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먹구림 하나 없이 완전히 걷힌 하늘이 인상적이었던 날.


그 날, 나는 근 1년 만에 스승님의 묘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온 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가주님."



화분 하나 없는 삭막한 집무실에 울려 퍼지는 고아하고 청아한 목소리.


여린 음색은 분명 소녀의 나잇대에 맞는 것이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흡사 사교계에서 이름 좀 날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소녀의 동작. 


가슴팍에 모여있던 고운 손은 살포시 내려와 보드라운 치맛단을 슬며시 잡아 올린다.


무릎과 상체가 숙여짐과 동시에 졀묘한 속도로 사르륵, 자취를 감춰버리는 구두의 발꿈치.


물 흐르듯이 이어진 동작은 마치 한 폭의 그림, 예법의 교본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눈 앞의 소녀의 출신이 평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민인 그녀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시녀의 직책을 달고 후작저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단번에 파악되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새로이 소가주님을 보필하게 된 시녀, '루시' 라고 합니다."



자신을 '루시' 라고 소개한 소녀는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에 내 옷에 커피를 쏟은 시종의 잘못이 전부 용서가 되는 백점짜리 미소였다.


'...망할 아버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키고,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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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 시녀.


좋은 울림이다. 하긴 후작가의 소가주 씩이나 되는 사람이 시녀 하나 없이 업무는 보는건 드문 일이긴 하지.


근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기, 소가주님?"



망할 아버지.


-'오늘 너에게 새로운 전속 시녀가 배정될거다. 이따가 집무실로 가보도록 하거라.'

-'예? 전속 시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아버지! 잠시만요! 아버지!'


밑도 끝도 없는 통보에 이런 반전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집무실에서 나오는 횟수가 손에 꼽는다.


시녀를 하루종일 집무실에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스스로 감당 못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은것도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제 시간마다 식사를 가져오는 시종 한 명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한게 고작 열흘 전이건만, 갑자기 전속 시녀가 배정된다고 하면 기당키나 하겠다.



"하아···."

"도, 도련님...?"



전부터 식사 들오고던 집사 한 명 있지 않은가.


분명 이름이 찰스였나.



"으으... 저기, 주인니임....."



전쟁이 끝난지 벌써 4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길거리에서 우리 스승님과 같은 금빛 머리의 여인을보면 흠칫흠칫 놀라곤 한다.


아마도 트라우마 비슷한게 아닐까. 상식적으로 죽은 스승님이 관을 뚫고 살아 돌아올리가 없으니.


여기 새로 생긴 내 시녀를 봐도 그렇다.


검은색의 내 머리랑은 대비되는 옅은 색감의 금발, 차분한 느낌을 주는 자색 눈동자까지.


게다가 왼쪽 눈 아래 눈물점까지 있다.


마치...



"루크레치아 기사단장?"

"켁! 콜록 콜록! 녜, 네엣?!"

"아, 별건 아니고. 그냥 그 분과 닮았다 싶어서."

"루크레치아 다, 단장님...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셀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붙어다니다 시피 했었지."

"하, 하하... 그러시군요..."



존재만으로 주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전속 시녀라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피식 새어나갔다.


그래, 마치 죽은 스승님의 외형적 특징이란 특징은 죄다 빼다박은 모습이다 '루시' 라는 소녀는.



"루시?"

"...예, 에. 도려, 아니, 크흠! 네, 소가주님."



너무 빤히 쳐다보기만 했나.


루시는 마치 죄지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몸을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푹 쉬도록 해."

"...네."

"내일부터 할 일은 아리아나 시녀장을 찾아가면 그녀가 알려줄거야. 이해 안되는게 있다면 나를 찾아오도록."

네 존재가 그리 내키진 않다만, 앞으로 잘 부탁하지."

"모,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축객령을 내리자 루시는 군말 없이 '펴, 편히 쉬시길' 라는 말을 남기고 집무실을 나갔다.


아무리 귀족같다고는 하나 평민 소녀를 가만히 새워두기만 했으니,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걸 보며 너무 심했나, 하고 걱정이 들긴 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 부담스럽고 긴장할 만한 일이 얼마나 많을텐데, 가벼운 동정심 따위 가져봤자 의미도 없을것이다.


이런 마음을 품고서 내일부터 상냥하게, 허울없이 대해버리면 아버지가 나에게 시녀를 배정한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마음 먹는다고 그렇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리 내키지 않는 존재.


딱 이정도가 적당하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했지.'



이미 세상을 떠난 황실 기사단의 전 단장 '루크레치아' 와 후작가의 평민 시녀 '루시' 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