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광기 요소 있음
김독자는 가끔 그 때를 회상한다.
자신이 없던 몇 년간,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리하게 수명을 깎은 유상아를.
그리고 마주한 그녀의 죽음을.
사실 그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상관 없을 만한 것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난 날 밤, 김독자는 유상아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유상아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줬으니까.
"상아 씨.. 왜 안 오는 거지? 어디 사고라도 당한 건가?"
김독자는 손톱을 불안하게 물어뜯었다.
파박- 하고 붉은 선혈이 튀고, 손에 맺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독자는 휴대폰을 꺼내 유상아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상아 씨.'
'상아 씨.'
'상아 씨?'
'상아 씨.'
'상아 씨 상아 씨 어디에요? 왜 전화 안 받아요? 어디냐니까요? 이젠 제가 싫어진 거에요? 그러지 마요, 나 정말 죽어버릴 거야. 빨리 그러니까 대답해요. 어디에요? 어디냐고요. 문자 읽어요. 빨리.'
희게 빛나는 휴대폰의 액정에 상처난 김독자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붉게 퍼졌다.
너무도 불안하게,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던 김독자의 눈 앞에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전 괜찮아요, 독자 씨. 또 자해하고 계신 건 아니죠?'
'상아 씨.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왜?'
'미안해요, 이따가 다 설명할게요.'
그 후로 문자는 끊겼다.
유상아로써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정부측 인사로서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 바쁜 그녀는 현재 김독자의 집착을 받아줄 만한 상황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상아 씨?'
'상아 씨.'
'죽은 거 아니죠?'
'상아 씨.'
'연락 받아요.'
'빨리.'
그러나 유상아는 문자를 읽지 않았다.
점점, 김독자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가빠오기 시작했다.
온 몸의 땀이 비 오듯 흘렀고, 눈동자조차 어느 한 곳에 고정되지 않은 채 불안하게 덜덜 떨려왔다.
"허억.. 헉.. 하아.. 헉.."
"야 김독자! 너 괜찮.. 너 손가락에 피 나잖아!"
김독자의 방에 들어온 한수영이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거칠게 털어낸 김독자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날개를 펼쳐 어딘가로 날아갔다.
*
"휴우.."
미국 측이 까다롭게 군다.
사실 어이가 없는 건 유상아뿐만이 아니였다.
그녀와 같이 회담을 하러 나온 모든 화신들이 그러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모든 화신이 그러했다.
화신법을 제정하겠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미국은 비협조적이고, 믿을 건 일본이나 중국인가. 일본에는 아스카 씨가, 중국에는 페이후 씨가 계셔서 괜찮은데."
유상아는 잠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독자 씨가 커피를 잘 마셨지.
미국까지 왔으니까 수제 커핏가루라도 하나 사 갈까.
"상아 씨.."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독자 씨? 여기 오면 어떡해요! 성좌는 출입 금지라고 했었잖아요."
화낸다기보단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유상아가 누군가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거기에 반쯤 꺾인 날개에 부러진 뿔을 한 김독자가 서 있었다.
척 봐도 위중하게 다친 상태.
"독자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쳤어요?"
그의 손에는 피묻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쥐여 있었다.
위태롭게 미소를 지은 김독자는 유상아에게 보여주듯 자신의 배에 그 검을 억센 손아귀로 찔러넣었다.
너무나도 똑똑히 뜬 눈은 그녀를 응시한 채, 김독자는 자리에서 털썩 쓰러졌다.
푸욱-
파육음과 함께 붉은 선혈이 비산했다.
유상아는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독자 씨..?"
"의료팀! 의료팀! 신원확인 결과 대한민국의 신화급 성좌, '구원의 마왕'이다!"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고, 김독자는 곧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 상황에서, 유상아만이, 마치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겪었을 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하는 의문만이 그녀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괜찮을 거야.. 하는 맹목적인 믿음에 가까운 확신이.
*
"다행히 설화 구성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꽤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워낙 불안정한 화신체여서 말이죠.."
"아.. 일단 경과를 지켜보면 되는 건가요?"
"곧 의식은 깨어날 겁니다.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보호자분이 잘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렇게 의사가 떠나고 나자, 유상아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김독자의 손을 잡았다.
긴 속눈썹을, 흰 피부를, 흐트러져 있는 흑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독자 씨.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요?"
당연히, 김독자는 답이 없었다.
"난 독자 씨가 좋아요. 줄곧, 저를 구원해줬으니까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줄곧. 탕비실 사건 기억해요? 그때 탕비실 감시 당번 독자 씨였는데, 절 모른척 해 줬잖아요. 후후, 그 땐 왜 그렇게 독자 씨처럼 되고 싶던지. 사실 수명을 깎아가면서도 성흔을 사용했던 건 독자 씨를 대체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기 때문이고요. 물론 이제 다 끝났지만. 독자 씨, 사실 저 알아요. 왜 독자 씨가 그렇게 저한테 신경 쓰는지."
유상아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 진솔하지만, 혹여나 김독자가 들을까 최대한 좋은 언어로 순화하며, 정말 유상아답게.
"그 일 때문이겠죠. 환생한 일이요. 알잖아요, 저 이제 어느 곳도 안 간다는 거. 그러니까 좀 편하게 살자구요. 독자 씨가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마다.. 이렇게 혼자 자해할 때마다.. 너무 미안해요. 저도 알고 있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동료가 사라진다는 그 감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유상아의 눈에선 어째서인지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잠시 자리를 비운 유상아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수영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야, 김독자 이 새끼 너 찾겠다고 갔는데, 봤어?]
[네, 지금 저랑 있어요. 무슨 일을 당하신 건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시더라구요.]
[그 자식.. 진짜 미친 놈이..]
유상아의 손 끝이 자판을 넘나들며 한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수영 씨, 그래도 독자 씨 사람은 좋은 ㄱ..]
휙-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 달라붙었다.
그 감각에 휙 몸을 돌린 유상아의 눈에 비친 것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한 껏 미소를 머금은 김독자의 얼굴이었다.
머리가 이상해졌다며, 유상아의 생각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횡설수설하던 김독자는 이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치켜들었다.
"아프진 않을 거에요, 상아 씨. 잠시 기절만 시키는 거니까.."
유상아의 휴대폰이 툭 떨어졌고, 채 완성하지 못한 문자만을 화면에 띄운 채, 그렇게 유상아는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조차 그쳤다.
화면에는 메시지 로그가 떠 있었다.
[야 유상아, 말을 똑바로..]
[유상아?]
[김독자 방 문 따고 들어가 봤더니..]
[사진 첨부]
그 사진 안에는, 피로 쓰여진 유상아의 이름이 즐비한 김독자의 방의 전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 휴대폰을 쥐어들며 눈을 감고 있는 유상아에게 말했다.
"상아 씨, 이것 봐요. 저랑 상아 씨 사랑의 증표에요."
그렇게 구원의 마왕은, 진짜 '마왕'이 되었다.
"그러니까 절대.. 절대.. 떠나지 말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