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내겐 소꿉친구가 있다. 그것도 아주 귀여운


그래서일까, 유치원 시절의 나는 그녀를 보자말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설령 그것이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장난 섞인 애정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때 느낀 가슴의 두근거림만큼은 진심이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반한 나는 그날 이후로 그녀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고백을 계속했다. 몇 번을 차여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야말로「좋아해」의 반복. 그리고 그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엔 무척 귀찮아하던 그녀도 이젠 인사말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주고 있다


솔직히 지금 와선 동네의 명물이라 해도 될 정도다. 양가 어른들도 우리 둘의 사이를 술자리 안주 삼아 꺼낼 정도이고


또한 내「좋아해」역시 아주 친한 상대에게 습관처럼 하는 말이 되었을 뿐, 지금 그녀를 정말 좋아하느냐 아니냐 물어본다면 확답을 내릴 자신은 없었다. 세월이 세월이니까 말이야···그래도 그녀가 여전히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란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은 사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무척 귀엽다. 작은 키에 아담한 얼굴, 똘망똘망한 눈동자, 생기 넘치는 연갈색의 단발 머리카락. 외모로 이 학교에서 그녀를 이길 여학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탓에 그녀는 길거리에서 연예인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고 학교에서 고백받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어쩐지 그녀는 그것들 전부를 거절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가 계속해서 단순히 평범한 남자 그 자체인 내 곁에 있어주는 건 아마 긴 시간 함께 있었던 것에 따른 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렇게나 집적댔는데 싫어해주지 않아서 고마울 정도이고 말이지


그러니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매일 아침 등굣길에서「좋아해」라고 말하면 그녀가「그래, 그래」하고 시큰둥하게 넘기는 일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배, 저와 사귀어주시겠어요?」


「···네?」


그 일상이 오늘, 끝날 것이란 것도 모른 채


***


여느 때와 같은 평일 오전, 1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의 학급 내


웬일로 학교는 무언가의 화제로 들끓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저렇게 3층에 우르르 몰려가다니, 뭔 사건이라도 터진 거야?」


「뭐야, 김선우. 설마 모르는 거냐?」


「뭘?」


「오늘 우리 학교에 수아 전학 오잖냐」


「수아?」


「하아···아무리 주연아밖에 모른다고 해도 말이지. 조금은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


「그래서 뭔데?」


「그, 해외 유명 인기 탤런트인 수아 말이야. 작년에 상영···아니, 네가 잘 마시는 포카리의 광고 모델로도 나오잖아. 지난달에 활동을 잠시 쉬고 학업을 위해 귀국하겠다고 기자회견까지 열었는데


「···그까진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 좋겠다. 너한텐 주연아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단 거냐」


「이제 그건 습관 같은 거라니까···」


내 말에 은근히 화난 듯한 표정을 짓는 학급의 동성 친구 유해빈. 소꿉친구인 그녀───연아에게의 고백이 백 번 넘게 실패한 나지만 어째선지 주변 녀석들은 나와 연아를 사실상 커플 같은 사이로 인식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얘긴데?」


그리고 그 순간 나와 해빈 사이에 끼어들어온 연갈색 머리카락, 연아였다


「오, 김선우 여친 등장」


「아니라니까. 어쨌든, 무슨 일이야? 교무실이나 교실이나 굉장히 어수선해 보이는데」


「너도 몰랐어? 오늘 수아란 탤런트가 우리 학교에 전학 온다고 하더라고」


「수아? 흐응···」


「응? 주연아 아가씨께서 갑작스러운 라이벌의 등장에 경각심을 느끼는 모양이군요. 학교의 아이돌 VS 진짜 아이돌. 자, 과연 승자는!」


「그러니까 그런덴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어쨌든 연예인이 우리 학교에도 오고, 별일이 다 있구나」


「그러게」


「김선우 너도 저 남자애들처럼 관심 있는 거야?」


「글쎄. 연예계 쪽은 그다지 흥미가 생기질 않아서」


눈을 지그시 뜨고 날 바라보는 연아. 그 속엔 너도 다른 남자들과 똑같냐고 추궁하는 듯한 눈초리가 담겨져있었다


「그나저나 난 너 일편단심이니까」


「네에, 네에」


「좋아해, 연아야」


「성은 제대로 붙이라고」


마치 국어책을 읽는 듯한 고백. 하도 많이 반복된 일이라 그런지 주변 녀석들도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김선우인가···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었는데 말이지. 중학교 입학 후부터 돌연 연아는 나를 풀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뭐, 연아에게 있어 난 단순한 남자 A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야. 자기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의 방패역으로서 나만한 건 없기도 하고


