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독자.
어려서는 부모님을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왔으며,
학생 때는 또래 친구들한테 맞고 다녔고,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소설이나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희망이란 존재했다. 나를 사랑해주고, 또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존재.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우리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해피엔딩만을 앞두고 있었다.
헌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된 걸까.
잠깐 피로함에 눈을 감고 뜨자, 나는 사람 한명이 겨우 몸을 가눌만한 기둥 위에 누워있었고, 내 앞에는 흰색 망토로 온 몸을 가리고 얼굴만을 내보인 어떤 존재가 있었다.
"...여긴?"
[반갑구나.]
"...당신은 누구죠? 나는 왜..."
[이름 김독자. 사망 나이는 28살에 사인은 어릴 때 영양 공급 부족으로 인한 불치병.]
순간 소름이 내 등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죽은 겁니까?"
이제서야 행복해지고 있는데. 이제서야 좀 행복해지겠다는데.
"신이... 죽음이 뭐라고!"
[신은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대는... 그래, 그저 운이 좀 안 좋았을 뿐.]
"왜 나만 운이 안 좋은건데... 왜... 나는 행복할 자격도 없는거야?"
앞에 있던 사람, 아니 무언가가 입에 짙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분명 너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렇기에 나는 네게 기회를 주려한다.]
"...무슨?"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죽음이겠지. 나는 네게 죽음을 피할 기회를 주마.]
앞에 있던 존재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내 내 앞에 화면 세개가 나타났다.
[이 중에 가장 불쌍한 자는 누구인가?]
온 몸에 멍이 든 채로 비오는 거리에 주저앉아 빗소리에 숨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와,
이미 온 몸이 엉망임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소설을 읽는 학생과,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변변찮은 일거리도 받지 못하고 회사 곳곳에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들으며 살아가는 회사원.
그리고 나는 이내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이 중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누구인가?]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내 앞의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볼 뿐.
"...2번, 2번입니다."
[왜지?]
"아빠한테 맞는건 괜찮았습니다.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회사에서 저런 소문을 들으며 사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신경쓰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왜 2번째는?]
"저 때의 내게는... 기댈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 고통을 견디려면 무뎌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기에 슬픕니다. 저 미소가, 저 태연함이 얼마나 아픈건지 아니까...!"
내 앞의 존재는, 내 말을 듣더니 입으로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1번째 장면의 길거리에 있는 돌맹이를 가리켰다.
[저것이다.]
"...예?"
[저 존재는 그저 저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밟히고, 차여지고, 애꿎은 침에 맞으며 살아갔다.]
"저게 뭔가를 느낄 수나 있습니까? 나도 차라리...!"
[너에겐 기회가 있었지. 저 돌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조차 없었다.]
내 앞의 존재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너보다 행복한 자들을 탓하며 좌절하지 마라. 너처럼 불행한 존재는 이 우주에 넘치고도 넘칠지니.]
"그게... 그게 내가 불행해야 할 이유는 아니잖아요..."
그 존재가 이내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잘못되었다는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너에게는 저 돌과 달리, 행복을 향해 나아갈 기회가 있었다."
전에 듣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몸 속을 울리는 목소리와 달리, 따뜻하게 내 전신을 감싸안아주는 듯한 목소리.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내일의 여명을 볼 수 있다면 너는 무얼 할 것이냐?"
시험하는듯한 목소리.
"나는..."
머릿속에 단 한 명의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웃으며 하루를 보낼겁니다."
[...좋다. 그 정도야.]
순간 내 전신에서 번개가 치듯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뜨자, 내 시야에 그녀가, 한수영이 보였다.
"어, 일어났..."
"...수영아..."
내가 한수영을 꼭 끌어 안자, 한수영이 징그럽다는듯 나를 떼어냈다.
"징그러, 김독자."
"...사랑해."
그리고 일어나서 한수영의 비축분 소설을 담당자에게 보내버린 후, 그녀의 손을 잡고 시내로 놀러갔다.
한참을 놀고 배가 고파질 때 즈음, 비싸지는 않지만 맛있는 단골집으로 찾아가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서는 영화를 한 편 봤고, 영화를 보고 약간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어느새 시계를 보자, 시간이 자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11시 58분.
"오늘 재밌었다! 다음에 또 놀러오자."
"...돈은 생각 안 해?"
"내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한수영이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나도 그녀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항상 사랑해, 수영아."
"... 뭔데? 오늘 왜 그래? 어디 가서 안 돌아올 사람처럼..."
"내게 너는 기나긴 어두운 터널의 끝에 있는 환한 빛이었어."
이제서야 빛을 마주했다. 이제서야 출구에 다다랐다.
"너무 미워하지는 말..."
"뭐야, 왜 쓰러져. 취했냐?"
나는 말을 끝맽지 못했다.
[최후의 하루는 어땠나?]
"완벽한 하루였어요.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만들어진것만 같은 하루..."
나는 가만히 신을 응시했다.
혹시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신은 마치 내 생각을 읽은듯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게도,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란다. 다음 생엔 네게 행운이 따르길 빌어주마.]
그리고 내 눈 앞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점점 시야가 새까맣게 차올랐고, 이내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속에서 단 하나의 기억을 움켜잡았다.
한수영이라는 내 기억의 일부이자, 전부를.
[...그래. 그거까지 지우는건 힘들긴 하겠군. 그럼...]
그 말을 끝으로, 내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아줌마는 술 혼자 마셔요?"
"뭔 상관이야. 남이사 뭘 하던간에..."
"팬이라서요!"
"...sssss급 무한 회귀자?"
아니, 그게 아니다. 네가 나만을 위해 썼던 그 소설.
"아뇨,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작품 팬이거든요."
나는 한수영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