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그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분노한 성좌들의 표적이 되어 쫒기게 되자, 내가 그의 앞에 섰을 때. 왜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느냐고. 정녕 그 현상금이 필요하지 않느냐 라 묻는, 비열했던 오래 전의 나를 알고 있는 듯한 기이한 질문. 그 질문을 그 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자의로 따른 대장을 버리는 부하가 어디 있느냐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나도 그러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가 없던 3년이 지나고 돌아온 그가 진실을 말하자, 눈치 없던 나는 그 이상한 질문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나는 그가 읽던 소설의, 비열한 악역이었으니. 그가 읽던 소설 속의 나는 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도망쳤고, 강한 자가 두려워 약자를 죽이려 했다. 어떤 소설에 의지하여 살아오던 한 소년이 마음껏 원망하기 위해 존재할 뿐인, '악'이라 손가락질 받을, 그런 최악의 인간.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남을 짓밟고 죄책감 조차 느끼지 않은, 그럼에도 겁은 많아서 쌓였던 원망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며 마주하려 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온기를 원했던, 결코 해피엔딩이 허락되지 않을, 곧 죽어버릴 조연에 불과할 뿐인 그런 악역.
단지 그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 얄팍한 이유로 나는 그런 길을 걸었다. 그를 만난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고, 그 소설 속의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인데, 그 최악의 인간은 과연 내가 아닐까.
"...대장?"
그런데, 그 최악의 인간은 아직도 뻔뻔히 숨을 쉬고 있는 데. 당신이 살렸던, 당신을 대장이라 부르며 따르는, 당신에게 거두어진 비열한 사람은 살아있는 데. 그런 사람도 살아가는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당신은 어째서 죽으려 하는가. 왜 자신을 기만자라 부르며 속죄하려 애쓰는 건가.
"...미안해."
내가 듣고 싶어했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뭐가 미안한 건데?"
용서할 사람이 없는 데, 어째서 그는 용서받으려 하나. 잘못 한 것도, 미안해야 할 필요도 없는 데.
도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아니 다시 묻자, 왜 미안하다는 거야? 우리가 소설 속의 인물인데, 그 소설을 읽어서? 혼자서만 모든 걸 알고 있어서?"
"..."
"그래서 혼자 독식하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혼자서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했을 뿐인 것에 대해서,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가. 애시당초 사람은 무언가를 읽고 정보를 얻지 않는가. 그가 읽었던 책에 이 세계가 서술되어 있었을 뿐이고, 그래서 알게 된 정보를 이용했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옳지 않은 행동이고 속이는 행동이라는 건지.
"그냥, 어떤 소설을 읽었을 뿐이잖아. 단지 그 소설에 정보가 많았을 뿐이고, 그 정보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잖아."
그러니 당신을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설령 당신을 원망하는 이가 있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당신이 스스로 느끼기에 최악이라 느껴져도 죽으려하지 마라. 당신보다도 더 최악인 인간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발, 속죄한답시고 멋대로 죽으려하지말라고."
거부당하며 뿌려쳐지던, 그 손을 잡아주었던 것은 당신이었고 나는 그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당신을 버리려 하는 건 오직 당신 뿐이다.
"혼자서 떠나려 하지도 말고, 네가 살렸으니 끝까지 책임져."
정녕 속죄를 하려 한다면 떠나려 하지마라. 당신이 살린 목숨이니 당신이 끝까지 책임져라.
나는 그 지하철에서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이렇게 도망치려 하지마라.
그렇게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바꾼 이 이야기도 끝까지 읽어라.
"그리고, 그 잘난 결말 꼭 봐. 그 결말 때문에 지금까지 버틴 거 아냐? 네 기준대로 속였다고 쳐, 그러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뭔지 잊지마."
"포기하면서 도망치려 하지마라고. 나는 도망치려 하는 패배자를 대장으로 둔 적 없어."
"안 포기해."
지하철에서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모두가 버린 한 소녀를 버리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그래, 이래야 대장이지."
내가 봤던 당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라.
내 손을 잡았던 그 날, 내 삶의 목적은 당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