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김독자가 한수영한테 이별 선언한 상황
*
"야 김독자. 그래서 할 말이 그거야? 갈라서자고? 그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말이야, 너한텐?"
아무 말도 없이, 아까부터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김독자.
그런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한수영은 소리쳤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또 그 지랄맞은 몰카였다, 이러지 말고! 속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발.. 사람 불안해지게 왜 그러는 건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수영아.."
"씨발.. 그러면.. 후.. 그러면 이유라도 알자. 까일 땐 까이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될 거 아니냐고."
아무런 변명 없이 방을 나가려는 김독자의 어깨를, 한수영이 탁 잡았다.
그늘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마치 며칠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피폐한 몰골이었다.
흠칫, 놀란 한수영이 김독자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 미안해, 알려줄 수 없어."
"뭐하자는 건데. 이유도 안 알려주고 헤어지자는 게 도대체 어딨냐고.."
한수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에서 혹여나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적어도 김독자 앞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었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2주년 때 좀 늦은 거?
아니면 자주 안 하는 거?
근데 그건 내가 먼저 하자기엔 너무 부끄럽.. 애초에 남자가 좀 리드해야지..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독자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할 만한 껀덕지가 없었다.
조급해진 한수영은 설화까지 사용해가며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설화, '가장 오래된 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가장 오래된 꿈'이 설화, '예상표절'을 일시적으로 차단합니다.]
"야, 김독자 너!"
김독자는 어째서인지 한수영의 설화를 차단한 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그대로 나갔다.
지금껏 단 한 번 보았던 진지하게 정색한 김독자의 얼굴에, 한수영은 차마 그를 붙잡고 따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한수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다리를 모으고 팔로 감싸안은 후, 그녀는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언니, 울어요?"
신유승이 쪼르르 달려와 한수영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감이 좋고, 남의 변화에 민감한 아이인만큼 그녀의 변화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이었다.
하지만 신유승은 겨우 14살에 불과한 중학생.
그녀의 속마음을 털어놓기에는, 그리고 설령 속마음을 털어놨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안 울어. 그냥 잠 좀 자는 거야."
"거짓말. 어깨 들썩이는 거 다 봤어요. 목소리도 울음기가 선명한데요. 독자 아저씨랑 헤어졌어요?"
".. 그런 거 아냐."
한수영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신유승은 이내 이길영의 이름을 외치며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 뒤로 꽤나 오랫동안 누구도 한수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유중혁과 정희원, 이현성은 대 화신 특수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유상아는 외교를, 이지혜와 이길영, 신유승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한 이설화는 의사 일을 지속했고, 장하영은 허구한 날 술 마시러 다니느라 집에 자주 있지 않았다.
공필두와 한명오는 나잇대는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의외로 취향이 비슷해서 서로 한 아우, 공 형 하며 낚시를 자주 갔기에, 집에는 한수영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배고파."
컵라면이라도 끓이려다, 한수영은 폰에 울리는 카카오톡 소리에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 장하영: 한수영 한수영
- 장하영: 사진을 보냈습니다
- 장하영: 이거 김독자 같은데? 이 나쁜 새끼 다른 여자 만나고 있음
장하영이 보낸 사진 안에, 한수영이 잘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와 긴 속눈썹.
정말로 김독자의 얼굴이 보이자, 그 배신감에 한수영은 순간 폰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욕을 중얼댔다.
"이 새끼가.."
그 이후로 한수영은, 거칠 것 없이 김독자의 방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서랍을 뒤졌다.
화도 났지만 그것보단 믿고 싶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을.
자신에겐 말하지 못할, 그만이 알고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울먹이며 한수영은 서랍을 뒤졌다.
"아니겠지.. 그 새끼 그런 새끼 아니잖아.."
김독자 방의 서랍에서는 여러 서류철이 나왔다.
98번 시나리오의 파훼법 - 1
99번 시나리오의 파훼법 - 최종 수정본
은밀한 모략가 - 정체 추측
베다의 움직임에 관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한 김독자의 그 피를 쏟고 뼈를 깎는 노력이, 문서들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미친 듯이 서류철을 뒤지던 한수영의 손에, '우리 수영이'라는 제목의 파일이 하나 잡혔다.
<우리 수영이>
수영이는 레몬 사탕을 좋아한다. - 2021 10 / 25
수영이는 귀엽다. - 2021 10 / 26
그냥 귀여운 게 아니라 존나 귀엽다. - 2021 10 / 28
너무 귀엽다. - 2021 10 / 29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귀여울 거다. - 2021 11 / 3
그냥 장난식의 파일인가 했는데, 막상 넘겨 보니 그것은 약간 일기같은 것이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똑같은 내용이 몇 번이고 계속 반복된다는 것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중구난방해지고 이리 저리 다른 쪽으로 튀는 필체.
순간 소름이 돋은 한수영은 파일을 휙 덮었다.
"설마.. 그 소설 속에만 나오던 얀데레인지 뭔지, 그런 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이럴 때가 아니였다.
만약 정말 김독자가 그런 류의 비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위험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였다.
한수영은 잠시 휴대폰을 쥐고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뭔가 나름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어차피 차인 마당에, 다른 사람들 구해주는 셈 치자.
그렇게 한수영은, 김독자 컴퍼니의 여성들만 모여 있는 단톡방에 톡을 보냈다.
- 한수영: 오늘 밤 11시, 내 방으로 모여. 긴급히 이야기할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