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좁은 고을의 옹졸한 학동 하나가 걸음을 바삐 놀려 시간을 값없이 빼앗게 되었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눈 앞의 소년은 그리 말하고는 거듭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그 앞섬 여미고 나아가는 것은 부드럽되 스며드는 것은 말이라, 


기실 큰 기대 걸지 않았던 그로서는 아카데미에 보내둔 아들놈 벗 하나 마주하는 자리가 갑자기 불편해진 것이다.


"그래, 네 얘기는 익히 들었다. 먼 동방에서 자랐다지?"


"물산이 곤궁하여 그 술기(術技)도 보잘것없으나, 다만 성현들의 높은 말씀이 오래 전해져 오는 곳입니다."


분명 편지로 전해오기는 나오는 말이 가볍지 않다 들었으되, 이것은 숫제 수염만 없는 노인네가 아닌가.


백작은 답답한 속내에 뭐라 대꾸해줄 말이 없으니 다만 아랫턱이나 긁어대었다.


"퍽 오래 걸렸던데, 오면서 본 풍경은 어떠하더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보습 대는 농가의 아비들은 비루먹고 때 탄 나무쟁기에 혼 빠진 신색(身色)이라 가엾기 그지없었습니다."


당황한 백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라? 농노들이 무어가 어째?"


그럼에도 학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하는 것이다.


"그저 한촌(閑村)의 이야기가 아니라 천하의 형국이 물에 빠진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필시 이리떼가 되겠지요."


"아니, 임마... 야!"


뒤늦게 수습하러 나선 장남이 어깨를 흔들어도 그저 조용히 대답 기다리니 백작이 보기에도 제법 현기가 있어보였다.


"더 말해보거라."


"다만 물에 빠진 사람은 손을 내어 구할 수 있으나, 천하는 오로지 도(道) 로만 구원할 수 있는 법입니다.(맹자, 이루 상 離壘·上)"


갑자기 이 무슨 선문답인가 싶어 백작은 다시 되물었다.


"우리 영지가 이렇게 부유하고, 사병들도 강건하며, 나라가 안정된 지 오래인데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냐?"


학동은 천천히 차로 입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허나 그것은 이웃과 마주할 손에 칼을 쥐고서 빼앗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쌓아올린 재보는 한갖 두엄더미보다 못합니다.


정녕 백작님께서 그것이 옳은 길이라 여기신다면, 차라리 나라에 그러할 힘이 없는 편이 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창칼 쥐고서 빼앗은 부는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오, 남는 것은 사람이 아닌 금수만이 떠도는 피냄새 자욱한 세상 뿐이겠지요."

(순자, 의병議兵)


하고는 다시 합죽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쨍 하는 것이 있어 백작은 다급히 되물었다.


"그럼 네가 궁구(窮究)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이냐? 문제를 알고 있으니 필시 답도 가지고 있을 테지."


기다렸다는 듯 학동이 다시 말했다.


"사람은 작게 가정을 이루고, 그것이 모여 마을이 됩니다. 이것을 묶어 다스리는 것이 왕이니, 치세에 있어 일가붙이를 키우듯


그 성정(性情)은 온화하게 갖추되 잘못은 필히 꾸짖고, 어진 단서를 깨우치게 하며 외적을 경계하는 병비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백작은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지 않느냐!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비난했던 것이냐?"


"사람에게 있어 성(性)이란 품에 있되 알지 못하는 물건입니다. 개흙에서 옥을 파내고 밝게 빛내는 것이 군왕의 책(責)이지요.


백작님께서 광에 지닌 재보를 풀어 아랫것들 갖추기를 여상(如常)하지 않게 꾸리되, 그 높은 덕을 흠향하며 빛낸다면


어찌 그 아름다운 모습을 숭앙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이지 않겠습니까? 아, 이것은 마치 아비를 데리고 도망하는 순임금과 같으니


천하를 사들일 금덩이 산이라 할지라도 헌 신짝처럼 버린다면(棄如敝屣 기여폐사) 어찌 그 밝은 이름이 퍼지지 않겠나이까?"

(맹자, 진심상 盡心上)


하고는 잠시 목을 축였다.


"또한 아성(亞聖, 맹자)께서 이르기를 성(聖)이면서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경지를 이르러 신(神)이라 하였습니다.

(聖而不可知之之謂神)


백작님께서 저 억조창생의 생구(生口)들마저 제 몸처럼 귀이 여긴다면 유랑하며 걸식하는 자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그들로 하여금 저 광활한 박토를 개간하게 하시며 학식 있는 자는 높게 쓰심이 나라 전체에 퍼질 것이니,


이는 가장 헐한 것을 버려서 세상에 둘도 없을 귀물을 사들이는 셈법이라. 그들이 웃전이 아닌 생신을 우러르게 하소서."


마치 혼 빠진 사람처럼 핼쓱해진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가 해보지도 않고서 그것을 어찌 아느냐!"


그럼에도 학동은 미동조차 없이 답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감히 말씀 올리건대 백작님께서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不爲也, 非不能也)."

(맹자, 양혜왕·하)


벼락을 맞은 듯 백작의 몸이 크게 떨렸다.


"내 너를 전하께 데려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