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C. 요크(Alvin Cullum York)는 1차 대전에 참전한 미 육군 병장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한 사병 중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병사다.


앨빈 요크는 1887년 테네시에서 11명의 형제 중 삼남으로 태어났고,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학교는 9개월밖에 다니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대장장이 일을 했다고 한다.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할 때 앨빈 요크는 개신교 신자라 살인을 거부했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징집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숙부가 가족을 돌봐주기로 하면서 결국 유럽으로 향한다.


유럽에 도착한 앨빈 요크는 상등병으로 82사단 328연대에 배치받는다. 1918년 10월 8일, 독일군의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요크의 분대(총 18명)은 223고지 위의 독일군 기관총기지 점령을 명령받았다. 요크의 분대는 기관총진지를 파괴했으나 바로 반대편 언덕의 MG08이 사격을 개시, 분대장을 포함한 6명이 사망하고 단 7명의 이등병만이 차선임자 요크의 휘하에 남았다.

요크는 파괴한 기관총진지의 포로를 이등병들에게 맡기고, 혼자 기관총 진지를 차괴하기로 마음먹었다. 요크가 자리를 잡았을 때쯤 기관총 사격이 멈추었고, 요크는 자신의 M1917 소총으로 저격을 시작한다.

M1917 엔필드 소총. M1903 스프링필드의 수량이 부족해 급한 대로 영국의 P14를 개조해 준 제식으로 채택한 무기이다(근데 생산량은 스프링필드의 2배를 넘는다).


요크가 소지한 탄약을 거의 다 썼을 때 독일 중대장과 6명의 병력이 요크를 찾으러 돌격해 왔다. 이때 요크는 M1911 권총을 뽑아 독일군과 교전했는데, 앞에 있는 병사부터 쏘면 그 뒤의 병사들이 오히려 멈춰 사격을 가하리라고 판단, 뒤에 있는 병사부터 사격하는 기행을 순간적으로 판단해 해냈다.

참고로 그림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이때 권총사격술은 지금처럼 양손이 아닌 한손으로 쏘는 것이었다.

또 M1911의 탄창용량은 7발, 약실까지 쳐도 8발이니 6명의 독일군을 사살했다는 건 거의 1발당 1명씩 사살했다는, 그것도 그 반동 강한 45구경을 한손으로 쏘면서 그랬다는 것이다.


결국 요크를 잡는 데 실패한 독일군 중대장은 항복 의사를 전달해 요크 혼자 132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 28명의 적군을 사살했고 무려 32정의 MG08 중기관총을 노획했다. 이때 기관총의 위력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강했으니 이 32정의 화력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했을 것이다. 


요크 상병 덕에 328연대는 목표지였던 샤텔셰예리 북쪽 철도를 점령했고, 앨빈 요크 상병은 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미 육군 명예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최고등급 훈장) 등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등의 각종 훈장을 받았고, 1918년 제대할 때까지 무려 50개의 훈장을 받았다. 이는 미 유럽 원정군 사령관 존 퍼싱 원수 다음으로 많은 훈장이다.


앨빈 요크는 제대 후 전쟁영웅으로써 쌓은 재산을 이용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입대를 희망했으나 고령과 비만, 당뇨 등으로 입대를 거부당하는 대신 모병관으로 활동했고, 여러 장성과 참전용사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다 1964년 타계한다.


지금까지도 앨빈 요크를 뛰어넘은 병사는 나오지 않았으며 미 육군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 유명한 어디 머피조차 앨빈 요크보단 못하며 1942년 Sergeant York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미 육군은 이 전설의 이름을 어느 쓰레기에다가 붙여 버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