「다들 자리에 앉아라. 수업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 교실문이 열리며 탁탁 칠판을 두드리는 선생님. 그러자 반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무리가 질서정연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급식 메뉴는 뭐였더라···」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속 멍하니 창가 너머 날아가는 참새 무리를 바라보는 나


아무래도 오늘도 평화로운 날이 될 것 같았다···


***


점심시간


해빈을 비롯한 몇몇 녀석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나는 양치를 마치고서 교실로 돌아왔다. 다른 녀석들은 오늘 전학 온 1학년 연예인을 보러 위층으로 몰려간 뒤였다


난 그런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아란 아이에게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수아뿐만 아니라 연예계 그 자체에. 아마 주연아라는 미인이 늘 곁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 수업 시작까진 30분 정도 남았으니까···남은 학원 과제라도 할까」


의자에 착석한 나는 어젯밤 다 못한 학원의 문제집을 가방으로부터 꺼냈다. 연아는 교실 뒷문 근처에서 언제나처럼 다른 여자애들 무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응?」


웅성웅성,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듯한 복도. 남자들의 아우성대는 소리가 쿵쿵쿵 단체로 이동하는 소리와 겹쳐 점점 이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드르륵───이 교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 수많은 남학생을 뒤에 거느린 여학생 한 명이 교실 문턱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저 녀석이 그 수아란 아인가? 그보다 이 교실엔 갑자기 왜···?


상급생의 교실에 후배가 당돌히 찾아오자 나를 포함한 교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고정된다. 특히 그녀의 입실을 면전에서 마주친 연아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침묵으로 빠져드는 교실. 복도의 갤러리도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어라···?」


얼마간이었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끝난 것은 내가 나를 향해 누군가의 열띤 시선이 보내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니, 역시 착각 아닐까? 연예인이 내게 무슨 일이 있어서···───저벅


자, 잠깐.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저벅


그녀, 수아는 잔잔하면서도 확실히 주위에 파장을 일으키는 발걸음을 내디뎌가며 내가 앉은 자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에 곧 내 눈앞을 가득 채운 수아의 모습. 슬렌더한 체형에 청초한 긴 흑발의 전형적인 동양 미인상. 과연 연예인이었다······가 아니라!


「그, 제게 무슨 일이라도···」


무심코 경어가 돼버렸다


「김선우 선배, 맞으시죠?」


반면 수아는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빙긋빙긋 미소를 가득 띤 얼굴로 물어올 뿐


「김선우···라면 내가 맞긴 한데···」


「어릴 적 누리 초등학교 다니셨지요?」


「누리 초등학교···? 그건 또 왜···」


「다니셨는지 다니지 않으셨는지 그것만 확실하게 대답해 주세요」


「다, 다녔습니다」


「그런가요···그런가요···」


내 대답에 히죽히죽 웃는 수아. 그에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나였다


그리고 그다음 말은───


「선배, 저와 사귀어주시겠어요?」


「···네?」


***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아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핵폭탄


「「「에에엑───?! 고, 고백?!」」」


난데없는 수아의 고백에 교실과 복도는 유례없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경악스러운 외침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저기, 무슨···」


「저와 사귀어달라고 말했어요. 선배」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대답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전과 동일. 결국 사고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자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이성의 도피를 멈추게 한 건───


「안돼! 절대 안돼엣───!」


돌연 교실 뒤편으로부터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연아의 고함 소리였다


「그, 그런 건 절대 안되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필사적인 기색의 연아. 상당히 흥분했는지 연아의 얼굴은 새빨갰다. 또 그런 연아의 반응은 나뿐만 아닌 주위 모든 아이들을 벙찌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머···그쪽은···」


「하아···하아···」


「설마, 연아 언니···신가요?」


「···뭐?」


「그 반응, 맞나 보네요. 오랜만이에요, 연아 언니」


수아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을 유지하며 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연아는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해온 수아를 노려볼 뿐. 이런 상태의 연아는 처음이다···


