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퍼 엔진은 연료와 산소가 함께 움직여 점화한다.


수송기는 로켓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아올랐다.  높이의 가늠차 띠가 빠르게 상승했다. 구름을 뚫는 그 순간, 달의 휘황찬란한 빛이 온 유리를 가득 뿌렸고 마치 새로운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며 세상을 볼 여유가 없다.


강한 추진력이 자신의 체중에 몇 배의 가속도를 가하며 가슴을 눌러 숨쉬기 어렵게 했다.


가슴 밑에 오래된 상처가 다시 은은하게 아프고, 뱃속은 또 들끌었다. 만약 식사라도 했었더라면, 지금 당장 뱃속의 물건을 전부 토해냈을 것이다.


베라는 훌륭한 전사일지는 몰라도, 절대 훌륭한 운전사는 아니다.


가속도가 구조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녀는 여광으로 창백한 얼굴이 종이뭉치처럼 구겨진 지휘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웬일로 비아냥거리지 않고 혀를 꾹 누른 후 조종간을 잡아당겨

비행기의 등반 각도를 조정했다.


그래도 속도는 늦추지 않았고, 레이더에는 추격병으로 분류되는 반점이 남아 있었고, 전광판에는 마하 수가 달그락달그락 뛰고 있었다.

베라

지금은 도망갈 시간이야, 이 악물고 참아. 널 돌볼 시간도 없어.


"어디로 갈까?"


베라에게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입술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레이더에서 추격병으로 보이는 반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생각보다 쿠로노의 추격병이 쫓아오지는 않는 모양이군....어쩌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살짝 옆으로 베라의 단아한 옆모습이 눈에 띈다.


남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에게 좋은 낮빛을 준 적이 없고, 심지어 자신의 팀과 직간접적으로 충돌한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녀를 믿을 수 밖에 없다.


(지휘관)(선택)

(눈을 감는다.)


몸의 상처와 피곤함이 어둠으로 섞이며 자신의 정신을 천천히 삼켰다.

잠깐 지난 사이.


눈을 다시 떴을 때 자신은 기내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베라는 자신의 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링거팩을 들고 있었다. 링거 스포일러가 그녀의 손안의 자루와 자신의 손등 정맥 안에 박혀있는 바늘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과 다리가 시렸다. 고개를 약간 숙이자 베라의 다른 손이 자신의 가슴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 그녀는 혼미한 정신으로 나의 몸을 검사한 것 같았다.


내가 깨어나자, 붉은 머리의 여인이 손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손끝이 가슴 가운데 갈비뼈를 따라 아래로 향하고는 자기 쪽 갈비뼈에 살짝 힘을 주어 눌렀다.


한 차례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자신의 몸 아래 의식에 경련이 일더니 바닥에서 튕겨 일어나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흠, 괜찮아 보이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링거봉지를 자신에게 던져준 뒤 일어나 조종석으로 돌아갔다.


손에 있는 링거팩은 영양액 한 봉지로 안의 액체가 이미 바닥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방금 찔린 것이 아니였다.


바늘을 뽑고 다래끼에 넘치는 피를 처리하고 일어섰을 때, 이전 보다 훨씬 정신상태가 좋았다.


비행기는 현재 자동 순항 모드로 엔진의 낮은 우르릉소리가 편안한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레이더에 잡티 하나 없는 것을 보아하니 베라가 적의 추격을 벗어난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운전석에 기대어 묵묵히 긴 칼을 닦고 있다.


지휘관(선택)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야?/너가 날 치료한거야?


베라

모르겠네.

총사령관의 임시 명령은 너를 구조한 후 지정된 좌표로 데려가는 거야.


지휘관(선택)

고마워.


베라의 눈이 약간 커지자, 그녀는 곧 눈을 가늘게 뜨고 연극을 거르며 말했다.


베라

말로만 대답한다고 내가 만족할 줄 알아?


어쨌든 난 널 살렸어. 그럼 더 중요한 것으로 답례해야 하지 않겠니?

지휘관(선택)

더 중요한 것?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기운이 자신을 엄습했다.


그녀는 긴 칼등으로 나의 목덜미에 대고, 그것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지금은 다른 사람을 놀리는 캣스틱 같다.


진짜인지 장난인지 헷갈렸다.


베라

예를 들면 네 목숨.


약간 멍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베라는 악랄하게 웃었다.


베라

오해하지마. 난 다른 뜻은 없지만, 지금 온 세상은 너를 얻기를 원하고 있고 넌 내 손에 있어.


그녀는 칼을 '손바닥'처럼 다루며 턱을 만졌다.


베라

재미있네. 내가 지금 너를 데리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교환하러 갈 수도 있잖아?


지휘관(선택)

....../너는 그렇지 않을거야.


베라

하하하하 지금 니 표정, 참 가관인데?

그래, 그래 나 같은 사람에게 이상하고 순진한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아.

나는 당신이 매일 소꿉장난이나 하고 다니는 까마귀 소대가 아니라고. 

