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워드리스 스쿼드의 지휘관이 되었다

황급히 '사실 내가 지휘관이었고, 작전 중 차질이 있어 귀환일이 조금 늦어졌다'고 답변하자 이해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는 미리 말해달라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밀린 블라블라를 뒤져보자 사장님에게서 온 것 말고도 굉장히 많은 블라블라가 쌓여있었다.


슈엔.

-보고 끝나면 바로 메인터넌스 룸으로 와. 알았어?


....제기랄.


시프티.

-사령부 호출입니다. 15시까지 비무장 상태의 니케를 호위로 두고 부사령관실로 오셔야합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앤버지를 만나게 되는구나.

괜히 목이 답답해져왔다.


-...

-......!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기타등등의 지휘관들.

무시했다. 정기적으로 블라블라가 좀 오갔으면 모르겠는데 마지막 대화가 5년 전인 놈들이 무슨 놈의 도움을 달래?

차단해두었다.


"미하라, 유니."

"응?"

"왜, 지휘관님?"

"휴식 중에 미안한데, 부사령관실으로 가야한대..."


두 쌍의 눈이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정말 쉴 수 없냐고.

오늘은 쉬기로 한 거 아니냐고.


"...미안."

"어쩔 수 없지~"

"우우..."


미하라와 유니는 투덜투덜 하면서도 내 곁에 섰다.

부사령관실로 가려면 방주 중앙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기에, 점심이 좀 넘어서야 일어난 우리는 지금부터 움직이기로 했다.

열차의 객실은 꽤나 좁았다. 4인용 정도 되어보였는데, 미하라와 유니 둘이 앉고 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


"...저기, 지휘관님. 우리 뭘 하러 가는거야...? 유니, 뭔가 잘못했어?"


분홍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익숙하게 들이밀어온다.


"칭찬 받으러 가는거야."

"칭...찬?"

"이번에 우리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내서, 잘했다고 칭찬해주려고 부르는거야."

"정말...? 지휘관님. 유니랑 미하라, 칭찬받아??"

"응. 아마 크레딧도 엄청 받을걸?"

"우와아아!"


잔뜩 들뜬 유니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하라에게 매달렸다.


"미하라! 어떡해? 유니, 지금 너무 행복해!!"

"읏, 아흐으으...읏! 그래, 유니. 나도...하읍!!"


행복에 겨운 유니는 손을 가만두지 못했고, 미하라의 신체 이곳저곳을 마구 누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라의 엄한 소리가 객실을 가득 채웠다.

어, 기차에서 그렇게 해버리면...!


"신음성이 들린다는 신고가 접수되서 왔습니다. 해명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온 승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해야했다. 역을 지날 때마다 객차에서 내리며 흘끗거리는 승객들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으나 유니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래, 행복하면 된 거야...

유니가 간신히 진정할 무렵. 기차는 사령부 역에 도착했다. 유니와 미하라를 니케용 대기실(각종 퍼펙트, 점검 시설 완비)에 데려다준 뒤 나는 부사령관실로 향했다.

부사령관 앤더슨, 이라고 쓰인 문패를 제외하면 너무나 평범해보이는 문. 긴가민가하면서도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음.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부사령관실은 예상대로의 모습이었다. 사치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있어야 할 것들만 있는 실용주의의 결정체와 같은 공간.


"거기 앉게. 다리가 불편할텐데."

"감사합니다."


잽싸게 골골거리는 척을 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앤더슨은 맞은편에 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나는 그제서야 상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서양과 동양을 묘하게 섞어놓은듯한 이목구비에 푸른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은 가르마를 타서 나눠놓았다. 일에 치이는지 기른건지 모를 정도로 자란 턱수염과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흉터에선 관록이 느껴졌다. 그리고 칼각이 잡혀있는 정복, 그 위로 매달려있는 훈장과 약장.

인게임 그대로다. 아, 이 사람은 아군이다 싶은 캐릭터. 명백한 아군이 눈 앞에 있었다. 어깨에 들어가있던 힘이 조금은 풀어졌다.


