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문득 달력을 보고 깨달았다. 10월 31일. 오늘이 할로윈이구나.


 혹자는 자국의 풍습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타국의 축제를 즐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그다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할로윈 축제가 소수의 유흥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거리를 수놓은 호박과 유령 장식. 기괴한 분장과 가면. 가지각색의 코스튬. 단순히 즐기고 싶은 사람만이 즐기는 그들만의 축제. 하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관심이 없는 쪽에 속했다. 예전까지는 그랬다.


 "얀붕아!"


 그런 내가 할로윈을 갑자기 의식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얀순이 때문이었다.


 "왜 왔어."

 "쌀쌀맞긴. 당연히 보고 싶어서 왔지."


 그녀는 그녀 특유의 바보같은, 좋게 표현하자면 순수한 미소를 띄었다. 가슴골이 조금 드러나는 고딕풍의 검은 드레스와 도발적인 망사 스타킹.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마녀 모자. 하늘이 깜깜해지도록 아무 생각이 없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제대로 할로윈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Trick or treat!"

 "미안, 과자가 없어서."

 "그럼, 장난쳐도 되지?"


 그녀가 유혹하듯 나를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상체를 숙여, 코가 맞닿을 법한 거리까지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그 깊은 눈동자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던 순간, 나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녀를 밀쳐냈다.


 "그만해."

 "왜?"

 "왜냐니, 당연하잖아."


 천연덕스러운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천연덕스러운 건지 모를 그녀를 향해, 나는 과거에 그토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내뱉었다.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그녀가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수긍하는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와 헤어진 것은 몇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미 나에게는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그녀였다. 갑자기 내게 찾아와서는, 마치 예전에 나를 대하던 것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부탁이야. 할로윈 축제 가자, 응?"

 "안 돼. 일이 밀려 있어서."


 나는 옆에서 앙탈을 부리는 그녀를 애써 무시했다. 코스프레를 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에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치, 오랜만에 왔는데 이러기야?"

 "너야말로 오랜만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이미 끝난 사이를 자꾸 물고 늘어지는 그녀에게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폭발하기 전 감정을 추스려 얀순이에게 한마디 하려고 한 그때였다.


 "됐고, 어서 가자! 오늘 일 없는거 다 알아!"

 "어, 어?"


 그녀는 그 작은 몸으로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당황스러움이 앞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집 밖을 나섰다.




 "어때, 재밌었지?"


 얀순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떠들썩한 거리를 그녀와 함께 걷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볼거리도 많았고, 그녀와 함께 걷는 할로윈 거리도 특별했다. 지금까지 어린애들의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응."

 "거봐, 내가 놀러 가자고 했지?"


 그녀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끊임없이 즐거워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너랑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다."


 아무리 결심을 다져도,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기쁨을 드러내는 얀순이에게, 나는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있잖아."

 "응?"

 "할로윈에 사람들이 분장을 하는 이유가 뭐야?"


 익숙한 질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번에 말해 줬잖아."

 "또 듣고 싶어서 그래. 들려줘, 응?"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부탁을, 나는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할로윈에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귀신, 괴물, 마녀 등등 나쁜 존재들이 출몰해서 사람들의 몸을 뺏어간대.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그 존재들의 모습을 흉내내는 거야."

 "하하, 맞아. 그랬지."


 이제야 기억났다는듯 그녀가 쿡쿡 웃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분명 이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얘기잖아."

 "그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네."


 간신히 잊었던 추억들이, 그녀와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얀순아."

 "응?"

 "이제, 그만해 줘. 우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

 "그건..."

 "너 달리 만나는 여자친구도 없잖아."

 "그치만..."

 "내가 싫어졌어? 다른 여자가 좋아졌어? 내가 예전에 잘못한 것 때문에 그래?"

 "얀순아..."

 "왜! 난 아직도 널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왜!"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는 내게 소리쳤다. 착잡한 기분이 내 마음을 지배했다.


 "계속 지켜봤어..."

 "..."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계속 지켜봤다구..."

 "..."

 "난 너만 있으면 돼...그러니까 제발 나랑 같이 있어줘...이렇게 1년에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더 이상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냥, 편하게 가...제발......"

 "뭐...?"

 "여기서 더는 괴로워하지 말고, 가라고......"


 서서히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의 투명한 눈망울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미안해......하지만......"

 "..."

 "난 아무렇지도 않아...평생 네 곁에 있을 거야......"

 "..."

 "나 없이 행복해도 좋아. 나를 잊고 살아도 좋아. 그러니까......"

 "..."

 "네가 나처럼 눈을 감게 되기 전까지, 난 영원히 널 지켜보고 있을게......"


 신이 있다면, 간절하게 빌고 싶었다.

 부디 이 불쌍한 영혼을 구제해 주소서.


 "오늘은 그만 갈게. 그 전에...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가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나를 향해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맞닿았다. 그녀의 눈물 맛이 조금 짜게 느껴졌다.


 "또 봐."


 그 말만을 남기고, 얀순이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


 공원의 커다란 시계는 오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1월 1일. 할로윈의 끝.

 죽은 자가 되돌아오는 날. 그녀를 잃은 그날부터, 그녀는 영원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