지휘관(선택)

그런데 대원들은 어딨지?


베라의 조롱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무표정으로 다시 칼을 칼집에 넣었다. 맑고 낭랑하지만 거슬리는 칼소리가 났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 보였지만 21호와 녹티가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상상이 갔다.


베라

지금 네 표정, 불쾌하니까 그만 해줄래?

내 대원들은 너희처럼 약한 녀석들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미간에는 언뜻 초조함이 보였다.


지금 자신이 까마귀 소대를 생각하는 것처럼 베라 역시 같은 감정일 것이다.


다시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돌아왔다.


창문 밖은 쇳빛 하늘과 잿빛 구름, 그리고 잿빛 바다였다.


무기질의 차가운 색깔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채우고 있다.


수천일색의 단조로운 세계 중에서, 이 우주왕복선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들의 창공을 찢고 지평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눈이 피로해지려 할 때, 날카로운 가시 모양의 작은 그림자가 갑자기 먼 수면을 뚫고 나갔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나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제 2, 3의 날카로운 가시가 하나씩 시야에 들어왔다.

지평선 아래에서 비범하고 위력적인 무언가가 떠올라 그 전모가 드러났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자연계의 천체가 아니라 인류의 피조물이다.


지평선 위의 그림자는 더욱 높아졌고, 경탄은 심지어 자신이 깨닫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여섯개의 철화색의 첨탑은 해수면에 거대한 원을 두르고, 원의 중앙에는 일곱 번째이자 가장 큰 건물로 단지 그 체량이 해수면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만으로도 숙연하게 만들었다.


베르나의 로봇섬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눈앞의 이 바다의 보루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충격을 언어로 요약하긴 어렵지만, 서양 탐험가들이 중미 밀림을 넘어 마야인의 

금자탑을 처음 봤을 때도 아마 이런 느낌이였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두려움에 탄식도 멈췄다.


도대체 이런 흡파 코팅을 사용해서 이러한 해상 도시가 레이더 모니터 상에 감지 되지 않았는지 

믿기 어려울 따름이다.


베라는 처음 그것을 보고 약간 황홀한 느낌을 받고, 곧 운전석 앞의 전광판에서 테스트를 시작했다.

베라

저 빨간 글씨 봤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보니, 이 해상 도시 앞쪽의 계류장 옆에 기복이 심한 붉은색 표시가 있었는데, 표시 아래 반듯한 네모 상자가 있었다.


그것은 적막하고 차가운 이 해성과 어울리지 않아 한눈에 보였다.


그건 총사령관이 보낸 거야.

여기가 목적지야. 뛰어내릴 준비해.

지휘관(선택)

낙하산?


베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베라

우린 쿠로노의 수송기를 빼앗았어. 그들이 신호 추적을 안할 것 같아?


나는 자동순항시스템에 새 목적지를 입력할 거야. 이건 단지 시간 때우기고, 그들이 이것을 찾고 항로를 조정해 우리를 찾는 건 시간문제야.


모자란 얼굴로 서있지 말고 낙하산쓰고 공수 준비나 해.


하얀 낙하산 하나가 있었다.

그렇다. 단 하나.

마치 낙하할 줄 모르는 문외한을 대하듯 베라는 안전벨트로 자신을 그녀의 몸 앞에 단단히 묶고 함께 내려앉았다.


베라

착륙지점은 계류장 하나 크기밖에 안돼, 하지만 네가 바다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 내가 널 건져내야 하잖아.


공수훈련을 받은 적은 있지만 구조체의 생체 피부가 기류와 풍향에 대한 감지 능력이 

인류의 주변 환경에 대한 대처 속도와 즉각적인 판단 능력도 인간과 견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베라는 양쪽 견인줄을 조종해 계류장 쪽으로 정확하고 천천히 착륙했다.


높은 곳에서 이 도시를 내려다 볼 때는 이미 충분히 감동했고 낙하산이 점점 내려가면서 도시의 윤곽도 뚜렷해졌다.


요새, 피라미드, 도시, 산애의 결합체 같지만 어떤 형용과 비유를 뛰어넘는다.


현존하는 모든 창조물에는 어떤 것도 그것이 주는 장엄함과 신비감을 형용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인류가 과학기술과 공업으로 새롭게 조명한 환상, 전설의 재현과 같다.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하지만 '상실해성'이란 전설처럼 무기력한 '유적'기지에서 탐지할 수 있는 어떤 활동 신호도 없는 주파수, 

조명, 전자파, 방사능 핫스팟, 열에너지 신호.....아무것도 없다.


먼 동쪽에서 회흑색 적운이 펼쳐져 왔다. 그것은 따가운 햇빛을 막아 이 해역에 그늘을 드리웠다.


갑자기 더 적절한 비유가 떠올랐다.


바다 위의 '묘비'.

두 발이 땅에 닿은 순간, 마음이 놓였다.


베라가 착륙하는 순간 자신과 연결된 안전벨트를 풀고 낙하산 끈으로 허리를 감싼 채 바다에 뛰어들어 빨간 신호판으로 헤엄쳐 갔다.


