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이는 여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썼다.

독자하영이긴 한데 달달한 장면이 많지는 않음.

그리고 개인 설정이 포함되어있으니까 참고.

마왕 선발전 끝난 시점임. (+ 우리엘 근신처분 안 당한 설정)



"흐으응······."


나는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내가 항상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때 즈음이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벌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는 여전히 졸린 눈으로 김독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김독자는 손을 마주 흔들어줬다.


그러자,


팟-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잠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재빨리 김독자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똑같이, 김독자는 그저 김독자였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기억을 떠올렸던 거지.


"잘 잤어?"


떠오르지도 않는 거 보면 별 기억 아니겠지.

나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니, 안 좋은 꿈 꿨는데."

"무슨 꿈이었는데?"


······무슨 꿈?

무슨 꿈이었지?


"몰라, 기억 안나. 근데 되게 기분 나쁜 꿈이었어. 아니, 마지막은 조금 후련했나?"

"······기억 안 난다니 다행이네. 그럼, 밥 먹으러 나와."

"응."


쾅.


김독자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유난히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조금만 더럽혀져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듯 한.


*


나는 방에서 나와 밥을 먹으러 걸어갔다.

식탁에는 아일렌과 김독자의 일행들이 나를 맞이했다.


"잘 잤어 하영아?"


아일렌이 생긋 웃으며 아침 인사를 했다.


"김독자는?"

"아침 안 먹어도 된다면서 어디 나가던데?"


무슨 일이 있나?

평소엔 항상 같이 먹었는데······.

하긴, 시나리오 준비 같은 것도 해야되겠지.


*


12시가 지나갈 무렵, 나는 공단으로 돌아왔다.


"김독자!"


장하영을 비롯한 일행들이 나를 맞이해줬다.


"어디 갔다 왔어요?"


정희원이 내게 물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눈치였다.


"그냥, 비밀입니다."

"뭐에요, 그냥 그런 말로 넘어가기에요?"

"하하..."


그렇게 말해도, 정희원은 넘어가주려는 눈치였다. 별 일 아닐거라 생각하겠지.

아직까진 일행들에게 말 할 수 없다. 특히 장하영에게는.


나는 따로 장하영을 불러냈다.


"왜 불렀어?"


나는 장하영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그마한 얼굴, 커다란 눈망울.

찰랑거리는 금발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자그마치 유중혁의 뺨을 두 번 갈길만한 외모. 멸살법에서도 이런 묘사를 해주는 인물을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실패한 귀환자.」


자기혐오, 게으름, 나태.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 때가 있었고. 그런 때가 더 많았다.


「너 가만 든 인 물이 잖 아.」


······안다.

내가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댓글만 남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범하게 지구에서 시나리오를 깨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이 끔찍한 세계에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김독자?"


······정신차리자.

나 때문에 장하영이 불행해졌다면, 이제부터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된다.

그게 몇 번이라도.


"응, 6시 즈음부터 시간 돼?"

"나야 남는게 시간이지. 왜?"

"어디 놀러가기라도 할까 싶어서."

"······응?"


당황한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그냥, 최근에 힘들었으니까. 숨이라도 돌리러 가자고."

"······내가 왜 너, 너랑 같이 가?"

"내가 구원의 마왕이라서?"

"······"


고개를 숙여서 표정은 제대로 안 보였지만,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싫으면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갈까······."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럼, 갈거야?"

"······응."

"그래. 그러면 6시에 공원에서 만나자."


장하영은 다시 일행들 사이로 돌아갔다.

언뜻 봐도 밝아진게 눈에 보였다.

장하영은 이렇게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구나. 새삼 다시 느낀다.

······행복하기만 하면 좋을텐데.


*


"······정말 오랜만에 휴식이네."


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해당 발언에 동의합니다.]


우리엘도 마찬가지겠지.

이 평화가 좀 지속되면 좋으련만.

그 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독자 씨?"

"안녕하세요, 희원 씨."


내게 인사를 건넨 김독자의 미소는, 내가 아는 미소가 아니었다.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가 아니라, 뭔가. '보여주기 식' 미소 같았다.

조금, 불안해졌다.


"잠깐 시간 되세요?"

"네, 안 될 건 없죠."

"그럼, 잠시 자리를 옮기죠."


*


우리는 김독자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용 스킬, '음파 차단 Lv. 7'이 활성화됩니다!]