「저예요, 저. 누리 초등학교 3학년 4반 조수빈」


「조수···빈···?」


「선배도 저 기억하시죠?」


조수빈, 조수빈, 조수빈···어디서 들은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빙글빙글 도는 사고의 숲,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자


「그럼 이 안경을 이렇게 쓰고···머리를 살짝 내리면···자, 기억나시나요?」


품속으로부터 웬 빨간 안경을 꺼내 쓴 뒤 앞머리로 눈썹 바로 위까지 가리는 수아. 그 얼굴은, 분명···


「서, 설마 그···수수녀···!」


허나 먼저 반응한 것은 연아 쪽. 연아는 그야말로 경악한 얼굴이 되어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기억해 주셨나 보네요. 그럼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오랜만에 뵈어요, 연아 언니」


「너, 너 어째서···! 그때 해외로 유학 간 게 아니었어···?!」


「갔었답니다」


「그럼 왜, 또, 지금 여기에···!」


「드디어 아버지께 인정받았기 때문이랄까요. 제가 뭐든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윽···!」


「그때는 참 감사했답니다. 설마 그런 걸 아버지께 보여줄 줄은···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후후···」


말문이 막힌 연아. 수아는 그런 연아를 비웃듯이 슥 바라보고선 다시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선배···음, 선우 오빠. 기억, 나시나요?」


선우···오빠······?


내게 여동생은 없다. 그런데도 오빠라 불린 기억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건 초등학생 시절 빨간 안경을 쓴 어두운 분위기의 여자아이로부터···


「···수, 수빈, 이···?」


내가 수빈의, 탤런트로서 활동할 때의 가명이 아닌 진짜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듯 내 양손을 맞잡아왔다


「드디어 기억해 주셨군요. 선배···!」


그것은 분명, 찰나에 불과했던 초등학생 4학년 때의 기억


나는 마음 한편 깊숙이 묻어두었을 터인 과거의 퍼즐이 다시금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초등학생 4학년, 가을 어느 날


병원에서 눈을 뜬 내게 달려오신 어머니가 한 첫 말은「괜찮니, 선우야」단 두 마디였다


그리고 뒤이어 들은 것은 그 여자아이도 무사하다는 말. 방금 전까지의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필사적으로 어떤 여자아이를 괴한으로부터 구하려고 한 듯한 느낌은 들었다


또 그를 증명하듯 내 몸 여기저기 감겨 있는 붕대. 자상은 많았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난 그렇게 그 여자아이, 조수빈을 알게 된 것이다


수빈이 내게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으로 안면을 튼 우리는 점점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당시 수빈은 상당히 내향적인 성격이라 반에서도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그걸 알아챈 내가 어떻게든 그녀의 진정한 첫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빈의 말문이 조금씩 열리자 참 뿌듯했지


다만 특이하게도 연아와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수빈이 연아와도 친하게 지내줬으면 하는 마음에 주선 자리까지 마련했지만 둘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결국 이후 몇 달간을 연아, 수빈과 번갈아 놀며 보냈고 돌연 수빈이 학교를 떠나면서 그 일상에도 끝이 찾아왔다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나와 수빈. 그것이 내가 수빈에 관해 지닌 짧은 기억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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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굉장히 성가신 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좋아해」라니 남자애들에게 놀림감을 제공할 뿐이잖아! 네 고집에 날 말려들게 하지 마! 라고


그러나 말의 힘은 무섭다. 유치원을 졸업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그 말을 계속 듣자 저도 모르게 선우가 좋아져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할 땐 확실하게 하는 남자애, 대다수 사람들과 다르게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날 향한 일편단심의 고백. 내가 선우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건 필연이었다


허나 내가 선우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수년 전,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며 홀연히 집을 떠나버린 아빠. 그 사건에 트라우마가 생긴 나는 나와 연인이 된───즉 목표를 달성한 선우의 마음이 바뀌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선우의 곁에 머물며 그의 마음만을 묶어두기로 했다. 다행히 나 이외 선우의 진가를 알아보는 여자아이가 없었기도 하고


