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0. https://arca.live/b/penisenvy/21533111 책 전반적 내용 요약

1. https://arca.live/b/penisenvy/22453313 현대 자유주의에 대한 칸트적 근거와 샌델의 비판

2. https://arca.live/b/penisenvy/23494457 현대 자유주의 공공철학 하에서의 종교적 자유


정부는 시민들이 지지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다룰 때에 중립을 지킬 것으로 가정된다. 설령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표현의 시간, 장소, 방식에 관해 "내용 중립적인" 제한을 한다 해도, 그 규제는 "표현되는 관점에 대한 공감이나 반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조가 진리에 대한 정부의 권위주의적 시각을 강요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거듭 판시해왔다. 그것은 정부가 메시지, 이념, 주제 혹은 내용을 이유로 표현을 제한할 아무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즈음까지는 연방대법원에서 표현의 자유를 다룬 적이 거의 없었다. "언론 혹은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만 규정되었을 뿐, 개인의 권리가 보호된 것은 아니다. 제정 당시의 관심사는 "언론과 출판 영역에서 오로지 주만이 입법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00여년 이상이 경과하고 1917년에 방첩법(Espionage and Sedition Acts)이 통과되면서 시민적 자유가 주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1950년대까지도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가치와 상관없이 모든 표현을 중립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즉, "높은 가치의" 표현과 "낮은 가치의" 표현을 구분했다. 그 중 보호받지 않는 표현들은 "추잡하고, 음란하고, 신성 모독적이고, 비방적이고, 모욕적이거나 '싸움을 거는' 말들, 즉 발언하는 것만으로도 해를 입히거나 즉각적으로 평화를 침해하는 경향을 가진 말"이라고 언명되었고, 이들 표현은 사상을 드러내는 데 본질적이지 않으며 "질서와 도덕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판단은 "품위 있는 표현을 보호"한다는 옹호와 "내용과 관련된 가치 판단이라는 금지된 역할"이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1960, 70년대에는 비판적 입장을 더 많이 수용한 판결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란물, "싸움을 거는 말", 상업적 표현 등이 모두 수정헌법 1조의 보호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여러 범주에 가치를 부여하는 임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중립성이 법리의 중요한 원칙으로 부각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즉, 정당한 이유로 표현을 규제할 수는 있지만 그 근거가 문제되는 표현에 대한 찬/반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때 "정당한 이유"는 표현의 '시간이나 장소' 상황에서 중립성을 어긋난 경우를 말한다. 이런 원칙 하에 공공도로 스크린에 나체 영화 상영, 공익사업 참여 업체의 핵발전 옹호 광고, 성조기 소각 행위, 인종 편견 등에 기초한 표현 행위 등에 대한 정부의 제한에 위헌 판결이 이루어졌다.


