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만났던 연인들에게 어찌 보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할법한 말을 하였다. 


 "하나만 약속해줄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로, 나를 만나다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말해줘.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연애하는 사이지만, 그럴 땐 너를 위해서 내가 포기할게."


내가 사귀었던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답은 이러했다.


 "너를 두고 내가 누굴 만나. 그럴 일 없어."


나와 비교하면 너무나 빛이 났던 너희였기에.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볼 정도의 너였기에.

잠시 자리를 피해 있다가 돌아오면 너와 대화를 해보겠다며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는 너였기에.

그런 너희였기에 내 고백을 받아 준 것에 너무나도 고마워 그런 말이라도 해야 내 맘이 편했으니까.

그런 고마운 너희에게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썼어. 해달라는 것은 다해주려고 노력했고, 그저 넌지시 던지는 말 한마디라도 고이 간직하기도 했고.

네가 더 좋아할 만한 것이 뭐 더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지.


그런데, 


나를 두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넌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

하나는 동성 친구랑 술 마신다고 해서 굳게 믿었는데 나이트에 놀러 간다던 내 친구가 보내준 사진으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놀고 있는 너의 모습을 보았고.

아, 자유롭게 놀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붙잡아둔 것이 아닌가 하고 너에게 관심을 조금 끄기도 하였지. 

또 하나는 네가 갑자기 약속이 있다고 하여 데이트를 취소하자 옷이나 사러 갈 겸 백화점에 갔다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아, 걔는 오빠랑 다르게 너무 가난해서 싫어." 라고 하는 말을 들었지.

그렇구나. 하긴 너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도 엄청나게 치장하고 선물 받고 그러는데 내가 너에게 주는 건 너무 값지지 못한 저렴한 것들뿐이니까 미안함에 너 몰래 주말에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지.


마지막으로 일찍 퇴근해서 깜짝 놀라게 해줄 심산으로 너의 집에 갔을 땐, 너 혼자 있어야 할 네 집에 네 목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하나 더 들리더라.

문은 다 열어둔 채로 말이지.

설마 했어. 아니겠지. 다른 집이겠지 하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걸어 들어갈수록 안타깝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너의 집이 맞았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다 꺼지고 너의 방만 아주 얇은 빛만 비추길래 아주 조심히 현관문을 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데 집안은 뜨거운 온기로 가득 찼고 땅바닥에는 널브러진 옷과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하얀 액체와 콘돔이 보였어.

아닐 거야. 아니 여야 해. 자꾸 기분 나쁘고 수상한 생각이 내 정신을 잡아먹으려 해도 굳게 붙잡고 걸어갔어.

닫혀있지 않은 방문 안에서 들려오는 너와 어떤 남자의 헐떡이는 끈적한 교성은 더 커져만 갔고 벽에 기대 둘의 행동을 몰래 지켜보았어.


 "하아. 네 남자친구 올 때 되지 않았어?"

 "아잉. 문자로 심부름시키면 돼. 걘 내가 하는 말이면 껌뻑 죽거든."

 "아이고. 이거 완전 남친이 아니라 셔틀이잖아."

 "어차피 오빠 대신에 사귄 액세서리 같은 애라니까 앙. 조만간 헤어질 거야."

 "아. 능력 있고 예쁜 우리 여친 보니까 쌀 것 같은데~ 아. 나온다! 잘 받아라!"

 "응~"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와 너의 대화.

나한테는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남녀의 관계.

나한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색정적인 표정.

나한테는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그 야릇한 음성.


특히, 네가 나한테 가진 감정은 그저 잠깐의 유희 거리 밖에 안된다는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니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더라.


 "아."


하마터면 소리가 나올까 봐 양손으로 입을 막고 몸을 돌려 조용히,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조용히 아주 천천히 걸어나갔어. 현관문에 도착하니 눈이 뿌옇게 되어버리고 울먹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는 것 같아 들키는 것이 아니냐고 조마조마했다.