음파 차단까지?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누구에게도 얘기해선 안 됩니다. 적어도 제가 허락할 때까지는."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의 얼굴엔, 더 이상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언젠가 한 번 본 표정이었다.

김독자가 아니라, 유중혁에게서.


"그리고 거기 계시는 우리엘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좋아요."


김독자는 그렇게 말하곤 창 밖을 바라봤다.

나도 그 시선을 좇아 창 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불안했다.


"희원 씨, 새 신발을 사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네?"

"사람들은 이미 더럽혀진 옛 신발은 잘 신고 다니지만, 산 지 얼마 안된 새 신발은 혹여나 더럽혀질까 애지중지하는 성향이 있죠."


김독자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 향해 있었다.


"그 말은, 새 신발일수록 더럽혀지기 쉽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제 김독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화로울수록, 위험에 당하기 쉽다는 소리죠."

"······ 무슨 소리에요?"

"이제부터, 얘기해드리겠습니다."


*


오후 6시.

나는 공원에 나와있다.


"언제 오는거야······."


그 순간, 저 멀리 누군가 보였다.


"김독자!"


나는 멀리 보이는 김독자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일찍 나와 있었네?"

"아니······ 그냥, 뭐."


······내가 왜 변명하려고 하고 있는거지.


"늦는것보단 좋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좀 걸을까?"


김독자와 함께 공단을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면서 거리에 보이는 공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 처음 봤을때보다 되게 밝아진 것 같다."

"그런가?"


확실히, 웃을 일이 더 많아지긴 했다. 욕 할 일도 줄어들었고.

아마 전부 김독자 덕분이겠지.


"근데, 왜 만나자 한거야?"

"말했잖아. 잠시 숨 좀 돌리자고."

"정말로?"

"······정말로."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김독자와의 시간을 그냥 즐기기로 했다.

아니, 그, 좋다는 건 아니고.


"근데, 오늘 옷 이쁘게 입고 나왔네."

"아, 그······."


······조금 차려입은건데, 그렇게 다른가?


"그, 그냥 외출복인데?"

"그으래?"


김독자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


"그럼 그런거고."


그렇게 웃어넘겼다.

분명, 방금 나한테 '이쁘다'라고······.


"손?"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개냐?"

"싫음 말고."

"······왜? 갑자기?"

"······그냥."


나는, 김독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해.


*


김독자와 함께 공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처음 보는 곳으로 왔다.


"여긴 어디야?"

"그냥, 아무도 없는 곳."


집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 넓은 초원이었다.


"이런데가 있었나?"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아마, 없었을 걸."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풀이 자라난 땅에 앉았다.


"너도 앉아."


나는 김독자 옆에 앉았다.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초원에 드러누웠다.


"장하영."


김독자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왜?"

"너는······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어?"

"······응."

"지금은 어때?"


······


"······행복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에 맞춰, 김독자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화, '은막의 혁명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공단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두, 나와 김독자가 연관된 설화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의 나는, 꽤 즐거웠다.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도 내 곁에 드러누웠다.

우리는 누운채로,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 


······뭔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돌렸다.

김독자가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아으.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때가 됐다.


"장하영, 일어나봐."


내 말에 장하영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왜?"

"잔말 말고, 얼른."


장하영은 투덜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시계 있어?"

"응, 항상 차고 다니는데."

"한번 확인해줘."


장하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6시······  63분?"


본디 읽을 수 없는 시간.

시계의 특성상, 6시 63분은 7시 3분으로 보여야 정상이다.

'네모난 원'처럼, 글로만 표현할 수 있는 시간.


"아일렌, 왔군요."

"네."


장하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로 날 쳐다봤다.


"뭐, 뭔데? 지금 이 상황?"

"장하영."


나는 장하영의 어깨를 잡고, 정확히 장하영의 눈을 바라봤다.


"여기 있어."

"왜? 뭐 할려고?"

"그냥 여기 있어주면 돼."


나는 아일렌을 쳐다봤다.


"부탁합니다. 아일렌."


아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 무슨 상황인데?"


아직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미안해.


"나, 나도 도울 수 있어! 지금 하려는게 뭔지는 몰라도..."

"그래, 너는 이번에도 날 분명 도울거야."


나는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장하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김독자의 신형을 바라볼 수 밖엔 없었다.


"왜······."


무서웠다.

별 일 아닐수도 있지만, 너무나 무서웠다.

마치, 마치······.


"크윽······."


