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세상은 지금 위기에 빠져있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 *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무언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생각치도 못했던 무언가로 인해 내 계획이, 노력이, 성과가.. 송두리채 부정당하는 것같은 느낌.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나는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럴리가 없다. 내 눈앞의 여인이 누구였는지 정녕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비록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은 두번있지않을 현실이나, 내 눈앞의 여인은 수십, 수백번, 가히 백이면 백.. 그 모든 세계를 멸망시켜왔던 그 주범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다시 되뇌었다. 그러니 이 장난같지도 않은 고백편지 하나 따위로 눈앞의 저년을 믿어버릴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한차례 개운해졌다.


안개낀 것만 같았던 머릿속이 마치 솔x눈을 마신 것마냥 상쾌해지는 감각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수십번을 느껴왔음에도 내게 엄청난 만족감을 부여해주었다.



띠링—!


[당신은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잠시 기다리니 머지않아 떠오르는 상태창. 


그 변함없이 반투명하게 빛나는 상태창이 떠오름으로서 나는. 


내가 지금 걷는 길만이 올바르다는 것을 가슴깊히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변함없이 옳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할것 같나."



목표를 다시한번 짚으니, 눈앞의 찢어죽일 년이 하는 말 조차도 그리 분노치않고 받아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렇게 분노했던 것인지도 잘 모르겠을 정도다.



 저년은 마왕보다 더 독한년이며, 세상을 멸망에 빠뜨리기위해 저년이 행했던 더러운 일은 내 입을 통해 말하기조차 힘든 것들이다. 


그런 년이 나를 좋아할리가 없지. 


거의 100% 나를 이용하려는 개수작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년은 지금 나를 필요한 도구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일 텐데..'


그럼 나는 그것을 그저 이용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한마디를 입밖으로 내밷었다.



"근데, 너 내 취향 아니야."


"아..."



상처받은 듯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넘어 세계를 멸망시킬 녀석이라 그런건지, 슬퍼하는 연기조차 한치의 어색함 없이 부드러웠다.



그런 역겨운 표정 짓지 마.



어차피 네년은 결국 또 이 세계를 없애버릴 거잖냐. 나를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주제에.



이 이야기는 순애물따위가 아니야. 네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수백편의 치정극을 써내려가도 탈이 없을 테지만, 내가 만들어갈 이야기에 네가 설 자리는 존재치도, 필요치도 않아.



그리 생각하니 눈앞 여자의 행태는 한없이 역겹게만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


그리 말하며, 나는 눈앞에서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녀석을 뒤로하고 내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기숙사에 들어갈떄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 * *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 세계를 부디 구해달라며, 나를 불러온 신이 내게 부여했던 축전을, 수많은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난 더할나위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나는 그 최흉의 빌런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비단 아카데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벤트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냈다.


비록 와중에 여러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죽었으나.. 이 모든 것이 신의 뜻.. 아니 세계를 구하기 위함이리.



"..이렇게까지 해서 네게 무엇이 남는 것이냐."



그 빌런이 그리 내게 물었을 때도.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남겠지."



라 답했고.



"네 노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인 것이냐..  아니 애초에 무엇을 위했던 것이냐.."



그 빌런이 그리 물었을때도 덤덤히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고있는 상황이니.



"..해피엔딩 이겠지. 아마.."



..잠시만.


..아마라고?


아니. 내가 방금 뭐라 말한거지?


기억이..


채 수초도 되지않는 시간도 전에 입밖으로 내밷은 말이었으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가 상쾌해지는 듯함 감각이 몸을 감싸올랐다.



띠링—!


[당신은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깨끗해지기는 커녕, 되려 머리가 아파왔다. 무언가 머릿 속에 안게가 깔린듯이 답답했고, 숨이 가파라졌다.


온몸을 긴장시키는 기이한 기시감.


'..기시감?'


 나의 몸은 이러한 감각을 언젠가 느껴본 적 있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그래.. 마치 눈앞의 저년이 수작부릴 때와 같은..?


수작..? 아니, 그건 다른 녀석이 했던 일이잖..



띠링—!


[당신은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모르겠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자네, 괜찮은건가? 안색이.."



고개를 숙여 나를 쳐다보고 있는 빌런. 무엇때문인건지, 나는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스릉—


대신, 칼을 빼내어 그녀에게 겨누었다.


