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반갑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파라과이의 대통령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줄여서 닥터 마리토라고 불러라!


우리나라라고 무슨 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를 생각하고 들어온건 아니겠지?

몸뚱아리는 느그나라 대한민국에 있어도 우리들의 정신은 파라과이에 있다. 하! 파라과이 

까라면 까야하는 곳이지 이제부터 파라과이의 건국 초기의 인종 문제에 대해서 소개해주겠다.




들어가기에 앞서 원주민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파라과이 원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에 오기 이전에 먼저 파라과이에 살고 있던 민족을 일컫는다. 파라과이에는 많은 부족들이

있지만 하나의 민족 집단이 파라과이라는 국가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위대한 전사들의 후예인 "과라니족"들이지

과라니족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그들의 문화와 민족성을 흡수하는 것으로

파라과이 뿐만 아니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지

파라과이와 그 인근에는 과라니족 이외의 부족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족들이 과라니족과

유사한 정체성, 문화, 신화와 토속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적인 부분에서도 흡사하기에

다른 부족의 언어는 사투리의 개념과 비슷하게 서로 다소의 어려움이 있지만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과라니족이 파라과이 뿐만 아니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도 거주한다면 과라니족 집단이 

곧 파라과이 대표 부족이 될 수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파라과이는 다른 중남미 국가와는 

차별되는 과라니족과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파라과이에 있는 예수회 예배당의 유적-


파라과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부터 외부 세력으로 부터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레두시온"이라는 보호 구역을 세웠다. 레두시온은 그들에게 음식과 편의 시설을 제공해주었으며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했으나 과라니족의 전통을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다. 물론 시대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톨릭 특유의 보수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일이 있기야 했으나 다른 중남미 국가 선교사들,

엄밀히 따지자면 선교사를 가장한 제국주의자들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였지. 반면에 파라과이는 국가

건국자 부터가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파라과이의 국가관 형성과 파라과이 원주민들의 존립을 설명하려면 그를 빼놓을 수는 없지

사실한 이번 칼럼은 그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파라과이의 건국자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줄여서 닥터 프란시아는

스스로를 엘 수프레모(El supremo/권위자)라고 부를 것을 강요하면서 파라과이를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비밀 경찰을 조직해 국민들을 일거수투족 감시했으며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가상적국으로 지목된 국가의 간첩을 진실의 방(Camara de la verdad)이라는 수용소에 수감시켰는데

간첩들은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사실대로 불 수 밖에 없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는 처형을 끔찍히 

싫어해서 죄질이 정말 심한 경우에만 처형을 집행했다. 왜냐면 귀중한 노동력이기 때문에 강제 노동에

동원시키는 쪽이 신생 국가의 토대를 쌓는데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프란시아 박사

퇴임 이후에는 "과거 파라과이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의 20%는 감옥에서 나온다"라는 말도 나온적 있었다.


당시 감옥 노역자들은 오렌지 나무를 재배하는 일을 도맡아 했는데 죄질의 심한 경우에는 오렌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렌지 따러 갔다"는 프란시아 박사 퇴임 이후 파라과이 국민들에게

정부에게 밉보여서 행방불명된다는 뜻의 관용구로 통했다.




-프란시아의 공포 정치를 풍자한 소설인 "나, 권위자(Yo el supremo)"의 표지-


그는 권위적이였으나 사치와 향락을 끔찍히 싫어하여 생활복 두벌과 관저에서 입을 정장 두벌을

번갈아 입는게 고작이였으며 옷, 책, 가구를 제외하면 사유 재산이라곤 담배 케이스와 과자 상자 뿐이였다.

그가 처형을 꺼린 이유도 총알이 아까워서였고 교수형을 처할 때에도 그 밧줄이 썩을 때 까지 재활용했다.


그는 자신이 암살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는 궁전의 문을 스스로 잠그고, 오로지 유일하게

의심 없이 대하던 여동생이 재배하고 말아준 시가만을 피웠으며, 베개 아래에 권총을 깔아 놓고 잠을 청했다. 

국민들이 6피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으며, 그가 행진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있어야만 했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암살을 막기 위한 피해의식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다. 또한 암살자가 숨지 

못하도록 정원의 나무와 덤불을 모조리 뿌리 뽑았기 때문에 그의 집은 매우 허전했다.