평상시대로 걸어도 누가 들어왔다고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나온 다음 너의 집 근처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뛰어가 하염없이 울었다.


 "왜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거지? 남자친구는 나잖아. 근데, 왜, 왜…. 왜 그런 거냐고…."


나한테는 학교에 다니는 우리에게 너무 먼 것 같다며 하지도 않았던 관계인데 다른 사람이랑은 버젓이 하는 너를 보고 정신이 아찔해졌지.

다 때려 부숴 버리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유약했던 성격의 나라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지.

차라리 고백을 받아주지 말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밖에 안되는 내 노력이 뭐가 되냐고. 

질질 짜며 처 울다가 흔들리는 휴대전화기를 보니 아까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문자가 왔더라.


 "우리 집에 오면서 버스 조금만 더 타고 가면 자주 가는 편의점 있잖아. 거기서 생수 세트 좀 사 올 수 있어?"

 "하하. 진짜로 심부름시키네…."


정말로 너에겐 그 사람이 진짜 남자친구구나.

이 심부름 하고 너희 집으로 가려면 최소 50분은 더 필요하잖아.

너와 그의 관계를 본 충격이 가시질 않아 너에게 오늘 몸이 아파서 집에 가봐야겠다고 하였지.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얼마나 사랑했는데.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기다리면서도, 집으로 가기 위해 탔던 버스 안에서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울며 울면서 터벅터벅 맥이 빠진 상태로 갔다.

그저 난 장난감. 원래 남자친구를 대신 할 액세서리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에 허탈한 가슴을 끌어안으며 한탄했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다녀왔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베개에 머리를 처박으니 다시 한 번 울음보가 터졌다.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 기분 좋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괜찮니? 문 좀 열어보렴."


걱정하시는 아버지는 내버려두고 너와 그의 교성과 내 감정 따윈 무시했던 너의 행동들이 내 머릿속을 돌고 돌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일 끝나면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으므로 보자고 했던 너의 문자를 보고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진이 빠진 상태로 너를 만나러 갔지.

카페에 들어가서 앉으니 내 머리로는 잘못은 네가 했는데 언제나 당당한 네가 보였어.


 "할 말 있어."

 "응."


분명 이때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울었던 기억이 나는데 넌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

오히려 생판 남들이 나를 걱정해 줄 정도였으니까. 


 "헤어지자."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

어떤 말을 들을지는 어제 이미 잘 들어서 알고 있지만 바로 앞 상대에게 들으니 파괴력이 남달랐다.

누군가가 내 가슴을 칼로 여러 번 쑤셔 박은 것도 모자라서 그 구멍에 손가락을 비집고 넣어 억지로 찢은 것 마냥 아팠다.

너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물어보지도 말았어야 할 질문은 하고 말았다. 


 "그래…. 그렇구나…. 혹시 말이야…. 훌쩍. 내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나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냐고.


 "너무 담백해서 질려."

 "그 오빠가 더 세심하게 잘해줘."

 "네가 돈 없는 것도 싫고."


처음에는 나와 다른 그들의 행동에 눈이 갔고 그러다가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말했지.

실제로는 이미 나를 만나기 전부터 만나고 있었는데도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찌르는 것이 너무나 아팠다. 


 "내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나 힘든 줄 몰랐어. 다른 남자보다 많이 모자라서 미안해."


화도, 슬픔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좋게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너에게 꽃길만 걷길 바라며 그렇게 말했어.


 "알면 이제 끝내자. 지겹다."

 "훌쩍. 알았어."

 "남자 새끼가 질질 짜기는."


하지만 나에게 모질게 악담을 퍼붓고 당당히 걸어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널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 흘렸다.

아, 승산도 없는 싸움이었구나.

정말 처음부터 아무런 감정 없었구나.


 "우윽. 흑흑. 으으으."


처음으로 느낀 실연.

나의 잘못보다 처음부터 합이 맞지 않게 잘못 끼워진 인연의 실.

