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피폐, 집착. 애초에 너, 여지를 너무 많이 준다고 생각하는거 아냐?"

"뭐..?"

"됐어. 너 같은 사람. 예전부터 내가 뭔가에 대해 물어도 이유가 뭔지 알려주지 않고. 사귀자고 말해도 어물쩍 넘어가고 다음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심지어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조차 제대로 말해줄 생각이 없으면서 계속 '용서'받을 여지를 줘."

"....."

"그것뿐이야? 나 뿐만이 아니야. 소꿉친구 학교친구 선생님 스승 동생 암살자 사제 마족 성녀 용사 악마. 너 미쳤어? 도대체 어디까지 하렘을 차릴 작정이야? 딱 한명만 고르던가. 아니면 대놓고 다 같이 사귀자는 미친 말이라도 해보던가! 왜 아무말도 안해? 왜 조금만 더 하면 자기랑 사귈 수 있다는 양 '여지'를 주는거야?'

"그건.."

"아 그래. 그치들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뭐 다른 이유가 있다. 확정지어서 상처받고 싶지는 않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다. 모두가 소중하다. ..그 따위 말을 하려는거면 집어치워. 그게 기만이고, 상처 주는 행위야. 차라리 전부 다 끊던가 전부 다 맺던가 하나만 하던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쟤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고 치고 박고. 너는 또 중간에서 실실 쪼개면서 말리고. 그게 진짜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거야 말로 희망 고문이야."

"하지만-"

"이제 지쳤어. 더이상 네 동정에 기대거나 죄책감을 이용해서 연인인척, 친구인척 하지 않을게. 네 말대로 나는, 천하의 개썅년이잖아?"

"자, 잠깐-"

"안녕. 다신 보지 말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창문을 넘어 뛰어내렸다.

내가 뛰어내린 곳은 자그마치 13층 높이였으나, 그 마력인지 뭔지를 활용하니 하나도 다치지 않고 타닥, 내려갈 수 있었다.

안전하게 생전 처음보는 다른 사람의 집 지붕에 사뿐하게 안착한 내가 잠깐 위를 올려다보자, 나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나는 녀석에게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엿을 날려주고는 후다닥 튀었다.

저녀석을 오래 본다고 좋은일이 생길리는 절대, 절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삼십육계출행량을 치고 있던 내 옆으로 파이어볼에 라이트닝볼트를 감싼 형태의 기둥이 솟아났다.

"저 미친년이!"
"으힉! 이런 미친 시발!"

이거 죽었다. 무조건 맞았으면 죽었다고!

여기 오면서 자연스레 깨우친 마나를 느끼는 방법인지 뭔지가 아니었으면 방금 무조건 죽었다.

옆으로 굴러서 피했지만, 오히려 이때를 기회로 엄폐물이 많은 지붕 아래로 슬쩍 내려간 내가 아까 마법을 사용하며 발산된 마나가 향하는 곳을 슬쩍 쳐다보자, 웬 붉은 머리의 여성이 이쪽을 보고 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아까 그 남자가 그런 여자를 말리고 있었고.

그에 나는 그런 여자의 눈을 딱 마주보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엿 먹 어 라 썅 년 아 ?"

상대쪽이 내 입모양을 읽을 수 있는만큼 나 또한 상대의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기에 내 눈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내 입모양을 읽으며 그렇게 말하는게 다 보였다.

멍청하긴. 나는 이번엔 아예 양손으로 엿을 먹였고, 그에 이제는 아예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소녀를 남자가 겨우겨우 틀어막고 있었다.

하. 속이 다 시원하네.

나는 골목길을 빠르게 벗어나며 도시의 바깥으로 뛰었다.

마법사는 위험하다. 최소한 도시 하나쯤의 거리는 두고 있는게 안전하다고 볼 수 있지.

아 그래서 아까 그건 무슨 말이냐고?

이걸 알기위해선 약 다섯시간 전, 내가 밥을 먹고 있던때로 돌아가야한다.

***

내가 눈팅하듯 프롤로그 + 1화쯤만 보고 안봤던 후피집 소설 '세상이 내게 집착한다.'

줄여서 '세상집'

나는 그 세계에 주인공을 사랑하던 여도적 1로 빙의했다.

빙의한 직후는 당황스러웠으나 곧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지금 이 곳이 어느 소설 속인지 알 수 있었다.

그야..

'논란일자) 드래곤의 아내라 불리던 김시우 실종에 황녀가 직접 찾아나서겠다 선언.'

'논란일자) 마왕을 물리치고 여생을 즐기고 있다고 알려졌던 용사가 사실 김시우라는 사람을 쫓고있다고 전해져..'

이딴 기사가 대서특필이랍시고 버젓히 돌아다니는 세계가 '세상집'말고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세상에거 내가 '세상집'에 빙의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생각은 간단했다.

"일단, 주인공에게서 멀어진다."

주인공. 사실 말이 주인공이지 쌍놈도 이런 개쌍놈이 따로 없었다.

소꿉친구 학교친구 선생님 스승 동생 암살자 사제 마족 성녀 용사 악마.

주인공의 히로인중 그나마 현재도 분량이 있는 히로인들만을 나열한거다.

트로피 취급 받는 히로인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지.

그런 주인공인거다.

게다가 후피집.

붙어있으면 불행해졌으면 불행해졌지 절대 좋아질리는 없었다.

그래서 계획했다.

기왕 갈거면 거하게 엿 한번 먹이고 가자고.

우선, 주인공 주변에 딱 붙어있는 얀데레 히로인을 먼저 설득했다.

"야. 내가 김시우 1분만 만나게 해주면 앞으로 그 근처에는 얼씬도 안할게."
"말투가 싸가지-"
"마나에 맹세해."
"흠.. 1분 정도면 뭐.."

다른 히로인들도 많았으나, 지금 주인공은 그런 히로인들에게서 멀어져 후피집을 찍고있다는 설정.

알아서 떨어져 있어주니 설득할 사람이 없어 이쪽이 편했다.

그렇게 독대한 주인공.

말은 술술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거의 4시간동안 이 녀석 앞에서 할 말을 생각해오기도 했고 평소에 후피집을 보면서도 할말이 많았으니 말이다.

저 녀석이 얼타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속이 뻥~

물론 그 대가로 속 뿐만 아니라 내 가슴이 물리적으로 뻥 뚫릴뻔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제 작별이다.

그래도 주인공 히로인이었답시고 겨우 도적1 취급을 받던 이 몸도 꽤나 강했으니 앞으로 먹고사는데엔 지장이 없을 터.

근데 왜..

"나를 찾아온건데?"

"미안해.."

이런 시발.

후피집은 사절이라고 쌍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