또한 타국의 학자들과도 악연이 있는데 진화론자 찰스 다윈과 지리학자 훔볼트의 친구였던 프랑스 식물학자

에메 봉플랑은 예르바 마떼(마떼 차의 원료)를 연구하다가 오렌지와 함께 파라과이의 경제를 책임지던 예르바 마테의

종자를 타국으로 유출하려는 불순분자로 오해를 받아 진실의 방에 감금되었는데 간신히 오해가 풀리고 몇달 동안 그의

주치의 노릇을 하는 것을 전제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에메 봉플랑은 석방 이후에도 이 때의 억울함을 가시지 않았으며 그의 친구인 다윈과 훔볼트 역시도 그를 비판하며

그의 정권이 전복되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정치에 관여하길 싫어하는 생물학자, 지리학자가 이럴 정도면 굉장히 분노한 것)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의 평론가 토머스 칼라일까지 그를 비판하게 되었는데 그는 고립된 외교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러한 

외부 세력의 평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다른 이에 의해서 예르바 마떼의 종자는 아르헨티나로 유출되었으며 예르바 마떼는 아르헨티나의 토양에서

더 잘 자라나는 탓에 아르헨티나가 마떼 차 1위 수출국이 되었고 파라과이의 마떼 차 수출에 있어 2인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파라과이 원주민 재단에서 발행한 어린이용 역사 교육 비디오의 표지

여기서 프란시아는 위의 풍자 소설과는 달리 매우 소탈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 반대로 프란시아는 원주민들에게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는 스페인 이주자 출신의 백인에게 같은 백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과라니족을 포함한

원주민들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는 스페인 이주자 출신이 농경지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였으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과라니족으로 정의하는 혼혈들의 증가로 원주민들의

입지가 커지는 현상을 낳게 된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원주민 보호 구역인 레두시온 설치를 명한 것도 프란시아인데 

그는 신학을 전공했으나 선교사들에 대한 상당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선교사들은

미개한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고 백인들의 문화를 주입시켜 문명화시키는 선봉으로 식민주의가 지배하던

중남미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과 장 자크 루소의

계몽 철학 등에서 영감을 받아 부와 권력의 집중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던 프란시아는 파라과이에 지어진 모든

교회와 성당을 사유화하고 선교사들에게 과세를 물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티칸에도 들어가 세속지도자가 종교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행태를 눈감아 줄 수 없다며 비오 7세 교황은

그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프란시아는 오히려 교황을 비웃으며 "당신이 파라과이에 온다면 사유화된 성당에서

세금을 내며 미사를 드려야 할거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종교적 권위의 몰락은 원주민들의 권리에도 상당한 신장을 가져왔는데 당대 선교사들은 포교를 명분으로 

원주민의 문화를 훼손하고 토속신앙을 이단으로 지목해 철저하게 탄압했고 이에 따르지 않은 원주민들은 죽음이나

추방으로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라과이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서 선교사들의 횡포에서 자유로웠다.

반복했다시피 파라과이의 선교사들은 되려 강압적이지 않은 자발적 개종과 의식주 제공을 통해 원주민과 접촉했다.





프란시아는 성적으로 개방적인 인물이기도 했는데 신학 대학교 출신임에도 금욕적인 신학관에 기반한 성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내가 아닌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지키지 못한 도덕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시말해 성적인 일탈에 관대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의 장녀 "우발다 가르시아 데 카네테"가 매춘부가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정적들에게 큰 비난을 받자 "창녀는 사실 훌륭한 직업"이라고 말하면서 국가의 모든 창녀들은 금색의 머리띠를

착용하도록 명했다.


이러한 성적 개방성이 우회적으로 원주민 권리에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선교사들이 보기에 발가벗고 다니고, 남아와 여아가 

동침을 하며, 심지어 어느 부족은 모계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성적인 타락이였으며 그 때문에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는

열대 기후에 맞춰 발가벗은 원주민에게 서양식 복식을 억지로 입히다가 더위로 열병을 앓는 이도 있었으며, 이러한 기독교적

성관념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학대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권리를 빼앗긴

선교사들은 국가 지도자가 창녀가 좋은 직업이라고 주장하는 탓에 함부로 그들이 성적으로 타락했다고 힐난하지 못했다.