장하영은 자신의 입술을 짓씹었다.


"김독자 이 개새끼야!!!"


왜 자신을 두고가는지.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그런 의문들을 욕으로 승화시킬 뿐이었다.


"하영아."


아일렌은 장하영의 어깨를 잡았다.


"이게, 독자 씨의 선택이야."


장하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


나는 쭉 걸어, 훨씬 더 드넓은 평야로 나아왔다.

그곳에는, 정희원이 있었다.


"오셨네요."

"지금 시간은요?"

"65분이에요."


틱.


"······66분."


6시 66분.

급격히 하늘이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라는 표현보단, '더렵혀진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존재가 출현합니다.]


어떤 기분일까, 수천년만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가 세상을 쳐다봅니다.]

[절대선 계통 성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절대악 계통 성좌들이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모든 성좌들이 두려움에 떱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마지막 전쟁을 준비합니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떨게 만드는 존재.

그런 존재는 정말 몇 안되는 존재들뿐이다.

그 중에서도······ 아마 최강.


[누군가가 세상에 현현합니다.]


그저 이름으로만, 이름조차도 아니지. 대명사로만 불려왔던 존재.


[마왕, '지옥의 최초의 군주'가 눈을 뜹니다.]


72마왕중에서도 1위, 수천 년간 승천해 있었던, 

'바알'이다.


*


파지직- 파지지직-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개연성 폭발의 징조가 눈에 보였다.


"······오랜만이군."


[모든 성좌들이 강한 적개심을 표출합니다.]


"아주 날카롭게 날이 서셨군······."


그렇게 말하며 바알은 끌끌 웃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은 그렇다 치고,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도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넌."


바알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하, 하하, 하······."


잠시 바알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벌써 4번째인가."


······역시, 알고 있군.


"행운을 비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

"······뭐, 그럴 수 있겠지."


옆에서 정희원이 날 툭툭 쳤다.


"저게 진짜 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악마에요? 외관은 되게 평범해보이는데요."


그렇게 작게 소근거렸다.

솔직히, 외관은 평범하긴 했다.

그냥 왕관을 쓴, 기분나쁘게 생긴 늙은 청년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안다. 분명 저것은 우리를 멸절시키고 안 그래도 멸망한 세계를 다시 멸망시킬 것이다.

아직 그것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개연성의 스파크가 강해지고 있었다.

손가락이라도 튕기면 대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는 현재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개연성에 위반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


그렇다는 건, 개연성의 저울은 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현현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현현합니다.]


······30번 시나리오도 도착하지 못한 시점에서, 가장 오래된 선과 악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 폭풍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개연성의 저울이 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겠지.

······대체 바알은, 얼마나 강한걸까.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이지."


아가레스와 바알 사이에 조그마한 신경전이 흘렀다.


"내가 다시 이 땅에 내려오면 무슨 짓을 할지 말 해줬었는데, 기억하는가?"

"물론."

"그래······."

"······그 때 이유는 듣지 못했었는데, 물어봐도 되려나?"


바알은 끌끌 웃었다.


"내가 세계를 부수려는 이유라······"


바알은 왕관을 고쳐 쓰며 말했다.


"······'전지(全知)'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나쁜 건 아니겠지."

"아니, 이건 저주라네."


바알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래······ 전지를 얻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마냥 즐거웠지."


······지금 공격하면, 죽일 수 있을까.


"음, 구원의 마왕. 자네의 세계에선 '복권을 맞은 상황'이라고 할까."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처음엔 재미있어, 이 지식을 어디다 쓸지. 누구에게 자랑해볼지. 이걸로 무엇을 해볼지."

"그런데?"

"······흥미를 잃은거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건 안 해봐도 알겠고."

"······"

"모든 걸 해보고 나니까. 모든 걸 알고 나니까. 삶에 낙이라는게 없어진거야."

"고작······ 그런 이유에서?"

"남의 고민을 '고작'이라는 단어로 치부하는 건 좋은게 아니야. 그 사람에게는 꽤나 치명적인 고민일 수도 있다네."


실제로 바알의 얼굴은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원래부터 그랬나.


"나도 처음으로 이럴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어. 결국 나도 '가장 오래된 악'으로써의 이야기를 행해야 할 뿐이니까."


[설화, '마계의 군림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악의 시작이었으니.」


그 말에 맞춰 바알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계에선 그 누구도 그에게 대적하지 못하더라.」


'마계의 군림자'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설화다.


