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이 뜨거웠다.
그리고 미칠 듯 아팠다.
그 안의 누군가가, 그 자신의 몸을 찢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듯한 느낌.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저항합니다.]」
「[화신, '유중혁'의 모든 설화가 죽음에 저항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유중혁이 알지 못하는 기억들이 우후죽순 범람했다.
그리고, 한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냈을 때에야 그는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허억!'
눈을 뜨자마자 마치 튕겨나오듯 유중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센 그의 팔 안쪽에는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링거에 이어진 팩 안에는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든 링거액이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올리며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이불을 치웠다.
"앉아 있어요."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언제 와 있었는지, 이설화가 희고 짧은 머리칼을 새침하게 휘날리며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이틀 만에 깨어난 사람이 또 어딜 가려고요."
"가야 한다. 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오라버니!"
유중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미아가 이설화의 등 뒤에서 쪼르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눈이 붉게 부은 얼굴이, 울음기가 선명했다.
자신 또한 당황한 상황이었음에도 유중혁은 유미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유미아의 조그만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울지 마라. 나는 괜찮다. 학교는 어쨌나."
"설화 언니가 데려다 줬어요."
유미아는 이설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이설화는 자신이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하고는 유중혁에게로 다가왔다.
잠시 그를 오묘한 시선으로 바라본 이설화는, 이내 그의 팔뚝에 꽃혀 있던 링거팩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링거팩을 갈아 주었다.
"미아야. 나가서 독자 아저씨랑 밥 먹고 올래?"
이설화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유중혁은 가서 김독자와 밥을 먹고 오라고 넌지시 말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미아는 병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문 밖에서 자상한 목소리의 김독자와 유미아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우와, 오징어 아저씨다."
"가자 미아야. 뭐 먹고 싶어?"
"으음.. 만두랑.. 닭칼국수요."
"그래, 그럼 그거 먹으러 가자."
잠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유중혁은 아직도 자신 앞에 이설화가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황급히 정자세를 취했다.
28년의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병원.
흰 배경, 정돈된 분위기와 은은히 풍기는 소독약 냄새.
그는 새삼스레 이런 곳이 병원이구나,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왜 은퇴한 거에요? 전에 들어보니까 아직도 엄청 잘 치시던데."
이설화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내가 듣기엔 만족스럽지 못하다."
".. 흐음, 완벽주의자셨구나. 저도 그런데. 왜, 있잖아요. 남이 보기엔 칭송해 마지않을 실력이지만, 내 자신에게는 조금도 대단하지 않은 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완벽주의자랑은 좀 다르네요."
"이상주의자."
사실 유중혁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이상주의도, 완벽주의도 아니였다.
태어나 너무나 완벽하고 빼어나, 절대 다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너무나 거뜬히 해내는 압도적인 재능의 소유자.
그런 그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니 모두가 그를 완벽주의자라고 보는 것이다.
유중혁은 그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만.
"후후, 이상주의자라.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어떻게든 해결시키고야 마는 남자. 불굴의 의지와 끈기를.. 아니, 이 이야긴 그만두죠. 어쨌든."
"너는.. 너는 마치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잘 알죠."
그는 눈 앞의 이설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현기증이 일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유중혁은 이설화가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머리카락을 잘랐군. 몰라볼 뻔 했다."
"여전히 몰라보고 계세요."
"알아봤다."
유중혁은 한 마디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이설화는 그런 유중혁의 태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맥박을 재기 시작했다.
펄떡 펄떡-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생기있게 보여주는 그의 맥박.
그런데 맥박계에 표시되는 심박수는 80에서 100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건.. 부정맥이 있는 건가."
그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이설화는 맥박계를 치우고 그의 눈에 라이트를 비췄다.
순간적인 빛에 유중혁이 눈쌀을 찌푸리자, 그것마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짓고선 그의 홍채 반응을 기록지에 기록했다.
유중혁은 자신도 모를 충동에 휩싸여 이설화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어저께 널 본 것만도 같다."
"착각이겠죠. 그 시간대에 저 여기서 일하고 있었.."
"내 집. 오전 1시 21분. 커핏가루 꺼내다가."
그러자 이설화는 잠시 멈칫하더니, 슬프게 말했다.
"그리웠어요. 아주 많이.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쑥쓰러운 듯 얼굴을 돌릴 것만 같고, 근데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걸 알기에. 마음이 아프고 그러네요."
어느샌가, 그녀의 말을 듣던 유중혁의 얼굴에도 아련하게 그리움이 스쳤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놀란 유중혁은 떠나려는 이설화의 팔을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름답게 반원을 그리는 눈.
우윳빛의 뽀얀 피부색.
눈처럼 아스라이 빛나는 하얀 머리칼에, 눈 속에 핀 붉은 꽃 같은 입술까지.
".. 저기."
아름다웠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자기 자신도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안하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아, 아니에요. 그럼 전 다른 환자분들도 봐야 해서요."
하고 이설화가 급히 병실을 떠났다.
유중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