정부의 중립성이 중시되면서 음란물에 대한 판결의 논조도 달라지게 되었다. 음란물 규제는 때때로 범죄 증가나 그 밖의 해로운 결과들로 이어진다는 이유로 지지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음란물 규제법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는 견해의 반영이다. 즉, 이는 공동체와 개인들의 품위와 도덕에 대해 정부가 책임이 있다는 전통적 관념에 입각해 있어서, 자유주의적 정부의 목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연방대법원은 이 상황을 음란물 규제법 자체를 위헌으로 만들기보다는, 음란 자체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무관한 목적을 음란물 규제법에 부여함으로써 음란물 규제를 옹호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삶의 질, 전체 공동체의 환경, 대도시 도심의 상업적 분위기, 그리고 어쩌면 치안"이 음란물 규제법이 의도하는 "정당한 국익"으로 의제되었으며, 표현의 내용이 가져올 도덕적 위해가 아니라 "범죄와 주민의 타락을 방지"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거나 또는 "주변 지역에 미치는 부수적 효과를 겨냥"하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논조로 변화한다. 샌델은 이런 논조가 사실상 일관성을 잃은 것이라고 보지만, 동시에 연방대법원이 얼마나 애써서 내용에 대한 판단을 "괄호 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과거에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 추구나 자치에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공론장에서 표현들을 자유롭게 부딪히게 하는 것이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되거나, 민주적 사회에서 시민들을 최대한 참여시키는 좋은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80년대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는 "가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독립적 자아로서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일반적 원칙의 특수한 사례로 취급되었다. 이렇게 "자아 실현"에 초점을 맞추는 견해에 의하면 "자아가 표현의 원천"이기에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천박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 탄생했다. 심지어 개인 수준의 자아 실현이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 선택의 산물이 아닌 사상들은 (…)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자유주의적 견해의 자발적 측면, 무속박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표현에 내재된 위해라는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비방법(defamation law, 흔히 명예훼손법이라 번역되지만 명예보단 명성에 가까움) 분야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호하는 명성(reputation)에 대한 위해라는 개념은 자유주의적 인간관으로는 그 의미가 모호해진다. "명성"은 전통적으로 개인 정체성을 사회적 역할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는 명예(honor)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은 진정한 정체성을 자신의 "역할"에서 찾으며, 따라서 "여러 겹으로 구정된 자아"를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를 특정 순간의 사회적 역할과 무관하게 목적에 우선하는 시각에 의하면, 자아에게 중요한 것은 명예가 아니라 존엄(dignity)이다. 그리고 이는 자율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에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사회 제도에 선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아의 존엄은 모욕적 언사만으로 가해진 위해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이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너의 존엄은 그런 걸로 상처받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런 자아에게 명성은 본질적 명예가 아니라 도구적인 쓸모, 사업용 자산일 뿐이다. 따라서 비방 행위가 무속박적 자아에게 위해가 되려면, 그것이 표현 자체와 무관하게 "현실적" 해악을 가져오는지 입증해야만 한다. 이것이 유럽에서의 봉건적 전통과는 다른, 자본주의적 전통에 의한 명성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위해 대상에 대한 공동체적 견해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비방은 집단이나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종적 또는 종교적 비방들을 처벌해야 할 해악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내가 속한 인종적/종교적 집단에 대한 비방은 어떤 경우에도 최고의 자기 존중인 "자기 존중"에는 해를 입힐 수가 없다. 


샌델은 이런 생각이 가져온 결과로 두 가지 사례를 가지고 온다. 하나는 네오나치 시위 제한을 무력화한 것이고, 하나는 포르노 반대법을 무력화한 것이다.


스코키 시에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네오나치에게 이곳이 도발의 대상이 되었고, 스코키 시에서는 토론을 거쳐 이들의 시위가 그저 불쾌한 일을 넘어선 일종의 침략이라는 견해에 도달했다. 그 결과 증오 집단의 지위를 금하는 3개의 조례가 통과되었다. 전미시민자유연합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고("표현의 자유는 가장 극단적인 사건들 속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연방대법원이 수정헌법 1조 위배를 이유로 그 조례들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스코키 시는 인종 비방이 "표현에 의한 해악"이며 이들 표현의 심리적·공동체적 트라우마를 증거로 제시했지만, 이 때 연방대법원은 "개인의 명성을 훼손하거나 평화의 침해를 유발하는 표현은 처벌할 수" 있지만, 집단에 대한 비방은 처벌할 수 없으며 물리적 해악을 야기하지 않은 한 표현을 통한 위해를 금지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Collin vs. Smith 판결)


