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의 깊은 밤, 김독자 컴퍼니가 모여 사는 큰 집의 현관문으로 누군가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현관문이 열리자 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거실은 깜깜했다. 목소리의 주인, 유상아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신발을 정리하던 그때, 안경을 쓰고 한손에 책을 쥔 김독자가 마중나왔다. 그래도 마중나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먼저 주무시지..."

"잠이 안와서 말이죠."


유상아는 조금 퉁명스레 말했지만 김독자는 농담이라도 하듯 살풋 웃어보였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네...정부 일이 다 그렇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도 제대로 못 쉬셨지 않습니까?"

"일이 있는데 어떻게 쉬겠어요."


김독자는 살짝 한숨을 쉬며 길을 비켰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실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푸흐...아니에요.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어서 다행인걸요?"


얼핏 보인 유상아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보였다. 김독자는 유상아가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도록 자리를 비켰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주무세요."

"네. 내일봐요, 독자씨."


김독자는 유상아의 방 문앞에서 한참동안이나 무언가를 생각했다.


.

.

.


그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고 여전히 유상아는 일에 치이며 살았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는 유상아를 본 일행들은 저마다 걱정의 말을 내뱉었다.


"상아언니 다크서클 봤어요? 좀 심한거 같던데..."

"제가 좀 쉬라고 말씀드려도 통 듣지를 않으시더라구요..."

"맞습니다. 상아씨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쯧...좀 쉬엄쉬엄 하면 될것을 괜히 여러사람 걱정시키고 말이야..."


그런 일행들의 걱정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김독자는 자신의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독자는 어디있지? 또 아침을 거르는 건가?"


유중혁이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흐아암...독자형 아까 방에서 노트북 가지고 뭐 하는것 같던데요."


이길영은 잠이 덜 깼는지 눈을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휴대폰이 아니라?"

"게임이라도 하는 걸까요?"

"김독자가 웹소설을 봤으면 웹소설을 봤지 게임은 아닐걸?"

"또 뭐 이상한 짓 꾸미고 있는 거 아니야?"


누구보다 김독자의 행동변화에 예민한 정희원이 김독자의 방을 힐끔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때, 김독자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인건지 연신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외출하는 것인지 손에는 자동차키가 들려있었다.


"네, 네. 그걸로 해주시면 되고요. 가능하면 이번주 안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김독자 아침 먹....."

"미안, 중혁아 내가 좀 바빠서. 내일은 꼭 먹을게!"


그리고 김독자는 유중혁의 말을 끊고 현관문을 열며 대답했다. 식탁에는 잠시 정적이 돌았다.


"저 놈은 또 아침부터 어딜 가는거야..."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젠 별로 놀라지 않는 그들이었다.


.

.

.


"비유야~ 아빠왔어요~."


김독자는 공터로 페라르기니를 몰고 간뒤, 허공에다가 비유를 불렀다.


[아바앗]

"하하...그건 준비됐어?"

[네, 준비됐어요.]


비유가 스파크를 튀기며 나타나 포탈을 만들었다. 그 포탈은 [관리국]으로 이어지는 포탈, 김독자는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시 이틀이 지났다. 토요일 아침이었지만 유상아는 오늘도 아침일찍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ㅡ똑똑

"유상아씨, 계십니까?"


노크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상아는 의아해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러분?"


비유를 포함한 김독자 컴퍼니 모두가 있었다. 비유의 옆에는 여행용 캐리어 같이 생긴 물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상황인거죠?"


당황하는 유상아를 뒤로하고 김독자는 캐리어와 예쁘게 포장된 종이봉투를 건넸다.


"이, 이게 무슨..."

"일단 열어보세요."


유상아는 김독자의 재촉에 일단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것은.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공항......비즈니스석? 이, 이걸 왜 저에게..."

"선물입니다. 유상아씨 요즘 쉬지도 못하고 일하셨지 않습니까? 이참에 맘 편히 쉬다 오세요."


그 침착한 유상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열심히 상황을 파악 중이었다.

김독자의 말을 거든것은 일행들이었다.


