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생사의 기로를 넘기며

우여곡절 끝에 마왕을 무찌르는데 성공한 용사와 짐꾼.


이제 집에 돌아갈 일만 남은 짐꾼은

앞으로 펼쳐질 장미빛 미래를 머리 속으로 그렸다.


툭하면 주먹부터 나가는 폭력녀도 없고


훈련이란 이름의 고문을 강요하는 수련광도 없고


풀 한 포기 안 자라는 불모지에서 샐러드 달라고

땡깡부리는 크레이지싸이코비건엘프도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은퇴를 꿈꾸며 왕도로 귀환한 짐꾼은

왕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용사가 자네를 달라고 했네."


"……예?"


금은보화도 권력도 대수림도 필요 없으니

저 허름한 짐꾼과 함께 살게 해 달란다.


도대체 왜?


그 부족할 거 하나 없는 용사가

왜 짐꾼 따위랑 엮이려는 건데?


짐꾼은 황당한 얼굴로 왕을 올려봤지만,

왕 또한 짐꾼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인인들 용사의 속을 어찌 알겠나?

둘이서 험난한 여정을 헤쳐나가다 보면

정이 들 수도 있는 거겠지."


왕은 어차피 남의 일이라고 껄껄 웃어댔다.


"그렇다 해도 그 왈가닥이 사랑이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아무튼 젊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잘 해보게."


왕은 용사한테 줄 돈이 굳어서 기분이 좋았는지

체통없이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짐꾼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런 게 일국의 국왕이라니, 세상 말세네요."


짐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아무리 구국의 업적에 공헌한 짐꾼이라 해도

왕이 듣는 앞에서 그런 폭언을 했다간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낭군님?"


"용사님."


그런 막말을 어전에서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건

마왕이나 용사 정도 되는 규격 외의 강자 뿐,

그나마도 마왕은 용사의 검에 이미 목덜미가 잘렸다. 


짐꾼은 당황섞인 목소리로 용사를 캐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글쎄요. 아마 낭군님이 저의 식사 권유를

이상한 핑계를 대며 뿌리쳤을 때부터일걸요."


맛있는 채식 식당을 예약해뒀는데 말이죠, 쩝.


용사는 짐꾼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갈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절 미행하실 것 까지야……"


"그도 그럴게, 낭군님."


용사는 방금 전 정중한 어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대번 태도를 뒤집으며 짐꾼의 양 어깨를 쥐어잡았다.


"도망치려고 했잖아."


마치 행주를 쥐어짜듯

잔뜩 힘이 들어간 용사의 손톱이

짐꾼의 살갗을 파고든다.


"자, 잠깐. 아파! 아프다고요!"


용사는 짐꾼의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놓았다.


얼마나 세게 찍었는지

용사의 손톱 밑에 짐꾼의 피와 살점이 묻어나온다.


"실수했네요. 사근사근한 거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혼잣말을 읊조리는 용사를 보며 짐꾼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