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끝난 지 3년이 지났다.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과의 우정은 깊어져만 가고, 그 우정에서 싹튼 호감이라는 씨앗이 사랑이라는 꽃으로 피기엔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독자와 작가.
이 둘이 특히 그랬다.
"수영아~"
하고 부르면 헤실대는 김독자에게 도도도 달려와 폭 안기는 한수영.
시나리오 중에는 그렇게 서로 틱틱대던 둘이 그러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도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다만 밤에 울리는 침대 삐걱이는 소리와 한수영의 신음 소리를 제외한다면, 나름 쾌적하고도 행복한 삶을 구가하고 있던 김독자 컴퍼니였다..
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보이지도 않는 사각에서 슬금슬금 기어오기 마련이었다.
한수영은 인간에 굶주렸다.
단지 육욕이라거나, 애정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였다.
유년기에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한수영은, 그 상처를 안고 자라났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재능을 깨닫고는, 어른이 되어 대학에 가서 멋진 남자친구와 애정을 나눌 것을 기대했던 한수영의 발목을 잡아챈 것은 그 무 엇도 아닌 그녀의 재능이었다.
독립한 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던 그녀의 사정 상, 팍팍했던 형편은 그녀에게 낭만 대신 현실을 강요했다.
마음을 채우고 배를 비울 것이냐, 배를 채우고 마음을 비울 것이냐.
한수영의 선택은 - 그것이 합당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 후자였다.
그 날부터, 한수영은 대학에 가는 대신 키보드를 잡고 자판을 두들겼다.
- 와, 미친.. 이거 신인 맞음? 필력이며 소재며 개 미쳤는데?
- 이제부터 작가님 제 원픽 하세요.
단지 소설 안에 일정 상품의 상품명을 넣었다는 것만으로 바이럴 소리를 듣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관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훌륭했다.
그녀가 바라마지않던 상황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다- 하며 한수영은 만족했다.
떨어졌던 자존감도 회복했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을 써 보답하려 밤을 새던 일은 거의 버릇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퀄리티가 떨어지는 날에는 자학하고, 자해하며 끝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계속 지루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그 사건이 터졌다.
시나리오.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름도 모를 괴수종들이 범람하고.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헤쳐나간 한수영은, 어떤 우연한 계기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엮이게 되어 그를 기다리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한수영은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그가 이 세계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한수영은 너무나도 기뻤다.
자신과 만나기 위해, 한 세계를 창조하다니.. 자신이 쓴 글의 내용대로, 모든 것을 재구성하다니.. 이것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사랑이 아닌가!"
"끄으으.."
의자에 묶인 김독자는 아파오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윽고 천이 촤르륵- 흐르는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스며든 달빛이 김독자의 눈을 일깨워 주었다.
그제서야 이 곳이 어딘지 깨달은 김독자는 경악했다.
자신의 방이었다.
".. 내 독백 어땠어? 이거 하려고 민지원한테 연기 강의까지 받았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수영아? 이거 너였어? 왜 이런 장난을 쳐, 무섭게."
너스레를 떠는 김독자는 그러면서도 한수영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도 장난을 풀지 않을 심산으로 보였기에, 김독자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 알았어. 아직 안 끝난 거지?"
김독자가 마지 못해 다시 입을 다물자, 한수영은 입은 다물고 다만 김독자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김독자는 단지 멍청한 표정으로 한수영을 쳐다보았다.
".. 저기 수영아?"
"싫어."
나지막히 한수영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싫다는 건지, 싫으면 왜 싫다는 건지. 대화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배제한, 오직 날것 그대로의 감정.
여지껏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김독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멍청히 되물었다.
"어? 뭐라고?"
"싫다고."
"뭐가 싫은데. 말해줘야 나도 알고 고치지. 혹시 내가 너 섭섭하게 한 적 있었어? 그런 거라면 말해줘. 고칠게."
줄에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이 답답한지, 김독자는 계속해서 의자를 덜컹거렸다.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김독자는 자신이 어떤 것을 간과했는지 깨달았다.
"수영.. 아?"
위태롭게 떨리는 말꼬리.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아버린 자의, 현실 부정이었다.
".. 사랑해 독자야.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널 만지고, 널 지켜보고, 널 듣는 존재는 오직 나 밖에 없어. 넌 내 것이고, 나도 네 것이야. 넌 나만의 독자, 난 너만의 작가.. 어때, 그 무엇보다 완벽하잖아!"
광기에 찬 한수영의 말에 김독자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한수영을 사랑하기는 했으나, 그가 사랑했던 것은 레몬 사탕을 빨며 무심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한수영이었다.
이렇게 비틀린 형태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이런.. 아니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건 이런 여자가 아니였다.
".. 수영아. 너 좀 이상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 같으니까 좀 쉬자. 어때? 오랜만에 둘이서 데이트도 가고 말이야.."
"독자야.. 내가 이상해?"
"어..?"
한수영은 무섭게 대답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자신이 이상하냐고, 자신이 무섭냐고.
김독자가 겁에 질려 말을 더듬자, 계속해서 집요하게 그의 대답을 요구했다.
".. 왜 이래, 수영아.. 무서워.. 너.."
".. 내가.. 무서워? 그렇구나아.. 내가.. 무섭구나아.. 내가.. 널 위해 50년을 견뎌내고, 널 위해 내 인생을 바치고.. 널 위해 뭐든지 다 하는 내가.. 무섭구나.."
잠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리고.
"무서울 리가 없잖아아아아아!!!! 널 위해 뭐든지 다 하는 내가!!! 무서울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아아아!!!"
마치 절규하듯 소리치는 한수영은 김독자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이윽고 자기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에 올려져 있던 단검으로 그의 배를 푹 찔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죽일 정도로 좋아.. 해..?"
찰캉-
"... 어라? 지금 나 뭘 한 걸까.."
피가 흥건한 바닥. 쓰러져 눈을 뜨지 않는 김독자.
한수영은 그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려던 것이 아니였다.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니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끔찍한 절망과 죄악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 고통 속에서, 그녀의 오감은 다른 경지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누군가의 존재를 눈치챘는데..
잠깐.. 뭐?
"네가 보인다."
ㄴㅇㄹ ㅎㄷㅂ서ㄴㅎ여ㅚㅔ냄ㅎ;
해ㅗㅇ니하ㅜ머
ㅈㅎㅈ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ㅌ
.. 그러니 두려워해라.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 모든 게 끝나면, 편해져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