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늘도 가벼운 맥주 한 잔을 걸치며, 그녀의 자리가 없는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네온사인이 닫힌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검은 방 안에 작은 색채를 만들었다.

그녀는 혀를 차고는 냉장고에 다가가 맥주를 한 캔 더 꺼낸다.

한 캔으로는 오늘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몇 캔을 더 쌓아둔다.


167번.


그녀가 지난 2년동안 거둔 실패의 횟수이며, 그녀의 마지막 외출을 1년 전으로 만든 숫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를 실패의 물결을 타고 이 집에 오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자신이 더이상 쓸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녀를 저절로 집 안에 구속했다.


"응, 엄마. 잘 지내고 있지. 걱정하지마. 곧, 취직할 수 있을거야."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하는 거짓말은 이제 익숙해서, 더이상 아무런 마음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부모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그와 동시에, 가장 가리고 싶은 손가락이기도 할 것이다.

가끔씩 오는 언니, 혹은 오빠의 안부전화, 부모님의 자식 걱정 이외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일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정적이 된 방 안에서 그녀는 마치 물을 마시듯 맥주를 들이킨다.

방에 만들어진 캔의 산. 이걸로 정확히 376개가 된 캔은, 문을 막아 왠지 모를 안정감마저 그녀에게 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것을 무너뜨리는 날은 오직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생필품을 배달시켰을때 뿐.


"택배왔습니다."


바로, 오늘이다.


"그냥, 두고 가 주세요."


잠깐의 정적후에, 택배원의 기척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캔을 헤치고 나가, 생필품을 덥썩 잡는다.


"어? 선배? 여기 살고계셨어요?"


옆에 느껴지는 사람의 인기척에 그만 얼어버린 그녀는 1년 만에 익숙한 그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의 목소리를.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후배로, 그는 그녀가 멈춰있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이제는 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그녀의 성적이 분명히 우수한 적도 있었고, 나름 우수한 대학을 들어간 이후로 그에게 과외를 해주면서 서로 연심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젠 옛 말일 뿐이다.

스스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연락을 끊은지도 7개월. 


"선배, 오랜만인데 한 잔 하실래요? 요 앞에 곱창집 맛있던데."


그런 그녀를 보고도 그는 미소를 지어준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그는, 언제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다.


"어? 어.... 밖은 조금..그렇고, 이따 너네 집으로 찾아갈게."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문을 쾅, 닫았다.

분명히 술냄새도 났을 것이다.

집 안이 더러운 것도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 내가 미쳤나봐..."


그녀는 머리를 쥐어싸며 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절해야만 한다. 저런 위험한 요청은, 지금이라도 거절해야만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전화기를 손에 든다.


우우웅.


전화기가 울린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바탕화면에는 후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선배. 다 시켜놨으니까 씻고 1507호로 넘어오세요."


"저, 저기....."


"네? 아, 혹시 선배는 곱창 싫어하세요? 다른거 시킬까요?"


" 아니야. .... 그거 들고, 내 방으로 와."


어째서 거절의 단어가 입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최소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이별의 말이라도 하고자 하였다.

캔은 대충, 최소한의 길만 터주었다.

옷은 그냥, 집에 굴러다니는 후드를 걸쳤다.

집은, 따로 청소하지 않았다.

마침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선배! 저 왔어요. 그나저나... 이 캔들은 다 뭐에요?"


발에 채이는 캔을 밀면서, 그는 태연스레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눈치도 좋게, 맥주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그 옆에 소주 병도 몇개 껴왔다.


"미안. 미처 청소할 시간이 없었어."


"괜찮아요. 제가 갑자기 마시자 한 것이잖아요."


그나마 깨끗한 거실 한 가운데 자리잡고, 그는 갓 만든것 같은 따끈따끈한 곱창 볶음을 접시에 옮겨담았다. 그녀는 컵에 얼음을 담아왔다.

말 없이 쨍, 하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젓가락이 오고가고, 쩝쩝거리는 소리가 방을 조금 메웠다.


" 하... 맛있다... 그나저나 선배, 왜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은거에요?"


"...묻지마."


그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손이 떨리는 걸 간신히 자제하고는, 단호한 거절의 답변과 함께 질문을 맥주에 넣어 삼켜버렸다.


"... 최근엔 어떻게 지냈어요?"


하필, 그걸 그가 묻다니. 그녀는 이번 질문엔 아예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신경질 적으로 맥주를 쑤셔넣는다.


"선배... 괜찮아요?"


한 발자국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한 발자국 물러난다. 