인디애나폴리스 시에서는 전통적인 이유와는 다른 이유로 포르노를 제한하고자 했다.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시민적 평등을 훼손한다는 이유였다. 여기의 전제는 "성을 차별의 근거로 만들고 유지하는 데 포르노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편협한 믿음, 그 믿음이 부추기는 경멸과 공격적 행동"이 고용, 교육, 기타 영역에서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가능성을 훼손하며 "공적 생활의 참여에서 (…) 여성들을 제한"하는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 법이 "표현 내재적 위해관(포르노는 그것이 성범죄를 초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여성들에게 해를 끼친다)"과 "피해 당사자에 대한 공동체적 기술(여성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포르노가 끼치는 해악의 희생자들이다)"을 정당화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스코키 시의 "인종 비방" 조례와 비슷하다고 서술했다. 연방지방법원에서는 위의 스코키 판결을 인용하면서 이 두 가지 종류의 해악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연방항소법원에서는 그 해악은 받아들여졌으나 "그 해악이 무엇이건 하나의 견해"이므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 제한을 무력화했다. 최소한 여성들의 성적 종속을 비난한다는 점에서 좋은 사회에 관한 특정한 견해를 지지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샌델을 두 가지 면에서 이런 경향성을 보이는 자유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표현에 대한 반대를 "괄호 치는" 것이 합당한지는 표현과 사회적 실천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적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이론에 근거하고 있기에 애당초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표현에 대한 특정한 이론(칸트적 자아, 무속박적 자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인간들을 그들이 속해 있고 그 안에서의 지위에 의해 사회적 존중이 결정되는 바로 그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표현이 사회적 실천을 옹호하는 것일 뿐 사회적 실천 자체가 아니라는 이론적 입장은 표현이 야기할 피해와 상관없이 표현 자체의 위해를 인정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표현을 덜 존중"함으로써 표현에 관용적인 것이다. 즉, 표현이 그 자체로 가할 수 있는 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표현에 더 관용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지역사회들이 도덕적 판단을 괄호 쳐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표현을 보호하는 것은 자치의 손실을 수반한다. 이는 인간이 지위적 자아로 존중받는다는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며 정치 공동체들이 그 가치,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막는다. 앞선 두 사례에서 법안을 추진하는 데에 가장 의욕적인 집단들은 존재했지만(각각 홀로코스트 생존자, 페미니스트), 위헌 판결을 받은 그 법을 통과시킨 것은 시민들, 시의회였다. 절차적 공화정의 압박으로 인해 공동체를 존중한다는 "좋음"의 실현을 막고 그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자치적 공동체들의 가치 실현도 방해하게 되었다.


샌델은 자유주의자들은 다수의 지배를 제한하는 것, 즉 자치를 제한하는 것이 최후 수단으로서의 인간 권리(즉, "옳음")의 핵심이라고 답할 것이라고 썼다. 정부의 목적 중립성이라는 원칙은 다수가 싫어하는 표현을 탄압하기 위해 소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표현이 관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면, 가령 1960년대의 민권 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이 행진하기를 원치 않는 백인들이 스코키 시에서의 유대인과 다를 게 뭐냐고 물을 것이라고 한다.


샌델은 여기에 대해 민권 운동과 네오나치의 시위는 표현의 내용, 즉 명분의 본질에 있다고 답한다. 법 해석의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권리들을 정의할 때 실질적인 도덕적 구분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도덕적 판단을 괄호 치는 데에 직면하는 어려움은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를 보여주기에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샌델은 마틴 루터 킹의 행진과 관련된 판결에서 "행진의 명분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행진을 허용했던 판례를 인용하면서, 이 판결이 내용 중립적인 것도 아니었고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상대주의나 억압의 비탈길로 빠지지 않았으며, 그 행진으로 사람들의 도덕적 상상력이 자극되었고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되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덧붙였다.


핵심적 사례만 추리기로 결정했는데 전 글보단 훨씬 나은 거 같음. 

책 내용 소개하고 싶은 부분을 기획한 건 이걸로 끝임. 0번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뒷부분이 훨씬 많지만 그건 내용 소개를 위한 소개만 될 거라고 생각함. 내용도 거진 미국사 서술에 가깝기도 하고.

샌델이 주장하는 내용들을 전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자유주의의 "무속박적 자아" 가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들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내용들을 가져왔음.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치 영역의 복원, 그것도 도덕적 영역의 복원이라고 보는 것이 샌델의 입장이니, 공동체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샌델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