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이 그렇게 뜨겁게 뛰었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8살. 우연한 기회로 영국에 사는 친척을 따라가 보았던 잉글랜드 FA컵 결승. 전 유럽에 손을 꼽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의 경기장과 좌석을 빼곡히 매운 구단의 열렬한 팬들. 그리고 세계 유수의 선수들이 벌이는 가슴 벅차는 경기. 



그것은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었던 어린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경기가 끝나고,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채 서로의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선수들.


나는 패배 팀 게이트 근처에 앉아 그들의 표정을 조금이나마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격양된 상대 팀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들을 보이는 패배 팀 선수들. 그 중에는 울거나 화를 내는 선수도 있었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선수도 있었다.




아직도 경기의 여파로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공허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 선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경기 내내 필드의 중원에서 팀을 조율하고, 패배를 맞았음에도 경기 전과 표정의 변화가 없던 그 선수.


눈에 띄는 색의 완장을 찬 그 선수는 흩어진 팀원들을 불러모아 무리의 가운데에서 무어라 크게 외쳤다.


영어로 이루어져 있는 문장의 뜻을 어린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누구든지 느낄 수 있는 강한 결의와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패배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그러나 의지를 꺾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동경으로, 동경은 열망으로 옮겨갔다.




어릴 적에 유난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체육 시간에도 앉아 있는 시간이 서 있는 시간보다 많았던 나에게, 그의 굳센 모습은 거대한 자극이 되었다.






그 날부터 다리가 쉬었던 날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부모님께 졸라 동네의 작은 축구교실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아 몸싸움에서도 밀리고 다리도 자주 꼬였지만, 축구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언젠가는 그 스타디움에, 관객이 아닌 선수로써 그 선수처럼 당당히 뛰고 싶다는 마음이 내 몸을 쉬지 않게 했다.




재능은 꽃 피우는 것이라고 했던가, 슛도 제대로 차지 못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축구교실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전속 축구부를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하는 것을 제안했고, 나 또한 흔쾌히 동의했다. 그 후로는 실력이 멈추지 않고 성장했다. 유소년 국가대표의 주전을 놓치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 어느새 나는 국가적으로 주목받는 유망주 미드필더가 되었다.




쏜살같이 지나간 10년. 모 국내 축구 팀의 20세 이하 팀에서 뛰던 나에게 어느 날 뜻 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20세 이하 월드컵에서의 내 활약을 본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한 클럽이 나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10년 간 쉼 없이 달려온 끝에 얻어낸 유럽, 그것도 유망주들의 요람인 네덜란드로의 진출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2군에서의 경쟁을 뚫어 주전 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나의 꿈인 빅리그 입성도 머지 않아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은 나를 쉽게 받아주지 못했다.



유럽 곳곳에서 있던 인종차별 이슈 후 몇 리그들은 그에 대한 풍조가 바뀌었지만, 네덜란드는 아직이었다.


나를 비하하는 발언보다도 더 힘든 것은 나에 대한 취급이었다. 2군 선수단 내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나는 동료들과 코치진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1군 주전 미드필더의 부상으로 연패의 수렁에 빠졌을 때도 클럽은 의도적으로 전술을 바꾸어 센터백을 하나 더 차출해 투입했다. 물론 패배를 면치 못했다.


프론트 측에도 수 차례 항의해봤지만, 그들은 방출 선수의 주급 문제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기록상 존재하지만 없는 선수가 되었다.



소득 없는 1년이 지나갔다. 팀을 떠날 것이었다면 진작 행동했어야 했지만, 속으로 묻어두는 성격 때문에 시간만 버리고 말았다.


이적 시즌이 되고 스쿼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어느 클럽이 그렇듯 내 클럽도 해외 투어 일정을 꾸렸다. 나는 구색 맞추기 용으로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적 시장을 통해 새로 들어온 선수 중에는 수 년 전 이 클럽에서 뛰었던 선수도 있었다. 빅클럽에서 주전을 꿰차다 자유 이적으로 풀렸는데, 고향팀이 침체된 것을 보고 클럽에 역제안을 했다고 한다.

한때 내가 동경하던 선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투어가 끝나고 클럽은 우리에게 일주일 간의 휴식기간을 주었다. 휴양지에서 경기를 가졌으므로 우리는 곧바로 휴가를 보냈다.

다른 선수들은 떼를 지어 유흥가를 휩쓸고 다녔지만, 나는 호텔과 트레이닝 센터에만 상주했다. 친한 동료도 없었을 뿐더러 어떻게든 클럽에 내 노력을 보이고 싶었다.