내 정신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 흔들리는 검의 끝부분. 


이 세계에 온지 수백, 수천번을 휘둘러왔고, 처음으로 생명을 벨때 느꼈던 그 떨림조차 노력끝에 떨쳐냈다고 생각했지만, 칼끝은 그 여느때보다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아니, 네년.. 내게 무슨짓을 한거냐."


"난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대가 보고있지 않았던가."


"..네가 무슨짓을 했는지 내가..으웁"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무언가 수면아래에 있던 것이 수면위로 올라오는 듯한 감각. 구토감이 몰려왔다.


띠링—!


[당신은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휴식을 해야될 것 같ㅇ—"


내게 한발자국 다가오는 그녀.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닥쳐..!! ㄴ,네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내가 이럴리가 없잖아..!!"



흔들리는 검. 아직 그녀를 해할 때가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미 내 팔로는.. 나의 정신상태로는 제어가 되질 않았다.


위협을 위해 꺼내들기만 했던 검이었으나, 결국 그녀에게 향해버린 검.



스륵—


"아."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손에 무언가 베인듯한 감각에 나는 눈을 위로 올려 그녀를 쳐다봤고.


그곳엔 피가 흐르고있었다.


그녀의 피부에.


혹자는 창백하다고 말할정도로 새하얀 그 볼에.


붉은 기스가 나있었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붉은 피. 꽤나 깊숙히 베인 듯해 보였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아무런 내색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어라?"


"..아프군."



덤덤하다는 듯이 그리말하는 그녀. 


그러는 중에도 내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갔다.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생각들, 하지만 결국 입밖으로 내밷어진 말은 너무나 허망한 말이었다.



"왜.. 왜 피하지 않은거야.. 너라면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을텐데.."



대련에서 지고는 비겁하게 복수하는 삼류악당이나 할법한 말. 


허나, 그러는 중에도 아직,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무얼 보고있는 조차 난 알 수 없다."


'..무슨 소리야. 난 지금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데.'


되려 이쪽에서 그녀가 하는말이 이해가 안됐다.



"적어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것보다야 훨씬 아팠을테지, 하지만 나는 그것의 편린조차 느끼질 못한다."



'..더할나위없이 이야기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인데, 누가 아파한다는거야.'



나를 괴롭게 하는건 너밖에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그녀는 한발자국 더 내게 다가왔다.



 볼의 상처가 더 깊어졌고, 검신을 따라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대가 나를 어째서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취향이 아니라했으니 그런 것이겠지."


"..다가오지마."


"무엇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인지,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봤던 것인지. 아무것도 난 알지 못한다."


"..다가오지마라고.."



그 순간.


그녀의 볼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두갈래가 되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묽은, 살짝 투명한 빛을 띄는 피. 검신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피.

 


"하지만, 하나정도는 알고있다. 나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걸. 그대가 내게 보여주었던 호의를.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는걸."



..무슨 소리야..



나는 너에게 아무런 호의조차 베푼적이..



띠링—!


[당신은 의지로 가득찼습니다.]



간간히 울리던 상태창의 알림음. 그녀의 입이 닫힘과 동시에 그 알림음이 울리는 주기가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알림움이 울린 그때.


간신히 지지하고 있던 검의 손잡이가.


나의 손에서 떨어져버렸다.




* * *




"..결국 이렇게 되는걸까요?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다는걸 저는 알고있었는데도, 한번 겪기도 했었을텐데 왜 그랬던걸까요?"



띠링—!



"단순히 귀찮았던 걸까요? 아니 그보다, 당신도 문제라고요~ 신이 원만하게 처리했다고 특혜까지 줘가면서, 공지사항을 내놓으면 받아들이는 법이 있어야지.. 깐깐하게스리."



눈을 뜨자 보였떤 풍경은.



수도에서 보았던 성당의 내부와 상당히 비슷해보였다.


내가 이 세계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곳이자, 신이 내게 목표를 부여했던 그 성당과 말이다.



"여기는..?"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눈앞의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고 그와 동시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인이 나를 이세계로 불렀던 그 여신이 맞다는 것을.



"..여신님?"


"오, 아직은 계약의 효력이 남아있는 것인가요? 으음.. 그래도 기다리기 귀찮으니 암시는 풀도록할게요?"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는 여신.


