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독자 정 말 그 럴거야?]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면..."
[그 행 복 에 너 는 없 어]
제 4의 벽이 분노하듯, 아니 어쩌면 슬픈 듯 얘기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 사랑하는 내 이야기들,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야기를 써 준 사람. 그 사람들의 행복이, 내 행복이니까. 더이상 누군가가 다치고 슬퍼하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아."
[그 건위 선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김 독자. 그게 네 가 원하 는 이야 기의 끝 이라면, 내 가 도 와줄게.]
[나 는 그러 기 위해 존 재해 왔 으니 까.]
"고마워"
[후 회 안할 거지?]
나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충분히 대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이,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행복이 되어줄 터였다. 내가, 그리고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언젠가 이런 무의미한 희생과 고통이 반복될 것이다. 깊게 뿌리 내린 고통, 비애는 다시금 찾아와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천천히 몸을뉘인 채, 몸에 힘을 빼고, 설화를 조금씩 흩뜨린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슬퍼합니다.]
'미안해...'
마계의 봄이, 처음 내가 이루었던, 나를 이루던 설화가 파스스 흩어졌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울분을 토합니다.]
쾅-
쿨럭. 왈칵하고 설화를 한 움큼 게워내었다.
'너랑 친해지는 게 가장 힘들었었는데... 이것도 너 나름의 위로일까? 너한테도 미안해...'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화를 냅니다.]
그 후, 신화를 삼킨 성화 역시 조금의 저항을 곁들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희와 이별하는 게 누구보다 힘든 건 나야. 정말 미안해.'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슬퍼하며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 방법밖에 없냐며 추궁합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직 이름이 없는 거대 설화가 왜 자신을 아끼지 않느냐며 다그칩니다.]
'...'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이렇게 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 가장 쉬운 방법을 찾기 위한 포기이고 합리화인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희생을 더이상 볼 수 없는 나의 얄팍한 나약함이 아닐까 하는 책망에 사로잡혔다.
설화들을 하나씩 풀어헤치며, 힘이 빠지는 것을 조금씩 느꼈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작은 스마트폰이 전부인 나는, 우습게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야기를 바라보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가지 방법]
그 속에는 내가 되고 싶었던 유중혁의, 때로는 빛나고 때로는 슬프고, 또 때로는 빛을 잃고 헌신하는 1863회차의 설화들이 내 눈에, 내 머릿 속에, 내 영혼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 녀석의 소설을, 다시 읽어주기로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설화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내 이름은 김독자(獨子)다. 아버지가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내가 강한 남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홀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라 독자(獨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눈을 서서히 감자, 멸살법의 텍스트가 천천히, 이내 빠르게 바뀌어 갔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너무 소설을 많이 읽어서 눈이 멀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 속에는 내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신의 ■■는 '영원'입니다.]
일행들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엔딩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너, 대체 누구냐?"]
["말해. 너 누구냐고."]
["틀림없어. 김독자는 아직 거기에 있다고."]
"다시 한번 더 뛰면,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문장들이 눈에, 머리에, 마음 속에 박혔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끝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흔 '집단 회귀.Lv1'이 발동합니다!!]
'안 돼...'
나는 반쯤 절규하듯 그 문장을 읽었다. 업데이트 된 소설 속에서 일행들은 빠르게 시나리오를 클리어 해 나갔다. 그들이 늘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배신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회차보다도 빠르게 시나리오를 클리어 해나갔다. 이야기의 서술과 생략의 반복, 눈물로 이야기를 읽으며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어느덧 그들은 최후의 벽에 다다랐다.
[김 독자, 네 가 원하 던 원 하지 않 던, 저 들은 이 이 야기를 계속 이 어나갈 거 야]
제 4의 벽이 다그치듯 말을 걸었다.
"의...미 없는 반복은... 더 지치게 만든다는 걸 알잖아?"
나는 가빠진 호흡을 뱉으며, 눈물을 머금고 제 4의 벽에게 말했다. 내 몸은 어느덧 다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끝내 힘을 쥐어짜,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제천ㄷ..."]
[여긴 내... 라]
끝맺음을 다 하지 못한 문장들이 계속 적혀내려갔다.
[김독자... 탁해, ...원아]
내가 가장 사랑한 성좌들과.
["사부! 합공!"]
제 사식
사...허
파천검...
비...의
유성참
["먼저 ㄱ... 가겠다!]
내가 가장 사랑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아니. 이제는 동료가 되어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
[거대 ㅅ... 봄'이 ...를... 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설화들.
[김 독 자. 마 지막 이야. 그 동 안 즐거웠 어. 저 들이 어 떤 이 야기를 써내 려 갈지 모르 지 만. 내 가 선물 을 줄게]
[미 안해. 김 독자]
항상 나를 지켜주었던 제 4의 벽. 제 4의 벽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너 희는 지나 갈 수 없 어 그 분이 원하 지 않 으니 까]
'제 4의 벽... 무슨...?'