그런데도 난 행복했다. 매일 아침 선우의「좋아해」로 시작되는 나날. 어느새 난 선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눈으로 좇으며 충실감으로 가득 찬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막 성에 눈을 떴을 즘에는 선우의 사유물을 몰래 가져와───물론 같은 제품의 새 물건을 갖다 놓았다───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괴감이 느껴졌지만 한 번 그 쾌감을 알게 되자 그 행위를 도저히 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언젠간 선우의 마음에 답을 해줘야 할 터.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혹여 선우가 내 기분을 알아차릴지 몰라 중학교 입학 후부턴 선우를 풀네임으로 불러왔지만 그것도 대학 졸업까지다


선우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줄 일이 생기지 않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곧장 결혼해 부부가 되는 거야. 그럼 내가 밖에서 일하고 선우가 전업주부를 맡는 편이 좋겠네. 그를 위해 성적도 지금까지 철저히 관리해왔고 카메라나 GPS의 사용법도 숙달해놨으니까


그런데···그런데···! 하필 지금, 그년이 나타나다니···!


선우를 상처 입힌 것도 모자라 선우에게 구해진 것만으로도 그딴 건방진 착각을 품은 년. 그런 건, 내 사랑에 비하면 종잇조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난 그 영상을 이용해 그년을 배제하는데 성공했지만···오늘, 보란 듯이 그년이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전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되지 않는 꾸며진 미모로


위험하다. 계획을 대폭 앞당길 필요가 생겼다. 어쨌거나 내가 넋 놓고 있던 사이 그년의 경제력이 날 아득히 추월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그래, 이번 여름방학을 이용해 응···기정사실을 만드는 것도 좋을 지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하여튼 그렇게 하면 선우는 분명 나만을 바라봐 줄 테니까


그런데도 내 선우에게 그년이 계속해서 접근하려 한다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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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림 같은 걸 그리라 했어?! 이번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것만 신경 쓰라고 했을 텐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전 아버지로부터 그런 질책을 들으며 멍하니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질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온 자신은 그저 인형에 불과했다고. 난 단지 부모님의 대리만족을 위한 인형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컬러인 세계가 흑백으로 뒤바뀌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전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듯 멍하니 살아갔습니다. 학업부터 친구의 교제까지, 그야말로 제 모든 걸 부모님께 통제당하는 일상. 이따금 몇몇 아이들이 제가 부잣집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기 혹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올 때가 있습니다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집안, 단순한 족쇄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 이 상태로 몇 년만 더 지낸다면 숨이 막혀 질식사할 듯한 갑갑한 공기에 눌리면서도 전 마지못해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3학년 어느 날, 전 그 사람───선우 오빠를 만났습니다


하굣길 도중 갑작스레 골목에서 나타난 괴한에게 잡혀 근처의 폐건물로 질질 끌려온 저. 그런 제 뒤를 몰래 밟아 괴한이 행위를 시작하기 직전 벽돌로 괴한의 머리를 내리친 선우 오빠. 그러나 불행히도 괴한은 그 타격 한 번으로 기절하지 않았고 곧바로 선우 오빠와의 난투극으로 발전했습니다


당연히 선우 오빠는 성인인 괴한에 비해 체구가 한참 밀렸습니다만 그런데도 절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괴한도 방금 전의 충격이 나름 큰지 비틀거리는 모양새였고요


결국 지면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쯤, 선우 오빠가 미리 연락해둔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때 의식이 불분명한 선우 오빠 곁에서 선우 오빠를 살려달라며 소리치던 자신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후 알게 된 거지만 그 괴한은 아동과 관련해 전과가 수 범이나 있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습니다. 만약 선우 오빠가 오지 않았다면···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인생은 선우 오빠에게 구원받은 겁니다. 제가 선우 오빠에게 반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전 선우 오빠와 더듬더듬 말을 나눠가며 선우 오빠와 있는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언젠가 종례 후 용기 내어 선우 오빠의 반에 찾아가자 선우 오빠가 반갑게 날 맞아준 건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쨌든 선우 오빠는 당시 소극적인 제게 화내는 일 한 번 없이 꾸준히 저와 어울려줬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요───제게 있어 선우 오빠는 첫사랑이자 첫 친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순탄케 지속되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선우 오빠가 같이 친하게 지내라며 데려온 어떤 언니. 전 그 언니를 보자마자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결코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아마 그건 그 언니, 연아 언니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마치 물과 기름 같은 상극의 관계. 선우 오빠가 습관처럼「좋아해」라고 말하는 상대가 연아 언니인 것을 알자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선우 오빠로부터 늘 좋아한단 말을 듣는 연아 언니가 너무나 부럽고, 미워서···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그러나 그럴 용기가 어린 제게 있었을 리 없는 법. 그렇기에 선우 오빠를 사이에 두고 저와 연아 언니가 기싸움만을 할 뿐인 나날이 몇 개월간 이어졌습니다