"독자씨가 지난 3일동안 준비했데요."

"네?"

"호텔하고 관광지하고 전부 혼자서요. 참나, 이런건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나주지...우리도 상아씨 좀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유상아는 울컥 눈물이 나왔다. 물론 그녀도 사람이었다. 피곤해하고 힘들어한다. 지금까지의 행동이 보상받는 것 같기도 했다.


"흑...정말...정말 고마워요..."


너무 고마웠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기뻤던 것일까......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본 한수영이 짓궃게 놀리기 시작했다.


"뭐야, 천하의 유상아가 지금 우는거야?"

"읍...으흑...으허어엉"


북받쳐오르는 감정에 진짜로 울기 시작하자 정희원이 한수영의 등짝을 찰싹하고 때렸다.


"아니, 왜 상아씨를 울려!"

"쓰읍....진짜로 울지는 몰랐지! 야, 김독자! 니가 울렸으니까 니가 책임지고 달래라. 알겠냐?"

"어, 어?"


김독자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는 사이, 유상아는 진정이 된건지 눈은 발갛게 물들었지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지혜가 팔꿈치로 쿡 찌르자 김독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새 일행들이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상아씨, 정부에는 제가 잘 말해뒀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시고 14일동안 푹 쉬다가 오세요. 제가 드린 봉지 안에 필요한건 전부 넣어뒀습니다. 그리고 이건......"


김독자는 비유의 손에 들려있던 여행용 캐리어를 건넸다.


"아공간 캐리어입니다. 왠만한 건 전부 다 들어갈겁니다. 생필품 몇개는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유상아가 아공간 캐리어를 받았다.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가벼웠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


유상아가 김독자를 냅다 끌어안았다.

유상아의 방 앞에 모여있던 일행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김독자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중이었다.


"고마워요....정말로."

"어, 크흠...네."

"푸하하! 아저씨 얼굴 완전 빨개졌어!"


한동안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독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준비를 할까요?"

"네!...그리고, 다시한번 고마워요."


유상아는 분주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신난 유상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상아가 아공간 캐리어를 열고 뭔가를 발견한건지 손을 넣어 꺼냈다.


"뭐야, 너 저런것도 준비했어? 김독자 센스가 좀 있는걸?"

"페르세포네 어머님께 도움을 좀 받았지."


유상아의 손에 들린것은 원피스, 선글라스, 모자...여러가지 옷들과 장신구들이었다.


계속해서 그런 것들이 쏟아져나오자 유상아가 부담스러웠는지 김독자를 향해 물었다.


"코인을 대체 얼마나 쓰신거에요?"

"저는 숨만 쉬어도 코인이 들어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 아저씨 한대만 때려도 되?"


유상아는 저 의기양양한 모습에 푸흣하고 웃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알았어요. 주시는데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죠? 열심히 놀다 올게요!"


행복한 웃음소리가 김독자 컴퍼니의 큰집에 울려퍼졌다.


.

.

.


출발 8시간 전, 유상아가 방을 나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문제가 하나 있어요."


갑작스런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여행이란 다 같이 가야 재밌을텐데...혼자가니까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요."

"그것도 그렇지만 저흰 전부 학교하고 직장이..."


정희원도 동의하는지 걱정스런 말투였다. 그런 그때, 신유승이 말했다.


"그럼 독자 아저씨가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녜요?"

"으응?"


그 말에 정희원이 동의 했다.


"그거 좋네! 독자씨 직장 없잖아요? 이참에 햇빛도 좀 쐬요. 상아씨 심심할텐데 말동무도 해드리고."

"그, 그치만 저는 길치에다가..."


김독자가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하려하자 유상아가 웃음을 띄우며 성큼 다가왔다.


"독자씨 해외여행 한번도 안 가보셨죠? 이번 기회에 저랑 같이 가실래요?"

"해, 해외여행을 한번도 가보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만....제가 감히 같이가도 될지..."

"자꾸 그러시면 저도 안 갈래요. 비행기표 그냥 찢어버릴까요?"


유상아가 손에 쥔 비행기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잡았다.

