을 찔리고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이란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 품에 안겨서 울고 싶은 그 모습을 내 손으로 베어 넘겼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달려왔다. 너를 위해서 부서질 거 같은 몸을 이끌고.

 

“너 같은 걸...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어...”

 

“살려내. 우리 엄마 살려내라고! 이 개 같은 쓰레기 새끼야!”

 

그런데 왜 너는 내 목을 조르면서 이렇게 아픈 말만 하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던 헤른은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