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늦은 기상시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듯 창문을 너머 무수히 비춰오는 정오의 일모는 그의 눈을 푹푹 찔러댔다.


여름 내음이 났다.

이 방에서도, 이 방의 밖에서도. 또 이 집의 밖에서도 계절은 여름 내음을 만발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태 전 나비, 그 번데기 속의 혼합물처럼 그는 흐느적거리며 방안을 배회했다.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 유통기한이 닳아가는 음식을 닥치는대로 입에 넣었고, 그때마다 그의 혀는 반사적으로 통각의 신호를 보내왔다.

전일의 어느 격정, 그 흔적일지 모르는 작은 통증에 그는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혀가 마구 소리지르는 소리였다.


적막한 유월의 어느 하루, 그 일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잠잠한 하루 속에서 마구 소리지르던 혀는 이내 입을 꾹 닫았다.

격정을 숨기려는 셈이 분명했다.

사내는 아랫니에 혀를 대고 연신 윗니로 찍어눌렀다.


응보로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격정의 내음을 풍기는 통증은 이미 혀 위에 없었다.

입에서 흐른 피가 온갖 밟힌듯 구겨진 백색의 와이셔츠 위로 흘러내렸다.

분전하며 퍼져나가는 피, 아니 피인지 침인지 혹은 그 사이의 어느 어중간함인지 모를 그 액체는

타오르는 여름의 햇살보다도 뜨겁게ㅡ 식어가는 남자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자는 이 무위하고 또 무의식적인 잠잠함 속에서 그 피의 손을 느꼈다.

붉게 타오르다 검게 굳어가는 그 자국 위로 다시 햇살이 비추었다.

그러나 이내 사람인지 미물인지 모를 어느 육생의 그림자에 다시 퇴색하였다.

발걸음은 곧 지나갔고, 또 수십의 발걸음이 찾아왔다.

그의 와이셔츠는 수초만에 수십번을 물들었다 빠지기를 반복했고, 이마저도 지루해지기는 금방이었다.


곧 젖은 와이셔츠를 풀고 식탁 옆 작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작고 저렴한 의자의 등받이 속 정돈되지 않은 나뭇결이 등을 타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사라질 무감한 자극의 행차였다.

그는 그 성욕인지, 식욕인지, 혹은 더러운 물욕인지 모를 전일의 격정을 생각하면서,

또 그 저렴한 의자의 나뭇결을 입으로 쏟아내며 독백했다.


그럼에도 격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발은ㅡ녹기라도 한듯 쩍쩍 달라붙는 그 고무 장판의 작위 속에서 춤을 추며 박자를 부르면서ㅡ

이 바닥 위에 멈춰있었다.


이내 피가 온전히 굳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상 속에서 격렬하게, 또 무언가 터져나오듯이 내장을 개워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세상의 점호를 알리는, 오전ㅡ오후를 가르는 정오의 뉴스가 마구 떠들어댔고,

아무 일도 없었다.

어제의 격정도 없었고, 정말로 없었다.


굳은 피를 가슴 위에 얹어둔 남자의 눈에는 정적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정적 위로 요란한 여름의 빛이 새어들어왔다.

푸르고 또 푸르어라ㅡ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그런 일도 없었다.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하듯, 눈꺼풀은 마구 무거워졌고 남자는 이에 응했다.

굳게 닫힌 늙은 눈ㅡ 그 살에 여름의 햇빛이 다시 비추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 하는 그 증오스런 여름의 햇빛.

저 해는 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를 셈이냐.



여름 내음이나 난다.

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