"부상이 순식간에 나았다지? 앞으로 가능하다면 건강검진은 메어리에게서 받게. 내가 말해놓았으니 자네의 몸 상태를 이해받을 수 있는 선에서 보고할걸세."

"...!"


배신한거냐 시프티!


"너무 시프티를 탓하지 말게. 자네가 겪었던 교전과 그 탓에 입은 부상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있는게 아니지. 최소한의 인물에게 협조를 받지 못하면 결국 들킬거라 예상하고있지 않았나?"

"그렇, 습니다."

"날 믿으라고 하진 않겠네. 그래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앤더슨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런 얘기는 이쯤 하고... 타일런트급 랩쳐를 토벌했다고. 그것도 블랙 스미스를 말이야."


-띠리리리리!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스쿼드로 타일런트급 토벌이라. 교전기록도 자세하지 않고."


-띠리리리리!!


"....후우. 받아보게. 자네 전활세."


내 전화라니...? 무슨 말인가 싶어 발신인을 보자 '슈엔'이라는 이름이 찍혀있었다. 순간,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화기를 받아드는 것 뿐이었다.


-대충 보고는 끝났지? 그럼 이제 와~


열불을 치솟게 하는 목소리가 부사령관실을 울렸다. 전화기는 스피커폰 모드로 되어있었다.


"죄송하지만, 보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

-오라면 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애초에~ 미실리스의 지원을 받아서 들어간 지휘관들은 소집 우선권이 미실리스에 있거든?


그런... 규정이 있다고? 앤더슨을 바라보자 기대와 다르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가 봐줘서! 응? 좀 쉬라고 보내준거야. 그쯤 되면 충분히 쉬었을테니까, 이제 와. 두 시간 준다?


두 시간. 지금 당장 출발해야 간신히 맞출 수 있겠네. 하.

가슴에 벼려둔 칼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검보라색,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펄럭이며 내동댕이치던 그녀들의 머리가 눈 앞에 번뜩였다가 환각처럼 휙 사라졌다. 나는 아직은 떨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머리를 그려보았다.


-....


전화는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앤더슨이 말했다.


"가보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나도 마침 곧 회의가 있어서 말일세."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 가기 전에 이것, 가져가게. 프로토콜 스쿼드에서 새로 개발한 물건일세."


앤더슨은 고글이 씌워진 헬멧을 내게 내밀었다. 모 애니에서 보던 물건과 많이 닮아있었다.


"이게 뭡니까?"


혹시나 싶어 묻자 역시나 싶은 답이 돌아왔다.


"전장 상황을 미리 볼 수 있는 가상현실 기기라네. 시뮬레이션 룸의 기술을 응용했다고 하던데... 베타 테스터를 맡아줄 수 있겠나? 사례는 크레딧으로 한다더군."

"좋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간단한 인사 후, 니케 대기실로 가 유니와 미하라를 찾았다. 둘은 수많은 양산형 니케들 가운데서 마치 팬미팅을 하듯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그래서그래서?"

"어딜 쐈나요? 혹시 특기할만한 약점 같은게 있습니까?"

"타일런트급 토벌하면 크레딧은 얼마 정도 나와요??"

"배틀데이터랑 코어 더스트는요!?"

"지휘관님이 잘해줍니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한 스쿼드가 타일런트급을..."


미하라는 미소지은 얼굴 그대로 입을 닫고 있었고, 유니는 신이나서 이것저것 말해주다가 위험한 부분에선 '유니는 잘 몰라!'라며 말을 돌리며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둘 다 기뻐보이네.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크레딧, 배틀데이터, 코어 더스트... 그것들에 관해선 생각이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들.

우선은 슈엔과 만나는 것부터다.


"미하라! 유니!"


손을 흔들며 부르자 둘 다 금새 나를 알아보곤 양산형 니케로 이루어진 인파를 헤쳐나왔다. 질문의 파도가 방향을 틀어 이쪽을 바라보지만, 시간이 없다! 둘의 손을 잡고 바로 바깥으로 뛰었다.


