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는 막상 말을 꺼내 놓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명오는 이미 그가 누굴 살리고 싶어할지, 그래서 이렇게 망설일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묵묵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지금의 김독자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 한수영 씨요."


"알겠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네."


그렇게 한명오는 어떠한 사족도 붙이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김독자로썬 고마운 일이었다. 

그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일 정도는 있었으니까. 

한명오는 그것을 미리 알고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짧게 줄인 것이다. 


"고마워요, 한 소장님."


김독자는 그 날부터 헬스장을 등록했고, 지금껏 꿍쳐둔 돈으로 옷을 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깨어난 한수영에게 더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서였다. 

그녀를 깨우는 예정일은 한 달 뒤. 

뭐 헬스장 한 달 다녀봐야 눈에 띄는 변화는 없겠지만, 애초에 군살이 없던 김독자인만큼 살을 빼는 것이 목적이 아니였다. 

좀 더 장기적인 목표를 본 것이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달째 되는 날. 

항상 입던 후줄근한 후드 집업과 티가 아닌,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정장과 폴로 코트를 차려입고 온 김독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pt를 받으며 동시에 병행한 식단 조절 덕분인지 퀭한 얼굴이 아닌 생기넘치는 얼굴을 하고도 무언가 불안해하는 김독자의 손을 유상아가 꼭 잡았다. 


"괜찮아요, 독자 씨. 다 잘 될 거에요."


그래야죠.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초조하게 김독자는 해동실을 바라보았다. 

수백번은 더 한 테스트고, 수백번은 더 한 시뮬레이션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떨리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자신의 유년기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과 다시 만난다는 긴장감 때문일까, 아니면 깨어난 그녀가 자신이 아는 그 한수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독자 씨, 지켜보게. 이제 시작이네."


한명오가 기세 좋게 말했고, 곧 일사천리로 해동 작업이 진행됐다. 

꽁꽁 얼어붙은 한수영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자 김독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 

검은 머리칼 그 때와 똑같은 단발, 요염한 교태를 부리는 듯한 눈매. 예전의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환자복을 제외하면, 김독자가 기억하는 바로 그대로였다. 


".. 엄청, 아름답네요."


".. 네.."


유상아가 홀린 듯 말했다. 

그냥 아름답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였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왠만한 연예인 정도는 그냥 압도할 정도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여인. 

자칫 냉랭해 보일 수도 있는 외모였지만,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냉미녀.. 스타일이라고 할까."


"겉보기엔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전 알아요. 저 사람은 조금 시니컬할 수도 있지만, 결코 냉정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녀가 정말 냉정한 사람이었다면 자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간간히 자신에게 웃어주던, 책을 골라 읽어주던 그 모든 추억들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한명오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진행되던 해동 절차는 '넥타르'의 주사를 마지막으로 모두 마쳤다. 


"끝났네! 끝났어. 어서 VVIP 병실로 옮기게! 30분마다 상태 보고하고!"


한명오의 외침을 듣자마자, 김독자는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긴장이 한 번에 풀린 탓에 그는 좀처럼 다시 두 다리로 일어나지 못했다. 

놀란 유상아가 달려가 그를 일으켰지만,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유상아가 그를 옆의 의자에 앉혔다. 


".. 괜찮은 거 맞죠?"


".. 글쎄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김독자는 멍하니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지만, 해야 할 일 같은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수영 누나.. 한테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