호텔가 앞 해변을 걷다가 뜻밖의 연락이 왔다. 복귀한 그 선수였다. 트레이닝 때 전화번호를 받은 것도 심상치 않았는데, 놀지도 않으려는 선수에게 갑자기 연락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불안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희망이 생겨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수 분도 되지 않아 꺼졌다. 그는 술에 진탕 취한 목소리로 그의 차를 몰아 호텔까지 데려다 주라는 부탁같지도 않은 부탁을 했다.

처음 듣고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대리기사가 아니고 선수다. 아시아인이라 운전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정말 그런거라면 해괴한 고정관념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하고자 했다. 하지만 내 입지를 생각하니 망설여졌다. 그는 트레이닝에서부터 선수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미 감독의 큰 신임을 받아 주장까지 넘겨받았으며, 어쩌면 팀 위에 군림하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사건만 없었다면 나도 그를 딱히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좆같았지만, 나는 차마 그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를 거부한다면 이 곳에서의 내 실날같은 입지도 잡을 수 없을 터였다.

이곳은 애초부터 더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아예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휴식기에 한국에서 아버지께 잠깐 배우기는 했지만, 면허를 딸 실력은 되지 않았다.

거리를 보니 언덕 하나를 넘어 2블럭정도 떨어져 있었다. 방향전환과 엑셀브레이크, 기어 두는 법만 알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그렇게 람보르기니의 가속력을 무시한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굽은 언덕길에서 속력을 줄이지 못해 차선 이탈. 도로 화단을 들이받은 차는 옆으로 굴러 전복했고, 나는 그대로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





사경을 해매다 정신을 차려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에어백이 제대로 펴지지 않은 까닭에 상체 전반에 충격이 전해져 치명상을 입었다.

교수 4명이 15시간동안 붙어 어떻게든 내 생명은 살려내었다. 하지만 그들도 망가진 내 척추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19살의 여름에, 나는 하체마비 판정을 받았다.



뒷좌석에 퍼질러있던 그 선수도 부상을 입었지만, 재활 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내가 손을 더 쓸수 있는건 없었다. 내 가족이 새벽녘에 한반도에서 날아왔을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있었다.

머나먼 타국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나의 부상은 불의의 사고로 포장되었다.

전말이 밝혀지고 그는 주급 삭감이라는, 죄목에 비해 터무니없이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선수생활을 지속할 방도가 없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후의 가족의 분위기는 너무나 침울했다.




억울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했다. 10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온 인생. 홀로 달리는 길에도 꿈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이 꺾인 뒤의 삶은 너무나 공허했다.

상실감과 무력감에 짓눌린 나는 방구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에게 변변한 위로를 건네는 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몇 날 며칠동안 울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몸. 삶의 공허함을 채울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라도 알아야겠다 싶어 불편한 몸을 이끌어 동생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키고 검색엔진에 들어가자마자 스포츠뉴스를 봐버렸다. 속이 울렁거려 황급히 브라우저를 껐다. 아무래도 며칠간은 웹서핑이 힘들 것 같았다.



무료히 바탕화면 곳곳을 클릭하다 낯선 아이콘에 커서가 닿았다. '넥서스 오브 레전드'. 게임을 즐겨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친구들이 대회를 보러가자며 꼬셨던 기억이 났다. 동생도 종종 하던 게임이었다.

대회도 있을 정도면 꽤나 인기가 있을 터였다. 궁금증이 생겨 조금 더 알아보았다.


AOS라는 다소 낯선 장르의 게임이었다. 5대5로 팀을 이루어 캐릭터를 움직이고, 적과 싸우며 기지를 공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였다.

마땅히 할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 내 계정을 만들고 게임을 실행해보았다.


PC게임을 많이 해보지 않았기에 조작에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게임에 재미를 붙일 순 있었다. 초반엔 별 생각 없이 들이박다 죽기 일쑤였지만, 나름 요령을 익혀가니 할만해졌다.


그 날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했다. 발로 하던걸 손으로 한다는 감각으로 하니 축구를 하던 때와 비슷한 재미를 느꼈다. 부모님도 나를 건드리지 않으셨고, 기숙학교에 다니는 동생도 내가 컴퓨터를 쓰는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레벨이 충분히 오르자 랭크게임이 열렸다. 예로부터 넥서스를 하던 주변인들이 했던 '랭겜은 질병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넥서스는 재미있었지만 나는 눈에 불을 키면서까지 게임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궁금해 배치고사만 보고자 했다.