"지휘관님! 왜, 뛰는거야?"

"슈엔이, 오래, 최대한, 빨리."

"으, 으읏, 힝!"


유니는 뛰면서도 울상을 지었고, 미하라는 생각이 많아보였다. 나도 고민스럽다. 어떻게 숨겨야할까. 기차에 타면서도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슈엔은 어떻게 나올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나.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머리속에서 굴려보니 그래도 아예 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도 슈엔이 협상이라는 단어를 고려한다는 가정 하에 있을 수 있는 시나리오들이었지만.


"슈엔이 이렇게 나와버리면..."

"지휘관. 그럴 때는 이렇게..."


미하라와의 대화도 큰 도움이 되었다. 메티스만큼은 아니어도 평소에 슈엔을 보좌하던 미하라다. 당연히 슈엔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알고있었고, 상당한 수의 시나리오가 튀어나왔다.

유니? 유니는 자고 있었다. 기차 의자에 누워있길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내 손을 붙들고 그대로 잠들었다. 크나큰 관심을 신나게 즐긴 탓이겠지. 굳이 깨우지 않았다. 유니는 미하라가 잘 컨트롤하기로 했으니까.

사안이 사안인만큼 준비는 철저해야했다.

시나리오는 계속해서 튀어나왔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미실리스 바로 앞이었다.


"가자."

"그래, 지휘관."

"으응...?"


문이 열리고, 익숙한 썅년이 보였다.


"어, 왔어?"


썅년이 말했다.


"이제부터 깡통들 말고, 제대로 된 팀이랑 일해."

"그 깡통들은 따로 해야되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우리 애들이 너~무 졸라대서 붙여주는거니까 착각하지 말고. 알았어?"

"메티스! 들어와."


슈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쪽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메티스를 볼 수 있었다.

라플라스, 드레이크, 맥스웰. 니케에서 보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히어로오오오!!! 인사!!! 반갑다!! 앞으로 버드보이라고 부르겠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훗훗훗, 최강의 빌런인 이몸과 싸우는걸 영광으로 알아라!! 아님 말고..."

"오오... 베이비가 그 타일런트급 랩쳐를 잡은 지휘관이야? 알아볼게 많아보이네~"


하나같이 아름답다. 그리고 화려하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얼마나 고도의 기술력이 들어갔는지, 얼마나 강한 화력을 가졌는지 알 것만 같다. 주인공들.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이들.

저들의 손을 잡는다면 아마 나 또한 주인공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지. 크레딧 걱정 없이,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이 그냥 지시만 내리면 끝날 터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세계관에서 메티스는 그만큼 강력한 스쿼드니까. 미실리스라는 거대 기업의 CEO인 슈엔이 집착할만큼, 집착하고있는만큼 그녀들은 강하다.

당황한 나머지 벙쪄버린 척 지금 상황을 분석하고 있자니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미하라의 떨리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이런 시나리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슈엔이 메티스를 내게 붙인다니?


"야. 왜 말이 없어~ 설마, 싫다는건 아니지? 아, 너무 감격해서 그래? 그래그래~ 그럴만도 하지. 아, 블랙 스미스를 잡았을 때 전투기록은 깡통들한테서 빼낼테니까 굳이 보고서 작성할 필요는 없어."


순간, 미하라의 눈동자가 떨림을 멈추고 잔잔히 가라앉았다. 손을 단단히 잡고있던 온기가 미끄러져 나갔다. 미하라와 유니는 서로를 의지한채 나를 바라보았다. 기회를 잡으라고. 미실리스를 대표하는 스쿼드. 메티스의 지휘관이 되라고.

그 능력이라면 빚을 갚고 메티스의 진정한 지휘관이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저는..."


나와 미하라, 유니는 알고있다.

메티스는 워드리스보다 뛰어난 스쿼드다.

김니붕의 능력은 판타지에 가까울만큼 터무니없다.

슈엔은 '우리'의 목줄을 쥐고있다.