바라보지 말아야 했을 너무나도 아름다운 너에게 고백한 날을 후회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지냈을까.

사랑의 아픔은 사랑으로 푼다고.

힘들어하던 나를 보고 학교나 밖에서 내 옆에 계속 있어 주면서 나를 위로해주던 귀여운 후배 하나가 있었지.

처음엔 엄청나게 지겨웠어. 그저 몇 번 눈 마주치고 궁금하다고 물어보는 것들 답해준 것 말고는 연이 없던 그 후배였는데

조금이라도 건강해지라고. 이거라도 먹어야 산다고 죽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문자나 전화를 끊임없이 해서 나에게 힘내라고. 선배는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내게 기를 불어넣어 주던 너에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더라. 

후에 가서는 그 후배가 너무나 고맙고 예쁘게 보였어.

첫사랑과 전혀 다른 포근함. 내가 더 사랑해주기보다 더 많이 받았던 사랑. 

맞아. 그런 너의 행동에 반해 고백했지.

나를 위해주는 것도 좋았고 나를 걱정해주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그런 너도, 선배와 헤어져서 너무나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안쓰러워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했던 것인데 좋게 받아주니 아주 고맙다고.

손을 마주 잡고 입을 맞추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 이제 첫사랑의 나쁜 기억에서 벗어 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지.


 "우리 다른 사람은 비교하지 말고 우리끼리만 보고 살아요."


너의 그 말을 들으니 인제야 내가 정말 사랑할 사람을 찾은 것 같아 너무나 기뻤지.


하지만,

너무나 잘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모양이라,

괜히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오지랖 떨며 너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하며,

너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다고 여러 가지를 알려주려고 나서기도 하였지.

처음 사귀었던 그녀에게 들었던 불만을 곱씹어 너에겐 그런 것 전부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조금은 변화를 주기도 하였어.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밀고 당기기도 해보고, 어느 때는 너에게 애간장을 태우고 싶어 연락을 늦게 하기도 하였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넌 하나하나 비교하며 내게 신경질을 냈지.


 "○○ 선배처럼 나를 애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처럼 대해주면 안 돼? 난 애가 아니야."

아니야. 내가 왜 너를 애처럼 대해. 그저 나는 알고 너는 모를 것만 같은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왜.


 "난 내가 오빠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면 오빠도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나만 아주 좋아 했나 봐."

내 첫사랑이 나보고 너무 담백하게 연애한다고 해서 조금은 변화를 주지 않으면 너도 그렇게 떠날까 봐 무서워 변화를 주었던 것인데 왜.


 "내 친구는 □□ 선배한테 기념일에 가방 선물 받았다고 막 자랑하던데 오빠는 그래 줄 수 없어?"

그게 아니잖아. 우리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지 말자고 해놓고 네가 먼저 그러면 어떻게 하니. 

나라고 선물 안 하고 싶은 게 아니야. 하고 싶지만, 우리 집 생활비가 막막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인데 분명 설명도 해주었는데 그걸 못 기다리니.


그런 너도 나보다 더 멋지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좋았는지, 아니면 내 행동에 질렸던 것인지는 잘 몰라도

너도 내 곁을 떠났다.

다른 누군가를 더 좋아하게 된다면, 그 사실을 먼저 말만 해준다면 언제든 떠나겠다고 했던 나에게

네게 선물을 주기 위해 몰래 야간 아르바이트를 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른 남자의 손을 잡으며 모텔에서 나온 것을 보았으니까.


너의 사랑을 실로 삼아 상처가 나고 구멍이 나고 찢어졌던 내 심장을 잘 꿰매주었던 그 실을

네가 도로 뽑아 가져가 버렸다.

당연히 완벽하진 않아도 흉터가 아물어가던 내 심장은 다시 한 번 찢어 흩뿌려졌다.


믿을 사람 없구나.

사랑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나는 그렇게나 배려를 해주고 노력했는데.

첫사랑이었던 그녀의 조건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지루하다고 했기에

너에겐 그 지루함 주고 싶지 않아 조금은 변화를 주고자 정말 노력했던 것인데.