"그러나, 결국엔 모두 지루해지더군. 모든 걸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바알은 이내 다시 끌끌 웃었다.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쉬고 온 거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결국······ 이 모든게 다, 질려버렸거든."


[마왕, '지옥의 최초의 군주'가 격을 발산합니다.]


눈부시게 튀는 스파크.

마치 태양의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관리국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청합니다!]


······관리국이 심사를 요청한다라.


[마왕, '지옥의 최초의 군주'가 해당 요청을 묵살합니다.]


······허, 

이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오려 한다.

관리국의 요청을 묵살한다?


[강제집행 시퀀스에 돌입합니다.]

[마왕, '지옥의 최초의 군주'가 거부합니다.]


펑!


그와 동시에, 짧지만 강렬한 개연성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바알은 조금 그을려 있을뿐, 큰 타격은 없는 듯 했다.

진짜 미쳤네······.


[관리국이 경악합니다!]


······그러곤 아무런 말이 없다.

비상 회의라도 들어갔나.


눈부시게 비치는 개연성 폭풍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데도.

바알은, 상당히 태평해 보였다.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로 우리에게 점점 다가왔다.

그 가공할 격에, 나와 정희원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직 꽤나 멀리 있는데도 무릎을 꿇을 정도면, 가까이 가기만 해도 격에 짓눌려 죽고 말겠지.


쾅.


그래도, 아직은 패가 남아있다.


[성좌, '타락한 구원자'가 현현합니다.]


"······메타트론."

"미카엘이여."


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은 아마 마지막이 될 겁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타락합니다!]


"······압니다."


순식간에 새하얀 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새까만 날개가 피어올랐다.

머리 위로는, 뾰족한 뿔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왕, '타락한 천사들의 왕'이 '지옥의 최초의 군주'를 응시합니다.]


최초로 성유과를 먹은 천사.

유일하게 선과 악의 힘을 동시에 쓸 수 있는 미카엘이, 진짜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관리국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니. 어지간히도 바쁜가 보다.


이성을 반쯤 잃은 미카엘이 바알을 향해 달려갔다.

바알의 '격'에도 굴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마왕화'를 한 미카엘은, 가히 신화급 성좌에 비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미카엘,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모순의 천사여."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선은, 악을 멸하기 위해 악의 길을 택했으니.」


"그대는 악으로 악을 멸하려 하고 있구나."


마치 시를 읊는 듯한 바알의 말투.

타락한 미카엘을 앞에 두고 저렇게 여유가 넘칠 수 있는 악마는, 바알 뿐이지 않을까.


「그의 진체를 본 악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미카엘은 검을 뽑아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슈아악!


하지만, 크게 검을 휘두르는 소리만 들릴 뿐.

바알의 모습이, 사라졌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라······, 내가 그 첫 예외가 되는건가."


어느새 바알의 신형은 미카엘의 배후를 잡고 있었다.

바알은 투명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미카엘은, 바알의 손을 피했다.


"······어느정도는 하는군."


그것은, '본능'이었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본능밖에 남지 않은 미카엘이, 살기위해 피한것이다.

잡히는 순간 끝이라는 직감.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군."


순식간에 바알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건 투명화가 아니다.

단순히, 그의 움직임이었다.


"커헉!"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은 미카엘의 신형이,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땅에 떨어진 미카엘은, 마치 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맷집은 부족하구만."


바알은 장난감 들 듯이 미카엘을 들어올려, 미카엘의 신형을 내팽겨쳤다.


"크흐억!"


아니, 내리꽂앚다.

땅에 박히다시피 한 미카엘은, 칠공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화급 성좌에 준하는 미카엘이, 저렇게나 쉽게 당한 단 말인가.


"이게 끝은 아니겠지?"


다시 한번 몰아치는 개연성 스파크의 범람.

여전히 바알은 태평했다.


"······설마."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솔직히, 많이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그 땐 진심이 아니었던 건가.


"봉인구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버텨줄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을때까지······ 해보죠."


그렇게 말해도 내가 버티는 건 아니지만,

지금쯤이면 열릴 때가 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열렸군.

'그레이트 홀'.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73번째 마계를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이젠 나도 계획이 없다. 이번엔, 준비가 부족했다.

그 때.


"이것, 내가 잠시 쓰지."


바로 옆에서,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옆을 쳐다봤지만, 다시 사라진 후였다.