김독자가 기겁하며 일어났다.


"잠깐만요! 갈게요! 갈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동의한거죠?"

"......네."


김독자는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네, 인원이 한명 더 추가될 것 같습니다."


그런 김독자를 유상아가 만족스레 바라보았다.


.

.

.


인천 국제공항 국제선 게이트 앞, 한쪽에는 김독자와 유상아가, 다른쪽에는 그 둘을 제외한 모두가 마중나와 있었다.


"2주 뒤에 만나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도착하면 연락해!"

"사진 많이 찍으십쇼!"

"김독자 유상아한테 뻘짓하면 죽인다!"


그런 그들에게 김독자와 유상아는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저희 갔다 올게요!"


완전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나란히 걸어가며 말했다.


"언젠가 독자씨랑 여행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이렇게 될줄은 몰랐네요."

"세상 사는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이뤄졌으니까 상관없어요."

"그보다...정말 이등석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상아는 여행이란 이리치이고 저리치여야 한다면서 비즈니스석을 포기했다. 

김독자가 더 이상 자리가 남아있지 않아 혼자 이등석을 타려고 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했잖아요. 혼자보단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는 게 훨씬 좋다고요."


유상아는 뭐가 문제냐는 듯 대꾸했다. 어느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기 ■■■편이 5번 게이트에서......]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곧,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했다.


"비행기는 처음 타보네요..."

"긴장되세요?"


김독자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묻어나왔다. 유상아는 이런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조금 낫죠?"

"...네. 그럭저럭이요..."


유상아는 쩔쩔매는 김독자를 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못했다. 기체가 요동치고 폭풍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눈을 감고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어느새,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해 창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후아...."

"푸흐흐...진짜 귀여우시네요."

"크흠...처음이라 그렀습니다."

"네, 그러시겠죠~."


결국 김독자도 피식 웃고 말았다. 한동안 조용한 웃음꽃이 피었다.


"영화라도 한 편 보실래요?"

"좋죠."


웃음이 진정되자, 유상아가 영화를 틀었다.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담요를 덮고 이어폰을 나눠낀 채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중반을 달려가던 중, 김독자의 어깨에 무언가가 올려졌다.

그건 유상아의 머리였다.

피곤했는지 새액새액 숨을 쉬며 깊게 자고 있었다.

김독자는 순간 당황했만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심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느새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유상아에게 어깨를 빌려준 채, 자신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영겁인 것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안내방송에 눈을 떠보니 유상아는 아직도 제 어깨에 기댄채 자고 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나보다.


김독자는 그런 유상아를 조심히 깨웠다.


"유상아씨, 거의 도착했습니다."

"우으음...흐아아암."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하던 유상아는 눈을 비비더니 헛 하고 놀라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크흠, 어깨가 조금 뻐근합니다만...괜찮습니다."


그럼에도 유상아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앞으로는 즐길일만 남았으니까요."

"...네."


비행기는 약 30분 후에 착륙했다. 스페인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입국심사를 끝마친 뒤, 한 가이드가 그들을 호텔로 안내했다. 이 근방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내일 아침에 로비에서 만납시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각자 다른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뒤,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김독자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샤워를 끝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낀 갈색머리에 햇살같은 웃음을 띈 여자가 자신을 불렀다.


"독자씨!"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

"저도 방금 나왔는걸요.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호텔에서의 아침은 대부분이 그렇듯 뷔페였다.

김독자는 이런곳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상아의 추천으로 도움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괜찮아요. 이제부터 익숙해지면 되죠. 그보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꽤 맛있더라구요."


유상아는 김독자의 입에 요리를 들이밀었다.

김독자는 우물쭈물하며 결국 요리를 받아먹었다.

우물우물하며 음식을 씹자 눈을 번쩍 뜨는 김독자였다.


"어때요? 맛있죠?"

"와......네."


유중혁의 요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와는 달리 독특하고 신기한 맛이었다.

식사를 끝마친 뒤, 그들은 이동을 위해 다시 캐리어를 들고 나왔다. 호텔 앞에는 렌트카가 준비되어 있었다.

