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사랑.

양분되고, 절대 결부될 수 없는 아프고도 아름다운 두 감정은

999회차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의 이야기의 상징이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유중혁과 함께 999회차 세계의 시나리오를 주유해가면서,


그녀는 유중혁이 지었던 미소를 떠올려 보았다.


일행들에게 항상 우아하고 아름답게 지어보였던 떫은 미소.


그 미소는 기쁨따위를 내비추지 않았다.


미안함, 죄책감, 배덕감.


그 떫은 미소는 999회차 우리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을 내비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그 장면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선을 저버리고서라도 세계선을 넘어 기필코 은밀한 모략을 쳐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한 그날,


황홀한 빛으로 저물어가는 유중혁의 육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암담한 불꽃을 튀기며 사랑을 고백했던 그날,


그 특유의 떫은 미소를 보이며 999회차 일행들에게 '살아남아라'라고 간신히 유언을 내뱉은 그 장면을 말이다.



그 이후, 그녀와 남은 999회차 일행들은 유중혁의 마지막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 이 이야기의 결을 펼쳤다.


하지만, 장대한 이야기의 벼랑에 선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끝의자격'을 얻은 그녀에게 드러난 그녀의 ■■ .


[당신의 ■■ 은 '증오'입니다.]



수많은 마왕조차 가려버리는 그녀의 찬란한 빛이 해질녘 노을의 색으로 저물어갔다.


아,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의 끝이구나.


그토록 가슴시리고 아팠던 우리의 이야기가 결국 비극으로써 마무리되는구나.



그녀의 두 날개가 분노로 물들었다.


감당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서 퍼져나오는 불꽃들이 유중혁을 찾기 위해 살아움직였다.


더 이상 그녀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위대한 이계의 신격이 되고난 후, 그녀의 모든 순간은 증오를 연료로 불탔다.


재앙으로써 수많은 세계선을 불태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흐트려놓아도


그녀의 증오는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불꽃은 영원히 유중혁을 찾기 위해 세계선을 넘나들었다.


감히 헤아릴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그녀의 불꽃은 유중혁을 찾아내었다.


- [너를 찾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1863회차의 유중혁.]

- [나의 세계를 망친 외신이여.]


마침내 절망으로 물든 그녀의 불꽃이 은가이 숲을 불태워버리고,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불꽃은 은밀한 모략가를 불태우지 못했다.



동쪽에서 피어오르는 '살아있는 불꽃'은 이 세계선의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마주했다.


찰나같은 순간, 머릿속에서 마치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것 처럼 3회차 세계선의 기억이 그녀에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저 가냘픈 김독자라는 한 인물이 그려낸 그들의 설화는


999회차에서 그들이 쌓아온 설화들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래도 좋았다.


아득히 오랫동안 펼쳐진 긴 세월동안, 그녀의 모든 설화들은 이미 증오로 불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녀의 설화들을 불태웠던 증오의 대상이 이 세계선에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은밀한 모략가를 쳐 부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녀가 <재앙>이 되어 김독자 컴퍼니와 마주한 순간, 그녀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져갔다.


분명, 지금쯤이면 희생되었어야 할 존재들이 자신의 설화를 뽐내며 그녀를 공격해왔다.


나약하지만 분명 제 빛을 내는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은, 그녀가 여태껏 수많은 세계선을 불태우면서 볼 수 없었던 설화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999회차 일행들이 가슴아프게 걸어온 이야기와 비슷했지만, 분명 어딘가 다른 점이 존재했다.


딱 한 걸음.


최후의 벽까지 부족했던 딱 한 걸음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존재했다.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혼란은, 저 너머 보이는 딱 한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종결되었다.


[흑천마도]에서 분명히 뿜어져 나오는 아득한 격.


그녀는 태평양을 가로지는 유중혁을 쫓았다.



세계선의 원수가 눈 앞에 있다.


내가 사랑하던 남자의 목숨을 앗아간 외신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1863회차의 힘을 사용하는 유중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세계선 하나를 부숴먹었을 검격을 내뱉었다.


타오르는 염화 속, 아득하게 솟아오르는 저 혼돈의 격을 지금 당장이라도 베어넘기고 싶었다.



유중혁을 향해 한껏 제 몸을 부라리던 불꽃들이 사그라들었다.


계속해서 복수심으로 불탔던 그녀의 설화들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득한 저 혼돈의 격 속에서, 그의 격이 느껴졌다.



일행들을 위해 자신의 눈과 사지를 아낌없이 희생했던 그 사람.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단 한 사람.



"설령 이 세계의 끝이 비극이라고 해도·····  너희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말하고 싶다. 그를 불러 다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묻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던 유중혁 속에는,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유중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유중혁을 보며 그녀는 깨달았다.


스타스트림은 이야기다.


유중혁은 천 개가 넘는 세계선을 넘나들며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왔다.


그토록 비극적이었던 999회차 세계선의 이야기는, 결국 유중혁이 이 세계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였을 뿐


유중혁이 그들에게 보냈던 지독한 희생은, 그저 고달픈 회귀 속에 죄책감으로 행한 자기위로였다는 것을,


결국 유중혁이 세계의 끝을 맞이하는 세계선은, 999회차가 아닌 1864회차라는 것을.



그녀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이미 오래전에 불타버린 두 눈이었지만, 그래도 분명 그녀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 우리가 아닌지, 왜, 왜, 왜, 대체 왜 우리가 아닌지.


그녀가 1864회차 세계선의 이들에게 보낸 마지막 재앙은 의문이었다.


왜 우리가 아닌 너희여야만 하는지,


서로의 비극을 겨루는게 무슨 소용이 있다한들, 왜 최악의 비극을 감싸안은 우리가 아닌지를,


그녀가 보낸 재앙을 막아내는 김독자를 보며 살아있는 불꽃은 해답을 얻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 마침내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했다.


그녀의 증오는 더 이상 은밀한 모략가를 향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내던진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아니었다.



이 세계를 비극으로서 꿈꾼 세계의 흑막, '가장 오래된 꿈'.


그러나, 그 꿈은 그녀의 불꽃이 향하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비좁았다.


그 소년은 너무 무력하고 연약했다.



"나의 신이여, 너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왔건만. 너는, 이 우주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구나."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의 진짜 마지막이었다.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떤 보상도, 기적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닌 '살아있는 불꽃'으로서 다시 마주한 '끝의자격'.


그녀에게는 또다른 ■■ 가 피어올랐다.



[당신의 ■■ 은 '사랑'입니다.]



증오와 사랑.

양분되고, 절대 결부될 수 없는 아프고도 아름다운 두 감정은

999회차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의 이야기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