내 부러지지 않는 신념과 함께.


순식간에 바알의 신형은 쏘아지듯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곤, '그것'과 싸우고 있었다.

너무나 멀어 제대로 볼 순 없지만, 분명히 싸우고 있었고. 호각을 겨루고 있었다.

경이로운 수준의 움직임.

단순 검술을 놓고 보았을때, 누구든지 존경할 만한 실력이었다.

바알 앞에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을 내밀 수 있는 생물이 있을까.

방금 막 잡은 검으로, 이계의 신격과 호각을 겨루고 있다니.


그리고 그 기세는, 점점 압도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바알의 신형에도 상당한 피해가 가해진 것 같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베어냈다.


"······아무래도 이 작전을 하기엔,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어쩔거지?"

"전면전밖엔, 없을 거 같군요."


나는 숨겨뒀던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꺼냈다.

꽤 무겁네, 유중혁은 어떻게 이런 걸 휙휙 휘두르고 다닌 거야.


그리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잡아냈다.


턱.


하늘에서 바알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바알 뿐.


바알의 이곳 저곳엔 상처가 보였고,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대 설화, '최초의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


······


이기지 못하더라도, 해야 한다.

더 나은 다음을 위해. 나아가야만 한다.


"······정말로?"


뒤에선 메타트론과 아가레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려왔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테니."

"······그래. 그럼······."


아가레스가 궐련을 꺼냈다.


[성흔, '괴력의 한 개비'를 발동합니다.]


퍼억.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놀랍니다!]


"크허억······."


메타트론이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결국, 저 방법을 선택한건가.


메타트론의 복부가 꿰뚫려 있다.

그런 메타트론을 내려다보는 아가레스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됩니다.]


들을 순 있지만.


「꼭······.」


"······꼭, 막아주시길······."


「······막아주마.」


메타트론은, 그렇게 소멸했다.


['가장 오래된 악'이 '가장 오래된 선'을 살해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악'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아가레스는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무념무상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레스의 격이 상승한게 살로 느껴졌다.

바알과 1대1을 할 만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가레스의 성흔을 활용하면 어느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오래된 선'이 새로운 적임자를 찾습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택합니다!]


······다행이다, 다른 성좌에게 가지 않아서.


"희원 씨.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맡겨 줘요."


[전용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발동에 찬성합니다.]


'심판의 시간'.

사용 대상과 잠시나마 능력치가 동등해지는 스킬.

이 스킬을 사용하는 한, 지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화신, '정희원'의 격이 너무나 낮아, 힘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심판의 시간' 발동 시간이 대폭 줄어듭니다.]

[화신체 손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크으읏······."


고통스러워 보이는 정희원의 몸부림.


"우리엘. 희원 씨를 도와주십시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격이 화신 '정희원'에게 깃듭니다.]


"하아······ 하아······."

"······싸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후우······ 물론이죠."


이제 조금 나아졌는지, 칼을 바로잡으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걸 시켜서는 안되는데."

"무슨 소리에요? 전 당신의 검이라고요."


정희원이 내 옆구릴 툭 쳤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죠."


······아마,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정희원도 그걸 알고 있겠지.

하지만, 꼭 그렇게 만들고 말거다.


그리고 이제, 답장이 올 때가 되었는데.


[관리국이 당신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관리국의 설화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그래, 승낙해야겠지.

이 긴급한 마당에, 관리국은 오랫동안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별로 한 건 없다.

단지, 내 격을 신화급으로 승격시켜달라는 말을 비형을 통해서 했을 뿐이다.


내게 남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아마 관리국에서 도박을 해본 거겠지.


[당신의 격이 상승합니다!]

[당신은 신화급 성좌가 되었습니다!]


"후우······."


전신으로 격이 타고 오르는게 느껴졌다.

신화급 성좌라는 건 이런 느낌인가.

마치, 모든 걸 해볼 수 있는 기분이었다.


"재밌는 짓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여전히, 바알은 버거운 상대로 보였다.

오히려 격이 더 높아지고나니, 그의 격을 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인물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1번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그래도 나는, 나의 방식으로 싸울 것이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심판의 시간 Lv. 10(+2)」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넘쳐 흐를 것 같았다.

응축된 힘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준비는 끝났느냐?"

"그래."


나 대신 아가레스가 대답했다.

아가레스는 입에 물고 있던 세 궐련을 뱉어냈다.


"······이건 쓸 생각이 없었는데."