제 4의 벽의 행동에서, 우습게도 슬픈 감정이 느껴졌다. 바보 같은 나를 지켜내고자 하는 자신 나름의 배려인 걸까? 악역을 자처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는데.
내 몸에 제 4의 벽의 힘이 조금 깃든 것 같다. 아픔이 가셨다. 설화가 흩어지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 듯했다. 방향성 없이 흘러나가던 설화들이, 점차 방향성을 지닌 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김 독 자. 너의 행 복은 저들 의 앞 으로 의 행 동에 달 렸어. 너 의 이야 기가 이 런식 으로 끝 나지 않 았으 면 좋 겠어 안 녕]
제 4의 벽이 속삭이듯 얘기했다. 제 4의 벽은 더이상 내게 말을 건네오지 않았다. 서로 다투고, 지저귀던 설화들도, 힘을 잃은 듯 얘기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건네주지 않는다. 문득, 죽음이라는 거대한 어둠이, 나를 잡아먹을 듯 다가왔다.
'정말 죽는 건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이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의식만이 남은 채 일행들의 사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제 4의 벽은 마치, 자신이 흑막이듯, 일행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듯, 끝 없이 몰아쳤다. 저 행동들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나 뿐이리라. 일행들은 최후의 벽을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문득, 듣고 싶던 일행들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김독자!"
한수영
벽에 문장이 새겨졌다.
[장난으로 건넨 레몬 사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먹던 녀석.]
하나 뿐인 나를 위한 작가.
"독자 씨!"
유상아 씨
[캐비넷에 숨어, 홀로 '멸살법'을 읽고 있던 사람.]
멸망한 세계에서도, 홀로 빛나며 배려해준 사람.
"제가 안 쪽을 잡겠습니다!"
"난 왼쪽!"
이현성씨와 정희원씨
[재미없는 군대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사람]
살아남기 위해, 살리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던 사람
[빌어먹을 고집불통 말썽꾸러기]
첫 동료이자, 자처해서 나의 검이 되어준 빌어먹게도 고마운 사람
"독자 씨! 대답해요! 듣고 있는 거죠!"
이설화씨
[일행들을 위해 밤을 새서라도 필요한 약초들을 구해준 사람]
일행들을 위해 밤을 새서라도 치료를 해준 고마운 사람
공필두
[내 땅 다 뺏어간 놈.]
고맙고 미안한 사람.
"아저씨!"
"형!"
유승이와 길영이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늘 거짓말을 하는 사람]
하나 뿐인 나의 화신
[하지만, 거짓말을 잘 하진 못하는 사람]
언제나 나를 믿어준 고마운 아이
"난 오글거리는 말 못해! 빨리 나와!"
[오징어 아저씨]
툴툴대면서도 언제나 애써 준 녀석
"김독자!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
장하영
"우리 같이 이야기했잖아. 닿을 수 없어도, 만날 수 없어도 끝까지 벽을 두드리자고. 그 벽이 결코 열리지 않더라도, 벽에 계속해서 뭔가를 써 놓자고!"
하영아...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 문장을 볼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마침내 네가 그곳에서 나오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나로 인해 탄생된, 그럼에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사람.
"제발! 말 해줘. 한마디라도! 제발..."
불행히도, 그들의 목소리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기엔, 너무 나약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아... 나는 살고 싶었던 거구나. 이들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저 벽은, 최후의 벽은. 나를 감추기 위해 내 스스로가 쌓은 벽이구나.'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에, 나라는 존재가 일행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거대설화가 된 것 같다는 생각, 말로 이룰 수 없는 고양감, 비애, 슬픔, 허무함, 미안함, 고마움. 수많은 감정들이, 수많은 우리들의 설화가 나를 재촉했다. 나의 마음을, 초라하고 우스울지라도 조금이라도 남겨놓자. 언젠가 일행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나도]
[당신들과]
안간힘을 다 해 손 끝을 움직여 보았으나, 더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끝이구나'
그 순간 최후의 벽이, 열차 객실 문이 조금씩 허물어짐을 느꼈다. 제 4의 벽의 목소리를 느끼며, 의식이 흐려져갔다.
[그 래 김 독자 그 거 면된 거 야. 언 젠가 그들 이 너 를 찾 을수 있 게 너 를 남겨 놓 는거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 의도는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제 4의 벽의 호의가, 일행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흩어져 가는 의식에 조금쯤 행복함을 더해주었다.
아마, 수많은 나의 조각들은,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사랑해줄지도 모르겠다. 일행들의 간절함에,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 때는 보고싶었다고 얘기해야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많이 정말 많이 후회가 된다.
'네 소설, 더 읽고 싶었는데.'
소박한 염원 한조각을 흩어지는 설화에 담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 그들을 볼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제 4의 벽은 흩어지는 김독자의 파편들을 억지로 모아, 조그마한 김독자를 만들어냈다.
[내 가 사랑했 던 이야 기가 더 행 복해 지 기를]
흩어지는 김독자의 설화 파편들과 함께 제 4의 벽이 허물어지며 그 자리엔 아이가 된 김독자만이 남아있었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김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