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륵, 사르륵.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그에 맞춰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밤.
밝은 보름달이 굽어보는, 공단의 광장 한 가운데.
달빛을 조명 삼아, 그곳에서 김독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목에는 예쁜 팔찌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파트너와 맞잡은 손을 따라, 이리저리.
부드럽게 허리를 감싼 손으로 빙그르르.
흐드러지는 듯 보였지만 당당하게.
동작은 격정적으로 변하고 움직임은 점점 빨라진다.
이윽고.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안무가 끝나고, 파트너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상아색 코트만이 독자의 손에 쥐어져 있을 뿐, 양쪽 소매를 맞잡고 코트와 마주본 독자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스르르 흘러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상아씨."
다시한번, 축 늘어진 코트에게 인사한다.
그 상아색 코트가.....
유상아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미안합니다."
독자는 상아의 코트를 품에 끌어안고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어깨가 지금 그의 아득한 슬픔을 알려주고 있었다.
독자는 충혈된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끝이 없이 펼쳐진 아득한 밤하늘, 무수히 많은 별들이 달 주위에서 놀고 있었다.
자신이 1863회차에서 돌아오기 일주일전에, 유상아는 소멸했다.
소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존재의 삭제.
독자는 너무 늦어버렸던 것이었다.
"올림포스......"
독자는 이를 갈며 분노에 가득 찬 말을 짓씹었다.
"그곳에서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의 목을 직접 가지러 가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독자는 진언을 퍼뜨렸다.
[그것에 나 김독자는 존재맹세를 걸겠다.]
존재맹세, 그 단어가 지금 독자의 결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맹세에 거는 것은 존재.]
마침내 존재맹세를 끝마친 독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상아의 코트가 밤바람에 나풀거렸다.
"밤바람이 생각보다 쌀쌀하군요.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독자는 마치 상아가 살아있는 것처럼 코트에 말을 걸었다.
"상아씨."
당연히,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독자는 아랑곳 않고 연신 상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걷다보니 일행들이 머무르는 건물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엔.
김독자 컴퍼니 사람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는 당황하며 상아의 코트를 재빨리 개어 아공간 인벤토리에 넣었다. 독자는 행여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진 않은지 확인했다. 그런 그때.
"빨리 와라, 김독자. 꼭두새벽부터 뭐하는 짓이냐?"
한수영의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독자는 뜨끔하며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잠시 산책 좀 하느라......"
독자는 애써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슬픔이 달빛에 비쳐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이제 그만해라."
입을 연것은 유중혁이었다. 중혁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아니."
독자는 중혁의 말을 끊었다.
독자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나....머릿속에서 상아씨 목소리가 계속 들려. 꿈에서 항상 상아씨가 나와. 밥 먹을 때도, 시나리오 할때도, 지금 이 순간에도."
독자는 숨을 골랐다.
"상아씨의 목소리가......나에게 말을 걸어와. 근데 그게......나를 미워하는 목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그래서......"
독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독자는 상아가 남긴 유서를 몇번이고, 몇십번이고 읽었다.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상아는 독자의 귀환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로, 끝까지 그를 믿어달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난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아. 그러니까......어떻게 그만하겠어."
독자는 마치 이곳에 없는 상아에게 잘못을 비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코를 훌쩍이거나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사랑해요, 독자씨......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실거죠?」
독자가 이계의 언약을 맺기 전 들었던 상아의 눈물섞인 고백이었다.
"이게 내 속죄야......"
독자는 발걸음을 옮겨 일행들 사이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묵묵히 길을 비켜주었다.
"......반드시."
얼핏 독자의 분노에 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
.
[설화, '은빛 팔찌의 추억'이 담화자의 부재로 침묵합니다.]
"......저도 알아요, 상아씨."
독자는 팔찌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시커먼 시체의 산 위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래도......약속은 지켰어요."
폐허가 된 올림포스 신전.
낭자한 핏빛 설화.
그리고 잘린 십여개의 머리.
모두 독자의 손에 죽임을 당한 올림포스의 12주신들이었다.
[괜찮은가? 구원의 마왕.]
[......수고했어.]
그의 뒤로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처음부터 올림포스의 뜻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성좌들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가족의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뭐......]
디오니소스는 어깨를 으씩이며 빈정거렸다.
[이제...갈거냐?]
"네, 돌아가야죠."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그대 가는 길이 언제나 순탄하기를.]
[그대에게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신들의 축복.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에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자는 꾸벅 인사하고는 날개를 펼쳤다.
.
.
.
광화문 광장 한 가운데.
이곳에 월하현제 유상아의 제단이 있었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두고, 독자는 이곳을 찾아왔다.
화사한 미소를 짓고있는 영정사진.
지금 당장이라도 저 미소가 현실로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독자였다.
"상아씨. 그곳은 어때요? 평화롭고 조용한 곳인가요? 아니면 따뜻하고 활기찬 곳인가요?.......하하, 상아씨 맘에 쏙 드시겠군요."
그 영정사진을 보며 자조적으로 미소를 짓는 독자였다. 한동안 애처로운 자문자답이 계속되었다.
"상아씨. 저......이만하면 잘 해냈죠?"
당연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질문이 마지막이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걸음을 움직이는 그때.
「네, 정말 고생하셨어요. 독자씨.」
상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독자는 흠칫 놀라며 상아의 제단을 바라봤지만......역시나 그곳엔 영정사진 뿐이었다.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상아씨."
독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처음들린 상아의 대답에 만면으로 미소를 지었다.
"응원해주세요. 마지막도 잘 해낼 테니까요. 그럼."
독자는 주먹을 불끈 쥐곤 기자회견 장으로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