부질없구나.

쓸모없구나.

그렇게 하염없이 집에 처박혀 울었다.


그러다가 받은 한 통의 전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


그렇게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너희 둘의 마음을 얻고자 동분서주한 것에 대한 결과물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며 다른 남자가 더 좋다고 말하는 배신감과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알아. 아버지 건은 핑계인 거. 원래 몸이 편찮으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내가 학교 다닐 때 심장병 수술도 하시고, 지주막하 출혈로 수술도 하시고 편치 않은 몸으로 생계를 위해 막노동도 하시던 분인 것을 잘 알지만,

그저 내 삶의 흥미를 위해 아버지 건강은 생각하지도 않고 연애나 하러 돌아다닌 결과가 병실에 누워 쓸쓸히 혼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만 남았지.


처음에는 전후 사정 하나도 생각 안 하고 화밖에 안 났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아니, 왜 아프신 분이 말씀 하나도 안 하시고 계시다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히 계셨던 건가.

왜 우리 아버지는 건강하지 않으신 건가 하고 원망만 했다. 

그래.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시대에 안 어울릴법한 폴더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지.

스마트폰으로 바꾸면 편하신데 왜 안 바꾸시느냐고 여쭤보아도 이게 아니면 안 된다며 안 바꾸시던 폴더폰.

왜 그것을 보게 되었는지는 몰라.

아버지의 폴더폰 안에 있는 메시지와 메모를 보니

눈물이 왈칵 나더라.

거기에 남아있는 메시지는 내가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 기분 좋다고 아버지께 알려드린 메시지들과 그녀와 같이 있겠다고, 그녀와 밥 먹고 들어간다고, 또는 늦게 들어간다고, 모시고 가기로 했던 병원은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한다고 같이 못 갈 것 같으니 혼자 가시라고 했던 메시지 등 나에 대한 것만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달력을 켜보니 내 생일과 이전에 사귀었던 그녀의 생일들이 다 등록되어 있었지.

내 아들 첫 여자친구 생일. 내 아들의 첫 데이트 날 등 여러 가지로. 둘이 어디 가서 사진 찍어 보내면 그것도 폴더폰 달력에 내가 보내드린 사진을 연결하시며 하나하나 기록하시던 것들.

아버지의 폴더폰을 가슴에 안으며 펑펑 울었어.


미친 새끼. 

발정이 난 개새끼.

☆이 머리를 지배한 쓰레기 새끼.

능지처참해도 모자랄 새끼.

거열형을 해도 죗값이 남아 육시를 해도 모자랄 새끼.


남들에게도 하지도 못할 심한 욕을 나 자신에게 연신 퍼부으며 살면서 제일 크게 외쳤어.

내가 진짜 미친 새끼구나.

하나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나를 엄마 없는 자식 같아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나하나 관심을 가졌던 것인데.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어떻게든 먹여 살리기 위해 남들한테 싫은 소리와 손찌검 받는 일용직도 하신 분인데.

연애에 미쳐서 내가 잘 되길 진짜로 빌어주던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체, 나따윈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정신 팔려서 아버지의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구나.

나를 제일 걱정하는 사람은 신경 쓰지도 않은 체 이게 도대체 뭐냐고.


일이 끝나면 아버지께서 입원하고 계신 대학병원에 가서 병간호를 하였지.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진 않았으니까.

매일매일 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 병원을 들락날락하다가 화장실에서 있던 거울로 나를 바라보았지.

내 기억 속의 내 모습이 아니라 초췌하고 피폐한 모습을 한 정신병자 같은 모습이 보였어.

전엔 없던 눈그늘도 생기고, 윤기가 없어 초췌하고 갈라진 피부와 잘 보이지도 않던 턱선과 목선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지.

고개를 내려 몸을 보니 뼈다귀가 따로 없더라.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더 예쁘게 바라본다고 하던 연구결과를 생각하고 바라보아도 앙상한 몸에 너무나 실망했지.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런 모습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다간 내가 먼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


잠깐.