[성흔, '만능의 한 개비'를 발동합니다.]


"너희도 필요하냐?"


그렇게 말하며 아가레스는 우리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남은 궐련 둘은, 아가레스가 물었다.

독하다.

평소에 담배를 펴 봤어야지.


[성흔, '만능의 한 개비' 효과로 모든 스탯이 크게 상승합니다!]


생각보다도 큰 폭으로 상승하는 것 같았다.

이미 수치는 표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스탯이었지만, 그래도 체감할 수 있었다.


[성흔, '죽음의 한 개비'를 발동합니다.]


"······이건, 너희는 쓰지 마라."


「'죽음의 한 개비'는, 궐련이 타기 전 까지 사용자의 스탯을 배로 올려주는 성흔이다. 그리고 그 궐련이 전부 타게 되면,」


······죽게 된다는 거겠지.

안 들어도 알겠다.


「김 독자 내 말 끊는 다.」


"바알에 관한 건 없어?"


「본디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으나, 그 설화가 잊혀져 악마로서 다시 태어난 존재.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졌으며, 마술과 투명화를 다룰 줄 아는 마왕.」


이미 아는 것들 뿐이군.


"그래도 고맙다."


「기록 된 게 없 어.」


그래, 멸살법에서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뭘 꾸물대고 있나?"


바알은 끌끌 웃었다.


"보채지 말라고, 이제 정말 끝났으니까."


자, 정말 시작이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하늘은 어느새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김독자는, 김독자는······.


"······가고 싶어?"


그렇게 나에게 묻는 아일렌의 표정도, 김독자를 걱정하는 듯 했다.


"응······."


아일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김독자가 간 곳.

어둠으로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볼래?"

"응?"


아일렌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우리 공단을 구해주신 분이야."

"······"

"그리고 너를 바꿔주셨고."


아일렌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가 봐."

"······정말?"

"정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간다?"

"응."


나는 기쁜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단지,"


그리고 잠깐 멈칫했다.


"독자 씨가 위험하면, 지켜줘."

"······응."


차분하게, 걷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을 향해서.


*


"허억······ 허억······."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까지의 교전으로 알아낸 것은, 우리의 공격은 분명 유효타가 된다는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달려간 아가레스가 날린 주먹으로 그 사실을 알아냈다.


아가레스의 주먹을 맞은 바알의 신형이 조금이나마 하늘을 날았고, 바알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우리들의 검격도, 충분히 데미지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 사이, 우리도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젠, 서로 스치면 치명타인 수준이다.


"······많이 강해졌구나."

"그래······ 지금까지 논 건 아니니까."


서로 녹초가 되어버린 바알과 아가레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스치면 치명타다. 알고 있겠지?"

"······그래, 그렇게 되었구만."


바알은 그렇게 말하며 칼을 바로 잡았다.


이제부턴, 


슈악-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바알이 칼을 휘둘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굴러 피했다.


······이제부턴, 한 치의 방심도 금물이다.

피할 기력도 아껴야만 한다.


"독자 씨가 왼쪽, 제가 오른쪽으로 갈게요."

"내가 전면전을 맡지."


이젠 모두가 지쳐버린 상황이다.

이번 한번으로, 어떻게든 끝낸다.


타앗-


검을 꺼내든 나와 정희원이 아가레스 양 옆에서 바알을 향해 달려갔다.


"이걸로 끝이다, 바알."


아가레스는 그대로 달려가 주먹을 내질렀다.

가뿐하게 피한 바알이 말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아니, 끝일거야."


나와 정희원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바알의 배후를 잡았다.

그리고 칼이 아닌,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미카엘!"


['저지먼트 필드'가 발동됩니다.]


"크흑······?!"


우리의 주먹에 맞은 바알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정확히 그 자리에, [저지먼트 필드]가 펼쳐졌다.


[저지먼트 필드], 멸마의 공능.

타락한 미카엘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

실날같은 정신을 붙잡고 있던 미카엘은, 이 스킬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하하······."


그것이 바알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퍼걱.


······그랬어야만 했는데.

아가레스의 심장이, 꿰뚫렸다.


"허억······."


아가레스의 신형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무슨······?!"

"단순한······ '마술'이지."


······너무 물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침착했으면.


"뭐······ 어차피 궐련도 다 타가고 있었으니······."


아가레스는 마지막으로 날 쳐다보았다.


"맡긴다······."