다음 순간. 



내 머릿속을 울리던 알림음이 한번에 사라져버렸고, 그와 함께 머리를 옥죄던 두통 또한 사라져버렸다.



"..역시 여신님은 제 상태가 왜이리 불안정..한...지....? 어..라..?"


"오.. 상당히 안정적인데다.. 굉장히 빠르네요! 확실히 경험자라 다른걸까요? 이번이 두번째.. 아니 세번째였나? "


세계를 다시 시작했던것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게 느껴졌다. 숨이 가빠졌다.



내 몸에 잔존하는 축전중 하나인 [사고 가속]이 현재 상황을 재빠르게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축전을 부여했던 여신의 앞이라 그런건지 축전은 그 여느떄보다 빛을 발했고. 


나는 그리 길지않은 시간 후에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이제 끝난건가요? 어때요. 기억은 다 온전하던가요?"


"아하하..하하.."


그렇게.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상황판단을 마친 순간 내가 행한 행동은 실성이었다. 



이제야 뭔가 알 것만 같았기에,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건지 확실히 알았기에.



"..우웁..우웨엑."



거기까지 이해를 마치자, 구토감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것을 참지 않았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고, 없애버리고 싶었다.



"우웨엑..으흐윽.."


토사물이 입에서 흘러내려도 구역질을 멈추지 않았다.


"에헤엑..크흡.. 흐하핳..하하하하하아..웨엑..으힣..으에겍—"



"..쿨럭 크흡..흐흐.."



내가 지금까지 눈앞의 여신을 위해 무엇을 해왔던 건인가. 세계의 보존을 보장받고 그녀에게 퍼다나른 수많은 것들은 무엇을 위해서였던건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만들었으나, 내 정신은 그 여느때보다 뚜렷했다.



먼저 눈앞의 여신에게서 활로를 찾아낸다..



그 생각을 품고 일어섰으나, 다음 순간 내 신체는 허망하게 제압되어버렸다.



"신도님. 바보에요? 제가 당신의 생각을 모를리가 없잖아요?"



여신이 그리 말하자 갑자기 아까부터 들리지 않던 알림음이 뚜렷하게 귀에 박혀들어왔다.



띠링—!



[계약의 신의 주관 아래에 결행되었던 계약은 지금 이 순간 효력을 잃었다. 파기의 원인은 을(이계인)에게 있다고 판단, 계약에 의거해 을(이계인)에게 부여되었던 권능은 이 순간부로 다시 갑(여신)에게로 복귀된다. 그에 대한 리스크는 모두 을(이계인)이 지불한다.]



그 알림음과 동시에 움직이지 않던 신체의 제약이 풀려버렸고, 대신에 거대한 무력감이 온몸을 감싸올랐다.


'..뭐 이딴, 미친 부당계약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품으며 말을 건네는 여신.



"부당계약이라니 말이 좀 심하시네요. 계약의 신의 주관 아래라고 명시되어있잖아요?"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이겨내 고개를 들어 여신을 쳐다봤다. 


"..그럼 이게 부당한게 아니라고?"



그래, 이제 기억났다. 그녀가 내게 내걸었던 계약사항들이 이제서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분명 그때 확인했을때는 이상한 사안이 없었을텐데.



"당연히 없었겠죠! 이건 정당한 계약이었으니까요!"


"..그게 뭔 말도안되는."


"상호의 이해가 따랐던 계약이었어요. 당신이 재밌게 플레이했던 세계를 구할 기회를 전 그대에게 준 것이고, 그대는 그 기회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 대가로 당신은 지금 여러 특전을 지니고, 당신이 좋아하던 세계를 뛰놀고 있잖아요? 아, 지금은 아닌가?"


"..뭐라고?"


"음, 음, 그저 서로간의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던거죠."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사건의 행렬에 의문점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계약의 쓸모는 없어진 것 같네요. 계약에 명시해놨잖아요? 당신이 저에게 반감을 가진 순간 효력은 무산된다고.. 그러니 특전은 모두 가져가겠어요."


"그런건 없었.."


"아뇨? 있었어요. 을이 갑에게 위협이 될만한 행동이나 표현을 하는 순간 갑에 의해 계약은 파기될 수 있다고요. 우덜식이면 뭐 어쩌겠나요. 갑은 저인걸. "


여신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 누구도 신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요. 저의 잘못은 단지 그대들, 피조물들의 우둔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죠."