죽어?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죽는다고?


미친 소리.


절대로 그럴 순 없지.


이 이상 잘못된 길은 걸어가고 싶지 않았거든. 

이 모습으로 살면 오히려 먼저 골로 가서 진짜 불효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

다른 남자 좋다고 떠나버린 망할 년이 놓고 간 피붙이를 어떻게든 키우겠다고 노력한 분을 위해서.

이전엔 해보지도 않았던 나 자신을 꾸미기 시작했어.

편식쟁이였던 나이지만, 건강해지고자 먹어보지도 않았던 나물과 해산물도 억지로 먹었지.

평상시에 먹지도 않던 것이라 남들은 맛있다고 하는 그 식감 때문에 헛구역질하기도 했지만 내 몸 건강을 위해 참았어.

이런 깡마른 모습으론 일과 아버지 병간호를 같이하다가 체력이 모자라 양쪽에 문제가 생길 것 같기도 하니 운동도 시작했지.

팔굽혀펴기 10번도 못하고, 몸무게가 가벼워 윗몸일으키기랑 턱걸이만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수준밖에 안 되는 몸이라

이것저것 운동을 하여도, 아주 조금만 해도 바로 녹초가 돼버리고 금방 포기하고 싶더라.

관둘까 하는 생각이 들어도 나도 아버지처럼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 간호를 못 할 거라는 생각에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몸의 구조신호 따위는 무시하고 한 개라도 더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을 대비해서 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해 치매와 관련된 서적도 여럿 읽어가며 아버지를 간호하였지.

그런 식으로 여러 책도 읽다 보니 지식도 조금은 늘었어.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마지막으로 여러 스타일 잡지를 읽어가면서 요즘 유행하는 패션도 이해하기 시작했어.

내가 멋지게 보여서 인기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이런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


평상시와 똑같은 아버지의 병간호.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많이 달라졌어. 


"아이고. 미남이 아주 효자야 효자. 일 끝나고 바로 오기 힘들 텐데."


평상시엔 그저 착하다는 말만 들었지만 이젠 수식어가 하나둘씩 더 붙여서 들려와.

하지만,

딱 하나.

너무나 거북하고 속 쓰린 저 단어. 


 "그렇죠? 우리 아들 아주아주 잘 생기고 멋진 효자 맞습니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보이시며 웃는 아버지를 보면서 너무나 아팠어.

아빠.

그런 말씀 하실 때마다 얼마나 마음 아픈지 아세요?


 "감사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얼굴은 웃고 그 반대인 속으로는 개탄하며 구슬프게 울었다.

지금껏 그렇게 힘들게 내버려둔 인간이 누군데 효자라고 높여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효자 절대로 아니라고. 제발 그렇게 칭찬하지 마시라고.

그냥 차라리 못난 놈이라고 욕해주시면 좋겠다고.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게 속으로만 말했다.


무슨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이전엔 연락도 하지 않던 녀석들이 만나자고 연락하더라.

여럿이서 소개팅하고 싶은데 얼굴마담이 하나 필요하다고 나를 부른다든가.

예전엔 음침하다고 깔깔거리며 비웃던 여자애들한테도 메시지를 받으며 지금 만나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였지.


전부

무시했다.


내가 네놈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꾸민 줄 아는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외형이 나아지자 바로 태세를 바꾸고 달려드는 것들을 보면 역겨워 울화통이 터졌다.

물론, 연락하지 말라는 뜻에서 무시하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들.

일과 일상 둘 다 겸하던 휴대전화기로는 정상적인 업무와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업무전용 휴대전화기를 하나 더 개통하고 일을 했지.


그리고 지금 내 앞엔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 피가 뚝뚝 떨어져 이젠 흘릴 것도 없을 정도로 깡마르게 만들었던 내 첫사랑 그녀와

그녀가 나를 매몰차게 차버렸던 그 카페 그 자리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미안해."


