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 딸리는 건 감안해주셈
그리고 독자 여남운 써 주면 이어서 쓸게
"흠... 여기 어디임?"
어두운 방에 묶여있던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등에 있는 날개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는 에덴의 성좌였다.
"드디어 당신에게 당했던 빚을 갚을 수 있게 됬군요"
높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응답했다.
그녀가 말한 내용으로 짐작하건데, 그녀는 복수에 성공해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했다.
"님 누구임?"
"그 특이한 말투는 여전하군요, 젋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고혹적인 목소리에, 묘하게 상대를 깔보는 듯한 존댓말, 그리고 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성좌라면...
"아... 님 아스모데우스임?"
"풋.. 에덴의 천사가 밧줄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것도... 꽤나 재밌는 광경이군요"
아스모데우스라 불린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밧줄 정도는 그냥 끊어버리면 됨"
남자의 인영이 발버둥치기 시작했으나, 단단하게 고정된 밧줄은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에덴의 고위급 천사의 힘으로 끊지 못하는 밧줄이 있다는 것에 당황한 그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뭐야? 이거 왜 안 끊겨?"
"푸하핫 당황해서 컨셉도 포기하신 건가요? 라파엘"
"그건 글레이프니르입니다. 끊을 수 있을 리 없죠."
아스모데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글레이프니르, 북유럽 신화에서 펜리르를 묶을 때 사용했다는 이 밧줄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성유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글레이프니르라면, 어차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꽤나 철저하게 준비한 건 알겠음. 그래서 난 왜 납치한거임?"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오점이 되었던 그 사건을 잊었다는 듯 말하는 라파엘의 목소리에 분노하며 대답했다.
"그야... 당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죠. 당신에게 당했던 그날의 치욕을 값기 위해서!"
"마왕 중에서도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제가 물고기 쓸개를 태운 연기에 쫓겨나다니... 그런 치욕을 겪고 가만 있을 순 없죠"
"끄덕. 그럼 어떻게 복수할거임?"
라파엘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듯 무심하게 물었다.
순간 당황한 그녀가 생각을 하다 말했다.
"음... 자세한 건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군요"
라파엘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정정하겠음. 님 사실 좀 많이 허술한 것 같음. 제일 중요한 부분만 빼놓고 준비해놓으면 어떡함?"
"그... 그러는 당신은 제 계략에 넘어가 잡혀있는 주제에!"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성좌들 간의 대화라기엔 유치한 면이 있었다.
"? 나는 그냥 게임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쓰러졌더니 여기 있던 것 뿐. 기습한 님이 비겁한거임."
"저는 마왕입니다. 굳이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필요는 없죠."
"ㅇ. 님이 정면승부할 용기는 없다는 건 알겠으니까 게임기나 주셈. 이번에 새로 나온거 마저 깨야함.
라파엘의 태연한 대답에 아스모데우스는 격분했다.
"당신... 지금 저에게 납치되어있는 상태라구요? 뭐가 그렇게 당당한거죠?"
"그리고.. 정면승부할 용기가 없다니요? 좋아요. 지금 당장 다시 싸워보죠"
아스모데우스가 화를 내자 라파엘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 에바임. 의술의 천사에게 뭘 기대하는거임?"
"성흔으로 성좌들을 찢어버리는 님이랑 내가 어케 싸움? 그냥 게임기나 주셈"
그러자 아스모데우스가 소리쳤다.
"하? 그때 저에게 몰아챴던 그 광풍은 '의술'인 걸까요?"
광풍이 몰아치던 전장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라파엘의 눈빛은, 마왕이라도, 아니 그와 적대하는 마왕이었기에, 트라우마가 될 정도였다.
라파엘이 손을 턱에 대고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았다.
"아 그거...? 서기관이 시켜서 한 거임. 님 정도 마왕한테 유효타를 줄 정도로 바람을 일으키려면 기력이 다 빠져서 안 됨. 그때 물고기 쓸개 연기 없었으면 내가 졌을 거임."
아스모데우스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대천사는 지금 귀차니즘에 빠진 컨셉충일 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하아... 흥이 깨지는군요"
[포도주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표절의혹을 제기합니다]
"하아... 맥이 빠지는군요.."
아스모데우스가 실망하고 있을 동안 어떻게 한 것인지 라파엘은 도깨비 보따리에서 산 것으로 추정되는 격투게임을 하고 있었다.
몸이 묶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컨트롤러를 힘겹게 들고 게임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이렇게까지 할까? 라는 의문이 든 아스모데우스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흐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재밌나요?"
라파엘은 아스모데우스를 보고 씩 웃더니 같이 하면 더 재밌으니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꽤 호기심이 많은 편에 속하던 아스모데우스는 이것은 게임을 통해 저 대천사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게임을 시작했고,
"으윽... 반칙이에요!"
완패했다.
"뭐가 반칙이라는거임? 묶인채로 게임하는 나도 못이기는 님 실력이 반칙인 듯 ㅋㅋ"
"하...한판 더 해요! 이제 감 잡았다구요!"
하지만 감을 잡은 쪽은 아스모데우스가 아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을 잡은 라파엘은 그녀를 도발했다.
"아 그럼 이거 먼저 풀어주셈. 공평하게 해야 될 거 아님? 아니면 공평하게 해서 이길 자신이 없는거임?"
그리고 그 도발에 넘어가고 만 아스모데우스는 라파엘을 풀어줬다.
라파엘은 재미있기도 해서 아스모데우스와 조금 더 놀아주기로 결정했다.
전적은 37:0
아스모데우스는 이를 갈며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 모습을 본 라파엘은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비웃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자신이 느낀 감정이 분명 비웃음은 아니었다고 느낀 라파엘은 의문에 휩싸인 채 에덴으로 올라갔다.
다음에도 놀러오겠다는 한 마디를 던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