김독자는 짐짓 멋있는 척을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후후, 고마워요."

"어디로 모실까요. 월하현제님?"

"그럼...'부뇰'로 가주세요."

"......네?"


많은 사람들이 알듯이 부뇰은...'토마토 축제'로 유명하다. 그리고 김독자는......토마토를 싫어한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흐음...이를 어떡한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김독자를 바라보며 조금 더 놀리고 싶었지만...그에게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에 이 생각은 철회했다.


"푸흐흐흐, 장난이에요. 장난. 발렌시아로 가죠. 그 다음 바르셀로나로 올라가요."

"후우...알겠습니다."


김독자는 차를 몰아 발렌시아로 향했다.


그 뒤로, 그들은 먹고 싶었던 것, 보고 싶었던 것, 전부 알차게 즐겼다.

사진은 수십장을 찍어도 부족했다.


"와, 독자씨! 이거 사람들 선물로 사면 딱이겠어요!"

"네, 그리고 저건 왠지 유승이가 좋아할 것 같군요."

"그럼 저건......"


그렇게 놀고 먹다가 2주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새 다음날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마지막날은 호텔의 디너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김독자도 오랜만에 턱시도를 입으며 한껏 차려입고 파티장 앞에서 유상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페르세포네가 골라준 우아한 검정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유상아였다. 곳곳에 박힌 작은 큐빅들 덕분에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이 옷에 대조되어 신비로운 특징을 살리고 있었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마녀, 또는 사악한 왕비가 떠오르는 비주얼이었다.


김독자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저 어때요?"

"잘 어울리십니다."

"후후, 독자씨도 잘 어울리세요."


서로 팔짱을 끼며 나란히 걷고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웨이터에게 샴페인을 건네받고 둘은 건배했다.


술이 들어가자 조금 후덥지근 해졌다.


"설마 샴페인 마셨다고 취하시는 건 아니겠죠?"

"크흠... 그정도로 술에 약하지는 않습니다."


김독자는 시선을 돌려 옥상의 난간에 기대 야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조화를 이루며 아주 멋진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유상아도 그의 옆에 기대서서 한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런것도 나쁘지 않죠?"

"네. 평생 모르고 살뻔 했어요."

"다음에는 사람들과 다같이 와요."

"물론이죠."


김독자는 슬쩍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유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유상아의 눈은 여러가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고마움, 기쁨, 후련함 그리고......그 다음은 도저히 모르겠다.


옥상 파티장은 시끄러웠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비행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

"......"


둘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착각일까, 유상아의 몸이 천천히 김독자를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독자도 그에맞춰 유상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2주일동안 그녀와 지내면서 아주 가까워졌다. 평소의 고민을 말하고 옛날이야기를 들으며.....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어쩌면.


"......상아씨."

"네."


그 사이에 이런 감정이 생겨버린 걸지도 모른다.

줄곧 외면해왔던 감정.

아닐거라고 무시해왔던 감정.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혀있던 그 감정.


"상아씨는 혹시...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있어요. 독자씨는요? 독자씨도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그러나 김독자는 어딘가 불안한 눈빛이었고, 유상아는 확신에 가득찬 눈빛이었다. 김독자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독자 컴퍼니 안에 있습니까?"

"네."

"그 사람은 지금 한국에 있습니까?"


유상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한국에는 없지만 꽤 가까운 곳에 있어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제 눈앞에 있을수도 있죠. 독자씨가 좋아하시는 분은 어디에 있나요?"

"......제 눈앞에 있습니다."


유상아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더욱 김독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김독자도 그런 유상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알싸한 샴페인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몇 초, 아니 몇 분이었을까 정확한 시간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그 감정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유상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독자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풉..."

"큭...큭큭"


그렇게 바라보다가 어째선지 웃음이 빵 터졌다.

모여든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푸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후아, 좋아해요. 독자씨."

"저도 그렇습니다. 상아씨."


유상아는 다시 활짝 웃은 다음 김독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파티는 계속 하시겠어요?"