그때와 달리 반대로 되어버린 상황.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화려해 보였던 금발로 염색하고 웨이브컬을 주었던 머리가 아닌 깔끔한 단발머리.

오뚝한 코, 조그마한 입술. 얄상하고 갸름한 얼굴. 몸이 마르고 엉덩이가 작아 코트가 예뻐서 겨울 패션에 아주 멋졌던 그녀.


확실히.

조금은 달라졌을지언정 예전의 네가 맞다.


근데,

뭐가 미안한 걸까.

우리 사이 다 끝난 지 오래인데.

미안할 것 하나 없는데.


"내가 잠시 눈이 삐었었나 봐. 넌 원래 이렇게 잘났는데 잘 몰랐었어."


정말 신기한 것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너의 모습은 내 가슴을 그렇게나 두근거리게 하던 그때의 아름다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내 심장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더라.

평상시보다 더 차갑고, 정신은 올바르게 냉철해.

오히려 친구네 집에서 기르는 하늘다람쥐를 볼 때가 더 두근거려.


 "이 나이 먹고 보니 너처럼 나한테 세심하게 관심을 둬 주는 사람이 없었어."


 `너무 담백해서 질려.`

 `그 오빠가 더 세심하게 잘해줘.`

 `네가 가난한 것도 너무나 싫고.`


나보다 더 좋다고, 돈 없는 난 싫다고, 나를 액세서리처럼 취급하고 무미건조한 연애 같아서 너무나도 지루하다고 떠났던 너인데 왜 이제 와서 그게 그립다고 하는지.


첫사랑 그녀를 만난 다음엔 내가 그녀와 헤어져 너무나 힘이 들어 침울해 할 때 나를 위로해줬던 두 번째 사랑도 나에게 말했지.


 "오빠. 내가 미안해."


얘도 뭐가 미안한 걸까.

다 끝났는데 뭐가 미안해.


 "처음엔 오빠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건데…. 난 역시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좋은 거 같아."


예전의 동글동글한 깜찍함을 간직한 체, 키는 조금 작았지만 풍만한 몸매가 남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너.

엉덩이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컬을 준 연한 갈색 빛깔의 너.

대소변을 못 가려 혼날까 봐 두려워 눈치를 보는 강아지 마냥 초롱초롱하고 귀여운 그때의 너 그대로인데도

내 눈으로 보기에 네 외형은 예전 그대로 귀엽다고 느낄 뿐. 

이전과 다르게 내 마음속에서 깊은 곳까지 퍼져 나오던 그 따뜻함은 하나도 없더라.


 "처음엔 그 인간이 그렇게 꼬시니까 넘어가게 돼버렸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 선배처럼 나를 애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처럼 대해주면 안 돼? 난 애가 아니야.`

 `난 내가 오빠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면 오빠도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나만 아주 좋아 했나 봐.`

 `내 친구는 □□ 선배한테 기념일에 가방 선물 받았다고 막 자랑하던데 오빠는 그래 줄 수 없어?`


남과 비교하지 말자던 네가 그렇게 해놓고 이제 와서 안 할거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다른 시각.

다른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하는 너희 둘.



""다시 시작하고 싶어.""


너희 둘의 말을 들은 난 불쌍하다는 생각도, 가엾다는 생각도, 이제 와서 나에게 와준다고 해서 정말 고맙다고.

그런 생각으로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다른 생각.

너희가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나를 거세게 몰아붙인다.


 "아빠처럼 하나하나 신경을 쓰는 아빠가 세상에 어딨느냐고요! 그런 건 좀 내버려두라고요!"

 "오늘 급식은 뭐가 나왔느냐 그딴 것 물어보지 좀 마시고, 친구들 부모님은 놀이공원도 같이 가고 그런다는데 그런 관심이나 좀 써주세요."

 "다른 애들 부모님은 용돈도 많이 주신다는데 이 돈으로 부끄러워서 애들이랑 어떻게 놀러 가느냔 말이에요!!"