허나 그 밸런스는 제 치명적인 실수에 근거한 연아 언니의 공격 단 한 번만으로 허무하게 무너져내렸습니다. 찍힌 겁니다, 방과 후───아무도 없는 선우 오빠의 반에서 선우 오빠의 책상으로 스스로를 달래던 저의 모습을


그 영상은 익명의 우편으로 제 아버지 앞에 배달되었고 엄격한 아버지가 이를 그냥 지나칠 일은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널 구해준 건 고맙지만 딱 그까지다. 이건 선을 넘었어───아버지의 그 말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예정이었던 해외 유학이 순식간에 앞당겨졌습니다. 애초 아버진 전부터 제 일과에 끼어들기 시작한 선우 오빠가 은근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리하여 전 선우 오빠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도망가다시피 해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꿈에도 간간이 나오는, 정말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우 오빠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우 오빠를 향한 연정은 더욱 커져···전 자기자신을 선우 오빠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여자로 닦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소극적인 성격도 고쳐···학업에 더욱 매진해서···처음으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 기획사에 지원서를 넣어···자력으로 선우 오빠가 있는 곳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이 정도면 충분해. 부모님의 도움 따위 일절 필요 없이 나 혼자 힘만으로도 선우 오빠와의 생활을 지지할 수 있어.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선우 오빠가 날 맞이하는 가정···아아, 상상만 해도 행복해


그러니, 이번만큼은 다를 거예요. 연아 언니


좋아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연아 언니가 아주 잘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설령 이번에도 연아 언니가 날 방해하려 한다면 전, 연아 언니를······


***


이상하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어. 선우 옆에서 떨어지도록 해, 조수빈」


「이제 와서 솔직해지려 하다니, 제가 없을 동안 연아 언닌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요? 한심한 여자네요───」


등굣길, 학교 정문 앞


여학생 두 명에게 양 팔을 붙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나. 가득 호기심 담긴 시선을 보내는 여학생들도 여학생들이지만 주변을 지나가는 남학생들의 증오가 엄청났다. 특히 해빈은 배신자란 말까지 했고 말이지


그나저나 연아는 날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었나? 갑자기 다시 이름으로 부르기나 하고···정말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그저 오래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를 뺏길 것 같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있잖아, 연예인이 이래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최근엔 공개 연애를 하며 활동하는 연예인들도 많으니까요」


「직업윤리 의식이 쓰레기네」


「도촬하는 어떤 여자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상 말하면 죽인다」


「이젠 저보다 키도 작으시면서 말이죠. 왜 자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이, 이봐」


쓰레기니 도촬이니 죽인다니 흉흉한 말이 계속해서 들려오자 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 사람을 방치했다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무슨 사단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우 오빠」


「으, 응?」


「이번 여름방학에 단둘이 바다로 놀러 가시지 않을래요? 좋은 별장 하나, 알고 있답니다. 비용은 제가 전부 부담할 테니까요」


「에?」


「안타깝지만 그럴 순 없어. 선우는 이번 여름방학에 나와 함께 내 집에서 보내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해외출장을 가는 엄마도 선우에게 날 잘 보살펴달라 말했고 말이지, 응?」


네···네에······? 처음 듣는 말인데요······


「선우 오빤 저와 함께 있을 거지요?」


「선우 넌 줄곧 좋아한다고 말한 소꿉친구와 함께 있을 거지?」


갑작스레 내 앞에 놓여진 양자택일. 무엇 하나 확실하게 고르기 힘든 난제였다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자 눈앞 가득 펼쳐진 푸른 하늘. 구름 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이 어디까지나 뻗어 있었다


「선우야?」「선우 오빠?」


내가 멍하니 현실도피해있자 날 재촉하듯 불러오는 두 사람


아무래도 이번 여름방학은 평소완 크게 다른 여름방학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