어느쪽을 택하는 것이 옳은가.


"저는 워드리스 스쿼드의 지휘관입니다."

"...뭐?"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중 그녀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슈엔이 말한 워드리스 스쿼드가 '따로 해야 할 일'. 즉, 토커티브 추적. 그리고 워드리스 스쿼드의 미래.

주인공이 없으므로 누구와 지상에 나가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르지만 이 시기 다른 지휘관들의 능력이란 몇 개월 간의 경험 상 바닥을 기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폐급을 만나 침식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말을 하는 랩쳐, 토커티브를 찾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너,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토커티브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뭐? 진짜야??"

"하지만 언제 이동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손을 맞춰놓은 스쿼드가 아니라면 당장 지상에 나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어야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왕 앞에 라스푸틴이 나타났다.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내가 가진 정보의 출처가 튀어나올 리가 없다.

따라서,  슈엔은 이렇게 말한다.


"좋아. 대신 실패하면... 알지?"

"알고있습니다."


나를 향하고 있던 메티스의 시선에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다. 모멸감, 당황, 짜증.

워낙 유쾌하고 코믹하게 묘사되던 메티스라 그런가 어둡고 질척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부정적인 흥미에 가깝다고 할까. 그러나, 미움을 산 것은 분명했다.

특히,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드레이크와 달리 라플라스는 조금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뿌렸다.

슈엔은 내게 가슴을 검지 손가락으로 쿡, 쿡 찔렀다.


"너. 최대한 빨리 지상으로 올라가서 토커티브 찾아내. 알았어?"

"알겠습니다."

"저런 거한테 우리 메티스를 붙여주려 했다니, 내가 미쳤었네 아주. 얘들아, 가자. 넌 니 깡통들 데리고 빨리 나가기나 해!"

"타일런트급 랩쳐와의 교전이 담기 배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거 비싼거 알지? 평범한 지원이라곤 할 수 없으니까 빚으로 달아둘게."

"..."

"니 집에 보내놨어. 됐냐?"

"알겠습니다."

"이제 꺼져."


메티스가 슈엔을 따라 나간 이후, 우리도 왔던 길로 미실리스를 나왔다. 그리고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지휘관... 읏."

"지휘관님... 햣!"


아무것도 묻지 말아줬음 했다. 그래서 단칸방에 모두가 발을 딛자마자 양 팔을 벌려 그녀들을 가득 안았다. 손이, 몸이 덜덜 떨렸다.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우습게 나왔을 뿐, 슈엔은 방주에서 손꼽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힘도, 권력도, 돈도, 야망도 있는 미친년 앞에서 어쩌면 능력보다 들켜선 안될 카드를 써버리고 말았다.

곳곳에 있을 미친년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 신장이 털릴지, 미하라와 유니를 잃을지 모른다. 타일런트급 랩쳐를 토벌한 신성 지휘관? 그런건 3대 기업 CEO 앞에서 하루살이에 불과하니까.

미친년을 상대하려면 미친짓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하라와 유니는 질문하는 대신 나를 이해해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은채 피로에 쩔은 몸을 뉘였다.

...

눈을 뜨자 밤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배틀 데이터가 들어있을 서류 가방이 보였다.

조심스레 팔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가방에서 필요한 배틀 데이터를 꺼낸 뒤, ....가상 현실 기기를 들고 이 단칸방의 유일한 밀실인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상 현실 기기를 머리에 뒤집어쓰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초원과 비현실적으로 푸른 하늘, 랩쳐 하나 없는 평화로운 지상. 바람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하나하나 전부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그러나 손 끝에 닿는 기기의 감촉이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기기를 더듬거려보자 배틀 데이터를 꽃을 수 있는 구멍이 만져졌다. 본래라면 지휘관용 지형 데이터나 전술 기동 교보재 따위를 담은 저장소를 사용하겠지만...

손에 들린 건 그렇게 말랑한 것이 아니었다.

수차례를 고민하고 손을 떨면서도 결국 배틀 데이터를 기기에 꽃았다.

나는 지옥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