그렇게, 아가레스는 소멸했다.


그리고, 책갈피의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희원 씨······."


정희원은, 쓰러져버린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젠, 어떡할까요."

"아직······ 남은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단은 아니지만······."


저 멀리서, 장하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


내가 도착하고 본 광경은, 대천사의 시체 두 구와, 악마의 시체 한 구였다.

그리고, 어떤 악마와 대치하고 있는 정희원과 쓰러진 김독자가 보였다.

김독자가 정희원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더니, 정희원이 악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곤, 꽤나 격한 칼부림이 시작됐다.


"김독자······!"


나는 김독자에게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묻고 싶은게 많았다.


"장하영."


하지만 김독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냥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김독자를 껴안았다.


"······뭘 울고 그러냐."


눈에서 흐르는 눈물방울이 멈추지 않았다.


"흐윽······ 대체, 대체 왜······."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이······ 이 바보야······."


김독자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그리곤 정희원을 일별하더니, 말을 꺼냈다.


"날 돕고싶어?"

"응······ 어떻게든."

"그럼, 내가 부르는 성좌한테 연락해봐."


나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누구?"

"■■ ■■■ ■."


······필터링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나는 연락을 보낼 수 있었다.

분명, 꿈에서 들은 수식언이었다.


[성좌, '가장 오래된 꿈'이 연락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너를 회귀시켜달라고 해."

"······어?"

"말 그대로야."


······회귀를?


"걱정은 마. 아마 오늘 아침으로 회귀하게 될거야. 그리고 너는 이 모든 걸 그저, 꿈이라고 생각하게 될거야. 기억나지도 않는, 단순한 '악몽'으로."


오늘 아침의 그 이질감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 일도 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은 내가 받게 될거야. 실질적으로 회귀하는 건 내가 되는 셈이지."

"······내가 회귀하는 게······ 그게 어떤 도움이 되는데?"

"이걸, 다시 해야지."


김독자의 몸은 전체적으로 그을려 있었고, 곳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보였다.

각 사지가,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왜? 왜 이런걸 다시하려고?"

"막아야 하니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올라왔다.

그게 누구를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니까, 그니까 그걸 왜 너가 하려고 하냐고······."

"······"

"남들은 다 꺼려 하는 그런 일을, 왜 다 너가 도맡아서 하려 하냐고오!!!"


그래서 엄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아마 가장 마음 고생이 심할 사람은 김독자일텐데.


"너는······ 너는 진짜로 이걸 다시 하려는거야?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통스럽다고 포기했을거라면, 김독자는 이 모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리라.

그걸 알기에,

그래서 이 짓을 다시 할 것을 알기에,

그리고 난 그걸 막을 수 없는, 막아선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없어 하영아."

"······"

"······미안해."

"······마지막으로, 손 잡아줘."


김독자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너무나 잔혹하게도, 따뜻했다.

손이 따뜻한건지, 피가 따뜻한건지 모르겠지만서도, 확실히 따뜻했다.

정말, 정말 놓고싶지 않은데.


[성좌, '가장 오래된 꿈'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회귀가 시작됩니다.]


"김독자."

"······응."

"좋아해."


김독자는,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내가 널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


나도 같이 마주 웃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말 밝게 웃을 수 있는 김독자를 상상하며.


*


8시 30분, 장하영이 늘 일어나는 시간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컥.


장하영이 비몽사몽한채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역시, 지금 일어났군.


팟-


······?

뭔가, 이상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


[성흔, '회귀'로 인해 기억이 전승됩니다.]


······그렇구나.

이번이 다섯 번째인가······.

아직 그 녀석 따라가려면 멀었네.


적어도, 1863번은 해봐야겠지.


팟-


그리고, 모든 게 돌아왔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잘 잤어?"


나는 장하영에게 물었다.


"아니, 안 좋은 꿈 꿨는데."


다행히,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슨 꿈이었는데?"

"몰라, 기억 안나. 근데 되게 기분 나쁜 꿈이었어. 아니, 마지막은 조금 후련했나?"

"······기억 안 난다니 다행이네. 그럼, 밥 먹으러 나와."

"응."


······그 해맑은 얼굴, 꼭 지켜줄게.


쾅.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이번엔, '부유한 밤의 아버지'께 먼저 가볼까.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네.

설정 하나 추가하는데도 존나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더라.

단편으로 쓰려니까 뭔가 존나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한번 소설 작가님들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다음은 독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