그런데,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또다른 재능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배치고사 전승. 순식간에 준프로 구간까지 온 나는 연승을 이어갔고, 연습생들과 현역 프로게이머들을 간간히 만나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프로씬에 대해 잘 몰랐기에 리그를 챙겨보는 동생에게 종종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동생의 입은 놀랄만큼 벌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랭킹에 내 닉네임이 박혀있었다. 랭크 도중 만난 프로팀 코치를 자칭하는 자들의 제의 메세지도 받았다. 그들은 나의 피지컬과 시야, 팀 조정 능력를 높게 평했다.

처음에는 전부 거절했다. 나는 선수라는 호칭을 다시 받을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내 꿈은 어느새부터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두 발로 뛰지 못해도, 다시 한번 경기장에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고 싶었다. 

넥서스는 전 세계적으로 리그가 형성된 게임이라고 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 때 그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룰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또 한번의 기적이 필요했다. 내 삶에서 기적은 총 3번 일어났다. 축구 재능을 발견했을 때. 큰 사고를 당하고도 하반신만 잃고 살아났을 때. 그리고 게임 재능을 발견했을 때.

이젠 한 번 쯤 더 일어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을 터였다.




나는 게임 메세지 창을 헤집어 코치들에게서 온 제의를 골라낸 후에, 동생과 상의를 했다. 동생은 그 중에서 네임밸류 있는 3개의 팀을 추려내었다.

여기서부터의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팀에게 철저히 속은 경험이 있던 나는 최대한 내부적인 구설수가 없는 팀을 원했다.

그렇게 2개의 팀이 걸러지고 마지막으로 한 팀이 남았다. '인게이지 게이밍.' 창단된지는 얼마 되지 않은 신생팀으로, 국제 대회 진출 경력은 없지만 지난 시즌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이력이 있는 팀이었다. 현 시즌에는 주전 멤버의 대거 이탈 이후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잠재력만은 인정받아,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팀이었다.

충분히 주전경쟁도 가능한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팀 코치가 남긴 연락처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코치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2군에 공석이 생겨 테스트가 가능하다고 전해주었다. 테스트 장소와 일정을 전달받고 연락을 끊었다.


네덜란드로 떠날 때만큼의 기대감을 또 한 번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입단 테스트 날이 되었다. 동생이 끄는 휠체어에, 그리고 나의 미동없는 하반신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중에는 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런 관심을 원한건 아니었는데.



테스트에 앞서 테스트를 진행할 팀을 나누는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마땅한 포지션을 골라두고 게임을 하지 않았다. 그냥 큐가 빨리 잡히는 포지션을 했을 뿐, 고정된 포지션을 지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팀은 그런 나를 배려해 잠시 테스트에서 빼 주었다. 포지션이 정해진 다른 대상자들끼리 먼저 경기를 시키고, 기량이 저조한 선수를 뺀 뒤 나를 넣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게 나는 코치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았다. 두 팀의 경기는 비등비등하게 흘러가는 듯 싶었으나, 마무리를 해줄 원거리 딜러의 기량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다. 매 싸움을 패퇴하는 팀이 생겼고, 결국 상대 팀의 맥빠지는 승리로 끝났다.

해당 선수를 뺀 뒤 코치들은 나에게 참가 의사를 물어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과 콤비를 이루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다소 긴장했다. 하지만 그 긴장은 게임 5분만에 사라졌다.

근처에 있던 팀원을 믿고 과감한 무빙을 하던 상대 원거리 딜러를 팀원과의 콤보로 잡아내고, 백업을 온 상대 팀원도 잡아내어 게임을 터뜨렸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내가 들어온 게임은 전 판과 팀원 하나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팀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대 팀을 압살하는 경기가 되었다.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던 코치들도 나의 플레이에 신뢰를 가진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팀의 2군선수로, 미드필더가 아닌 원거리 딜러로 자리잡게 되었다. 휴양지에서의 사고 이후로 채 2년이 되지 않는 시간, 나는 내 힘으로 또 한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군이 되기 위해선 또 한번의 기적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기적은 4번 있었다. 축구 재능을 발견했을 때 한 번. 사고를 당하고 살아났을 때 두 번. 게임 재능을 발견했을 때 세 번. 그리고 팀에 입단한 지금 네 번.

잃은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가진 것도 많은 인생이었다. 여기서 기적이 한 번 더 일어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을 터였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적이 일어나면 된다. 그렇다면 그토록 원하던 정상에 설 수 있다. 나는 수 없이 꿈꿔왔고, 절망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꿈을 이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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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잡고 소설너낌으로 길게 써보는건 처음이라 좀 많이 별로일거임 예쁘게봐주셈

늒비는 칭찬이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