☆같은 새끼.

아버지께 철없이 행동하는 내가 생각나 나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게 되고 화가 나더라.

너희가 나를 떠나게 하였던 그 이유가

내가 아버지를 싫어했던 그 이유니까.

내가 아버지께 싫다고 했던 그것들이더라.

진짜 나를 봐주고 사랑해주시는 분은 보지도 못한 체, 그저 대가리가 아랫도리에 지배당해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가는 마을 사람 마냥 따라다닌 것이지.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오빠…. 그렇게 욕할 거 없잖아."


속으로 생각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입 밖으로 나온 듯싶다.


 "오해하지 마. 절대로 너한테 한 말 아니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너희 둘을 쳐다보며 난 답했지.


 "그건 그렇고. 싫다고 떠날 땐 언제고 이젠 그것들이 다 그립다고 하냐."


그러게. 너희라면 나 없어도 다른 놈 잘 꿰서 잘 먹고 잘살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오는 거냐.


 "진짜 몰랐어. 젊을 땐 그저 자극적인 것만 찾다 보니까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아니야."

시답잖은 변명하지 마라.

일찍 퇴근하고 너희 집에 갔을 때 그 어둡고 끈적했던 실내, 거지 같은 비릿내, 나를 가지고 놀았던 대화 전부 다 기억난다.

토악질 나게 하지 마라.


 "미안해. 오빠처럼 잔잔해도 오랫동안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아니지.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너도 자극적인 것이 좋다고 그딴 행동을 한 거잖아.

둘 다 내 모습이 변하니까 돌아온 거잖아.

남들이 말하길 멋있게 변했다고.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하니까 남을 주긴 아쉬워서 모습은 바뀌어도 성격은 예전의 나인 것 같아 살짝 꼬시면 넘어올 줄 알고 그러는 거겠지.

그런 너희 둘에게 조용히 이렇게 답했다.


 "난 너랑 다시 할 생각 전혀 없는데."


 "하. 좀 꾸몄다고 뻗대냐. 재수 없게."

 "오빠. 실망이네. 많이 변했다고 듣긴 했지만 진짜로 많이 변했어.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보자."


속상해하며 화를 내고 뒤돌아 가는 너희를 보고 난 말했지.


 "가라지."


영원히.



내 속을 칼로 쑤셔버리고도 모자라 아주 토막을 내버린 두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 집에 와있다.

간단하게 씻고 대학병원에서 퇴원하시고 내 집에 머무르고 계신 아버지께 저녁을 해드리고 내 방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지.

그리웠냐고?

혹시 슬펐냐고?

아니면, 정반대로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어 개운하냐고?

아니. 

전혀.

그 어떤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그 둘이 무슨 인생을 살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거든.

오히려 다시 한 번 보게 된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거든.

그래. 아주 감사할 정도였지. 

그 둘이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연애질이나 하다가 영원히 불효자로 남을뻔했거든.

지금도, 내가 죽을 때가 된다 해도 불효자인 것은 변함없지만 적어도.

아주 조금이라도 아버지께 진 빚을 아주 조금은 갚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 날이 되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건강을 위해서 사드리고 싶진 않지만,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깨끗한 찬이슬 두 병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 문 앞에 서니 아버지랑 낯익은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버지가 집에서 누구랑 대화를 나누시는 거지?

의아함을 가진 체 잠금장치를 열고 들어가니

지저분하게 한 상태로 출근한 것으로 알고 있는 현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들 옆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베이지색의 높은 굽을 지닌 하이힐이 보였다.

정리된 건 둘째치고 저 하이힐 뭔데. 

여자? 뭐야. 이거.


 "이제 온 거니?"


무엇이 기쁘신지 편찮으신 몸으로 환하게 웃으시면서 현관문으로 들어온 나를 맞이 해주셨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오냐. 네 여자친구가 과일도 깎아주고 집도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여러 가지 많이 도와주었단다."


무슨 말씀이시지.

나 여자친구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