이렇듯 프란시아는 원주민이 가진 존엄성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지만 파라과이 건국 이전에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침략 당한

과거가 있는 원주민들은 백인인 그를 믿지 못했으며 같은 백인에게 비정하게 대하는 프란시아는 필시 다른 부족들에게도 그럴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특히나 신학 전공이지만 천문학에 큰 관심이 있어 원주민 구역 근처에 있는 산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면서 어려운 천문학 용어를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이것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원주민이 보기에도 마법 주문 처럼 들렸고

그가 별을 보면서 미래를 예지하는 사악한 주술사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끝내는 그를 자신들의 신화에서 큰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멸하는 말세의 화신인 "카라이 과즈"라는 악마적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카라이 과즈는 그들의 언어로 "위대한 강의 군주"라는 뜻이였고 강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터전이지만 폭우로

강이 범람하면 큰 재앙이 되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시아가 먼저 우호적으로 그들과 접촉하자 이러한 두려움을 깨지게 되었으며 원주민들은 같은 백인들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준 프란시아에게 존경을 표했다. 더욱이 카라이 과즈라는 표현은 더 이상 모욕이나 두려움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별명이 되었으며 프란시아가 스스로를 카라이 과즈라고 칭할 때도 있었다.


느그나라로 예시를 들면 백인 의사가 한반도에 와서 온갖 의심을 다 받으면서 양귀(洋鬼/서양 귀신)이라고 모욕을 받는데

오히려 그 백인이 많은 사람을 치료해줘서 양귀라는 욕설이 갑자기 그 백인을 높이는 칭찬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러한 원주민 보호 정책은 백인들에게 있어서도 본의 아니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프란시아의 사망 이후 집권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즈"는 내륙 국가인 파라과이의 

항구 도시 확보를 둘러싼 "삼국 동맹 전쟁"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국과 

동시에 전쟁을 벌여야해서 압도적인 물량 차이를 겪어야만 했는데 레두시온의 원주민들은

예수회가 베풀었던 온정을 잊지 못해서 자발적으로 파라과이 군대에 징집되어서 전장에 나섰다.


창과 활에 익숙한 원주민 전사들이 머스킷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 전력차를 조금이라도 

메우는 데에는 보탬이 되었다. 전쟁 이후에는 많은 남성들이 전쟁으로 사망해 백인의 성비는 여자 9 : 남자 1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수준의 격차가 생겼으나 이를 백인 여성과 원주민 남성의 혼인을 장려하는 식으로 성비의

격차를 메웠다. 만약에 파라과이가 원주민들을 존중하지 않았더라면 파라과이의 재건에 큰 지장을 겪었거나 아예 

삼국 동맹 전쟁 당시에 멸망 이후 분할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 때문에 파라과이는 중남미에서 독보적으로 혼혈이 많고, 또한 순혈 원주민들의 차별도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다.

반면에 우루과이는 그와 마찬가지로 카라이 과즈의 칭호를 받았던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의 사망한 이후에 

스페인에 대항한 독립 운동을 도왔던 차루아족들을 배은망덕하게 탄압, 학살했다.


파라과이, 우루과이 국명의 "과이"는 강을 의미하며 과라니족의 부족명과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

파라과이는 과라니어로 "오색 빛깔의 강"이라는 뜻이며, 우루과이는 과라니어로 "새가 머무는 강"이라는 뜻이지만

파라과이는 국명을 지어준 과라니족들을 보호한 반면에, 우루과이는 마찬가지로 국명이 원주민에게서 기인함에도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대다수가 순혈 백인인 국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였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원주민 학살에

대해서 사죄를 하고 원주민 토착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너무 늦은 탓에 계획은 순조롭지가 않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프란시아의 원주민 정책은 마냥 박애주의적이진 않았으며 그의 수기에서 원주민들을 백인과

동등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구절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에이브러햄 링컨의 흑인 해방이 인권적인 이유가

아니라 일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처럼 그의 원주민 정책도 스페인 농장주와

권위있는 종교 단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파라과이 국민이라면 그가 공포

정치와 독재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원주민, 혼혈 가릴거 없이 그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점이다.



 


장문의 칼럼 읽느냐 고생 많았다.

다음 시간에 또 만나자! 이상 닥터 마리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