"아니. 괜찮지 않아. 보면 알잖아?"


날카로운 말이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다. 주어담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그저 그가 상처를 받고 가기만을 원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저, 선배 연락 끊겼을 때 막 찾아다녔는데... "


"나 같은 걸 왜 찾아다녀. 그럴 필요 없잖아. 니 일도 바쁠텐데."


이미 저만치 앞서나갔으면서 굳이 뒤쳐져 있는 나를 왜 찾는거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젓가락으로 곱창을 집어들었다.


" 아니, 그때 그... 약속 한 거 있잖아요. 저 회사 합격하면 고백하겠다고 한 거."


털퍽.


그녀는 그만 곱창을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기에, 그딴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 ...뭐, 뭔 소리야, 그거.... "


"그 대답 들으러 왔어요. 저. 사실, 그때 고백하고 싶었는데...."


왜? 어째서? 아직도? 나를? 온갖 의문에 휩쌓이며 그녀는,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 지금 날 보면 알잖아. 그래. 나도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거야. 그래. 기왕 이렇게 된거 지금 말할게. 난 이대로 살다가 술병으로 죽을거야. 그러니까 나 같은 건 잊어."


말을 마치고, 그녀는 맥주에 소주를 섞어 들이켰다.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다.


".... 선배, 진짜 무슨일이에요. 말해봐요."


".... 1년동안 계속 뛰었어. 뛰다가 넘어져도 계속 뛰었어. 근데, 그러다 앞을 봤는데, 다들 저만치 앞서가있더라. 나도 피흘리며 노력했는데, 어느새 난 부모님 돈이나 축내는 백수가 되어있었어.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하는데. 내가, 뭘 잘못한건데..."


그녀는 잔을 꽝, 하고 내려놓았다.

눈물도 한 방울,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를 그는 아연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그저 쓰다듬어주었다.


"... 미안. 추태를 보였네. 어쨋든 나는 글렀어. 너도 내 옆에 있으면 악영향만 받을거야.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


그는 그런 그녀를 보았다.

복잡한 표정은, 이내, 쓴웃음으로 바뀌고,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 참, 그런 기분에 빠지만 자포자기 하게 돼요. 뒤와 앞을 전부 보았을 때, 실패로 얼룩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만 기다리는 것 같으면... "


" ... 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


" 선배. 저 지금까지 작성한 이력서 갯수만 200개가 넘어요. 그 중에 1차의 문턱도 못 넘고 떨어진 것만 100개가 넘고. "


"... 뭐? ..... 어떻게..."


"... 딱히,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실패가 일정 이상 넘어가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게 타르탈로스 같잖아요. 아무리 멀리가도 바깥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그러니까, 막 화가 나더라고요. 다음 번엔 널 넘어버리고 말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버텼죠."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녀는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 그러니까 선배, 저는 아직 선배를 좋아해요. 후회를 한다는 건 미련이 남아있단 거 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 미친듯이 더 달려보는거에요, 그냥.  그러다 지치면, 저한테 와요. 제가 꽈악 안아드릴테니까."


그는,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그 미소를 보고만 있는다.

그는 팔을 벌린다. 그녀는 그 품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미소를 짓고있다. 그녀는 울고있다.

다 울었을땐, 그녀도 웃고 있었다.









168, 169.... 2년 째 멈춰있던 카운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1차 탈락. 2차 탈락. 1차 탈락. 최종 탈락...


"... 누나, 너무 무리 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쉬어도 되는데."


" ...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좀 묘하다? "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에게 안긴다. 그는 그녀를 꽈악 안아준다.





이제 카운트는 셀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는 세는 것을 포기하였다. 실패에 잡혀 있는 마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n번째. 단, n은 167보다 크다.


1차, 합격. 2차, 합격. 최종, 합격.

몇번을 눌러보아도 똑같다.


n+p번째만에, 두 변수의 상관관계는, 산술적 증가.


".. 이거, 실화야?"


"... 실화에요, 누나. 최종합격했다고요!! 누나, 축하해요..."


"... 진짜, 대박...... "


" ...사실, 누나 저보다 한 번 덜 실패했어요. 진짜, 대단하시네요..."


" ... 너 몇 번 실패 했는지 모른다 하지 않았어?"


" 비밀이에요, 그건. "


그녀는 그의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그들은 크게 한 번 웃는다.


그는 갓 튀긴 치킨을 접시에 옮겨담았다. 그녀는 컵에 얼음을 담아왔다.

은은한 불빛 아래, 창 밖의 네온사인이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었다.

잔이 쨍,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가 방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