"저는 이런 파티는 안 어울립니다만......상아씨와 단 둘이서 하는 파티는 재밌을 것 같군요."

"어머......그럼 파티장소를 옮겨야 하겠네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김독자는 유상아의 손을 잡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둘의 얼굴은 조금씩 붉어져만 갔다.


"크,크흠...다 왔습니다."

"흐흠...들어가실까요?"


김독자의 방문이 닫히자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유상아가 그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농담을 던졌다.


"......이렇게 되니까 꼭 마왕에게 납치당한 공주가 된 기분이네요."

"그런가요? 납치라는 말은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유혹 당했다고 할까요?"

"그게 좀 더 나을 것 같네요."


김독자는 하나뿐인 침대에 유상아를 눕혔다. 그리고 상의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어머나......"


그리고 누운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상아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유상아는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아아아!"

"마왕을 우습게 보면 안되죠."

"......네?"


유상아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밤은 깊었고 시간은 많았다.


.

.

.


다음날 아침, 유상아는 자신의 몸 곳곳에 이설화의 금창약을 바르고 있었다.

김독자의 이빨자국은 금창약에 서서히 사라져갔다.


"......제가 음식도 아니구......이게 뭐에요."

"맛있긴 했습니다만......"

"크흠......단어 선택 좀 예쁘게 해주세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저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엄청 비싸보이던데요?"


유상아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어젯밤, 김독자가 찢어버린 그녀의 드레스가 있었다.

우아하던 드레스는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도 이해해 주실겁니다."

"못 말려요. 정말......그럼 이제 슬슬 짐을 챙겨볼까요? 공항까지 거리가 꽤 있잖아요."


김독자는 유상아의 허리춤을 붙잡고 매달려있었다. 그런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다시 팔을 감아왔다.


"상아씨. 정말 거리가 문제 될 것 같습니까?"

"...네?"

"저 김독자입니다."


김독자는 허공에 코인을 띄우더니 작은 포탈을 만들었다. 코인을 이런 곳에 함부로 쓰다니...유상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거리는 해결되었군요. 아쉽게도 시간은 늘리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알던 독자씨 맞아요?"


유상아가 되묻자 김독자는 싱긋 웃으며 '마왕화'를 시전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구원의 마왕입니다만."

"......내가 못 살아 정말."

"그저 같이 있고 싶었다고 말해드릴게요."

"깨물지나 말아요. 방금 다 나았어요."


유상아와 김독자는 다시 몸을 포개었다. 체크아웃을 하라는 로비의 전화가 걸려올때까지 쭈욱.


그 날 비행기에서, 둘은 아주 깊은 잠을 잤다.


.

.

.


"어서와요!"

"아저씨! 내 선물은?"

"다녀오셨습니까!"


인천 국제 공항에서 나오자 밖에는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읏차....집나가면 고생이라더니."

"...틀린 말이 없죠. 옛말은."

"많이 즐거우셨나 봅니다."

"즐거웠어요. 엄청."

"여러가지 의미로 말이죠."


김독자의 장난에 유상아가 그를 살짝 노려봤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감지한 이지혜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나도 알려줘!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에!"

"흠흠, 어른들의 일은 몰라도 되."

"상아언니!"

"지혜야, 가끔은 모르는게 약이란다."

"치....."


이번엔 조수석에 앉은 정희원이 무언가 눈치챈건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두분? 아니죠? 상아씨! 혹시 독자씨가!"

"하아..."

"이런..."

"두분...집에 가면 잘 설명해야 할거에요."

"엥? 희원언니? 무슨 일인지 알아요? 나도 알려줘요! 현성 아저씨도 뭔지 알죠!"

"어, 크흠, 흠...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선 무슨 일인지 도저히 갈피를 못잡겠는 지혜와 홍조를 띄운 이현성, 눈살을 찌푸리며 김독자를 바라보는 정희원, 그리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김독자와 유상아까지.....


어째 집에 가면 더욱 피곤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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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독상으로 대회 올림, 분량은 1만자 조금 넘음

한번에 1만자 넘는 거는 처음이네...

암튼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