"..그게 언제까지 통할 것 같냐?"


"..후훗. 이제와서 뭔갈 바로잡아 보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너무 늦었다는 말을 해두고 싶네요. 당신은 이제 그저 평범한 인간이에요. 너무나 약한 인간이죠. 부디 허튼짓은 하지 않으시길 빌며.. 저는 이만 가볼게요. 딱.한 신.도.님."



그와함께 나의 몸에 존재하던 기이한 힘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눈앞의 여신또한 머지않아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무것도 남지않은 빈 공간을 허망하게 쳐다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대여.."


옆을 돌아보니 나를 쳐다보고있는 빌런이.. 아니 이젠 아닌가.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기있는거야? 아니.. 이젠 딱히 아무래도 상관없는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을 쳐다봤다. 붉은 그녀의 눈동자로는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애시당초 너도 만들어진 악역이었던거였구나.. 너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여신과의 첫 만남때.. 세계의 규칙을 위협하기에, 배제함이 마땅해야한다고 했었나.. 말이 안나오는군. 


정작 여신이란 작자는 세계를 만들어놓고는 방치하고, 배제하며, 아름다운.. 자신의 성에 맞는 새로운 세계만을 편애하는데 말이야.


모든게 다 떠올라버리니, 반대로 너무나 허전했다.


"..나는 괜찮다. 애초에 자네가 아니었음. 이미 난 이자리에 존재하지도 않았을테니."


그녀는 예전부터 도대체 내게 뭘 받았길래 계속 이런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왜 빌런, 아니 엘노아는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너에게 해준 것이 없는데, 왜 너는 나를 이리 신용하는거야."


그리 말하자 고개를 휘휘 젓는 엘노아. 무언갈 말하려는 듯 보였다.


"..아직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런 것이다. 자네 딴엔 나도 이유없이 그대를 믿는 것처럼 보일테니 그리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주변의 풍경은 어느새 아카데미의 그 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대는 어느순간이나 나를 믿었다. 힘들땐 지탱도 해주었지, 애초에 여신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그대가 없었다면 나는 결실을 맺지도 못했을것이다."



모든 것이 기억이 났고, 암시도 풀렸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내가 이 세계에 온 뒤로 엘노아에게 선의를 베푼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설마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은 것인가?'


그 떄 아까 여신이 입밖으로 내밷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오.. 벌써 기억이 돌아오는 건가요? 굉장히 빠르네요! 확실히 경험자라 다른걸까요?] 라는 말이.


경험자..?


"..이번이 첫번째가 아니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살짝 올라가는 엘노아의 입꼬리.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다. 일단은 나도 여신과 만족스러운 계약을 끝낸 상태이니 말이지."


"..아하하..하.."



나는 나를 바라보는 엘노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마치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때 처럼.



"그러면 너는.. 아직도 날 사랑하는거냐?"


"그렇다면 어찌할것이지."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흐음..?"


"확실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 너와는 달리 나는 아직 너를 믿을 이유가 없거든."


사실, 이유야 차고넘치게 많았다. 내가행한 좆



나는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볼의 상처부근을 매만졌다. 그러자 살짝찡그리는 그녀.



"그러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걸지도."



놀란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



"긍정이라.. 흐음.. 혹여 그건.. 나에게 청혼하는 것인가?"


"흐.. 비약이 심하네."





나는 그녀에게 상상하지 못할정도로 큰 우를 범했다. 비록 내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들 그녀가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처는 사라지는게 아니겠지.



그러니 이번엔 내가 그녀를 믿을 차례였다.



그리고나선.



신을 죽인다. 나를, 그녀를, 이 세계를 기만했던 그 신을.



신들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나같은 녀석을 자신의 세계로 쉽게 빠뜨리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필시 대단한 존재들이겠지. 



그에비해 나는 피래미에 불과할 것이고.



허나,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건 당시엔 이걸 해결해 냈다는거잖아?



..게다가 애시당초 만들어낸 이야기를 버려버리는 신따윈..



그 누구도 필요로하지 않으니까




* * *


흔한 복수물 프롤로그에요 오해하지 마시길.



제목이 어디선가 본것같다면 그것은 당신의 착각일거에요! 아닌가? 아님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