구조체의 기체 능력은 정말 놀랍다.


겉부분에 세계 정부 로고가 새겨진 빈 공간이다. 지상에서 장시간 작전을 이어갈 때 공중정원은 소대에 이런 상자를 투하했기에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고 아래 망간으로 새긴 알파벳이 한 줄 있다.


"FLARE"


무슨 말이지?


베라는 에어캡슐을 여는 스크린을 보다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봤다.

지휘관(선택)

(앞으로 간다.)/(제자리에 있는다.)


베라의 미간이 펴졌다.


베라

눈치는 있네.

 

기밀등급이 높은 방은 보통 지휘관만 열 수 있다.


지휘관(선택)

(얼굴을 화면에 비춘다.)


"홍채인증 통과, 신분인식 완료."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보급함의 중간에 금이 가고 뚜껑이 양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베라와 함께 빼어난 몸매를 가진 기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지휘관(선택)

이건?/예비 기체?


베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또 다른 '자신'을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한 자루의 칼날처럼, 시간을 정해놓은 장미처럼, 다만 장미 꽃잎마다 피 멍이 든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무도 조종하지 않는 기체는 결국 죽은 것이다. 바로 인간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은 더욱 치명적으로 보인다.

베라

....이 기체를 출동시키다니, 총 사령관은 정말 '대범'하군.


그녀는 기체 앞으로 가 두 손으로 휴면고를 받치고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늘 칼처럼 날카롭던 그녀가 지금은 모든 예봉을 가다듬고 눈을 떨구고 또 다른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그리움을 머금고 있다.


그 그리움은 그리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였는데, 그녀의 어깨에 드리운 것은 더욱 깊은 것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베라의 머리를 따라 휴면창에 잠들어 있는 기체의 붉은 머리와 엉켰다.


그리고,


베라

누가 '탈의'하는 걸 보고 싶나 봐?


그녀는 자신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투와 눈빛에 약간 도발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다.

지휘관(선택)

(머리를 돌린다.)/?


베라

하? 부끄러워? 정말 귀엽네.


봐도 괜찮은데.


잠시 후

베라

됐어.


고개를 돌렸다.


마침 기체가 바뀐 베라가 낡은 기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다소 기괴한 광경일텐데, 이때는 색다른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베라는 낡은 기체를 다시 공중에 띄워놓고 새 몸을 폈다.


베라

기체 상태가 좋네, 계속 움직일 수 있겠어.

지휘관(선택)

이게 너의 구형 기체야?/이게 너의 신형 기체야?


베라

맞아.


몇 번 밖에 쓰지 않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잘 쓰지 않았지.


아무리 보조기체라 하지만 내 전투 능력은 뛰어나다고.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이 잊고 있던 통신 장치가 하나둘씩 켜졌다.


베라

총사령관이다.

그녀가 아무생각 없이 통신장치를 작동시키자 니콜라의 그림자가 두 사람앞에 나타났다.


실시간이 아닌 녹음 영상이였다.


화면안의 니콜라의 '눈길'이 공교롭게도 베라와 마주쳤는데, 마치 이 대화를 녹음할 때 그는 그녀가 그의 앞에 설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니콜라

잘했다, 베라.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군.


한마디 말만 남기고 니콜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베라는 팔장을 끼고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 대신 하산의 모습이 투영됐다.


다만 이번에는 베라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그저 전달 내용이였다.


하산

네가 이 메모를 볼 수 있다면,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이 너를 쿠로노의 손에서 구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거겠지, 내가 한마디 하겠네.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네, (지휘관)


시간이 된다면 네가 당한 일에 대한 전모를 설명 해주겠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쿠로노는 너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네.


그들은 심지어 우리와 합의한 후에도 코앞에서 선참후계라며 암암리에 진창을 일삼았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대행자를 찾는 게 임무였고 그들은 너를 놓치지 않으려 하네. 

물론 우리도 이걸 예상했지만 자네에게 이런 점들을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네. 때가 되기 전에 많은 것을 알면 쓸 때 없는 걱정만 늘기 때문이지.


더군다나, 너는 이번 사건을 통해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을걸세.


하산의 눈빛이 깊어졌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길게 말하지 않겠네.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니.


너도 케르베로스 소대 대장도, 지금은 대서양의 어느 해상도시에 있을걸세.


나는 우리가 해독한 좌표가 정확하다고 기도하는 수 밖에 없고, 이 캡슐을 정확한 위치에 투하했길 바라네.


만약 너희들의 환경이 내가 말한 바와 같다면 주변을 둘러보게


(지휘관), 너는 지금 인류의 황금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유산 위에 서있어.


혹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지.


그것은 눈부신 세월의 종점이자 퍼니싱의 시대의 시작이었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야.


하산은 한숨을 쉬었다.


맞아. 그 수상도시는 일찍이 진공제로 실험로였던 '진공 핵융합 실험로'가 있는 곳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