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붉은 실

 

 

사신(死神).

죽음의 신죽음을 예고하거나죽은 사람을 데려오는 깊은 그림자다.

흔히 전설 속에 나오는 저승사자염라하데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신이자죽음 그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

 

사신은 오로지 죽음을 관리하며어둠을 지배하는 신이다그렇기에 우정도애정도걱정도사랑도 하지 못하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나는 홀로 영겁의 세월을 보내며이 세계를 관망하며관리하고 있다.

세계의 빛은 소멸했다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누군가는 나를 빛이라 볼 수 있었고누군가는 나를 어둠으로 볼 수 있었으니.

 

“...이런 누가 또 죽었네.”

 

서울의 고층 건물에서 하얀 코트를 입은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둠 끝자락에서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나도 죽은 사람을 데려오는 건 썩 좋지 않다고~”

 

가야한다김독자.

 

알았어알았어간다니까?”

 

내가 사신이 되고부터내 머릿속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난 이 녀석과 함께 죽음을 관리하고 있다아마 난 이 녀석이 없었다면 진작에 미쳤을지도 모른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라김독자.

 

아 알겠다니까?”

 

슈아아아악

 

깊은 어둠이 나를 덮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설화병원

 

환자 한정원김소영한수영

 

“....3명이나게다가.... 한 명은 어린아이잖아?”

 

명단을 보니두 명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유명 배우아버지는 국회의원인 한 가족이교통사고로 인해, 3명 모두 목숨을 잃었다.

 

... 어린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얼씨구?”

 

나는 죄를 심판하기 위해가족의 과거를 들여다봤다.

 

부모라는 새끼들이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네.”

 

부모라는 놈들은 외동인 딸을 버리다시피 키웠고하나의 정애정 또한 주지 않았다.

 

이것들을 진짜....”

 

나 또한 가족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었기에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교통사고로 인해죽었던 가족의 외동딸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지금 날 부른 거니....?”

.”

 

똘망똘망한 눈과 매력적인 눈물점을 가진 아이가 말했다.

 

어떻게 영혼이.... 아니그래 무슨 일이니?”

아저씨 이 세상 사람 아니죠?”

..?”

아저씨 뒤에서 거대한 낫이랑 어두운 그림자가 보여요.”

그게 보일 리가 없을 텐데....?”

아저씨 저승사자에요엄마 아빠랑저 죽은 거 알아요우리 데려가려고 온 거에요?”

 

도저히 어린아이의 목소리라기에는 너무나도 차갑고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몸을 숙여 아이에게 눈을 맞췄다.

 

“...맞아아저씨는 저승사자야수영이가 하늘의 별이 되어서 데려가려고 찾아왔어.”

“...진짜 죽은 거군요.... 상관없어요어차피 항상 혼자였고어머니랑 아버지는 맨날 싸우고 저에게 관심도 안 줬거든요.”

“......”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잘 됐네요전 이제 어디로 가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

그곳은 이곳보다 괜찮겠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아무리 죽음을 관리하는 신이라 한들그 아이에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아저씨는 매일 이렇게 죽은 사람을 데려가는 거예요?”

“....”

저승사자면 조금 편한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아닌가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매일 죽는 상황과죽은 사람을 봐야 하잖아요아저씨도 많이 힘들었죠?”

 

아이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으며 내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아이의 손이 내게 닿는 순간나는 무언가가 가슴 한편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

아저씨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갈 시간인가 봐요이따 봐요 아저씨.”

 

아이가 뒤를 돌아서며 나에게 인사했다나는 무심코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어요아저씨?”

“.....수영아.”

?”

 

안 돼김독자.

 

한번만.’

 

안 돼.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비극을 겪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일을 겪는 건나 하나로 충분하잖아.’

 

......이번만이야.

 

고마워.’

 

왜요 아저씨?”

넌 데려가지 않을 거야.”

왜요?”

그곳은 네가 가기에는 너무 험하고어두운 곳이야그리고 아직 오기 일러.”

하지만 전 이미 죽었는걸요.....”

괜찮아사신이 괜히 사신이 아니니까.”

 

[태초의 어둠, ‘에레보스가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낫이 나타나환한 빛을 내뿜으며 아이에게 스며들어 갔다.

 

인연이 있다면다시 만나게 될 거야그때까지 잘 지내야 한다?”

아저씨.....”

그리고 이건 잊으렴행복했던 일만 기억하고 살아가.”

 

나는 아이에게 안 좋은 기억을 모두 지웠다차가웠던 아이의 몸이 점점 혈색이 돌아왔고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겠네근데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건 처음이었어.”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선아이를 들고 한 보육원으로 향했다.

 

원장 이수경

 

나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보육원이었다.

 

똑똑

 

누구세.... 어머또 왔네?”

하하... 이 아이를 좀 부탁드리려고요.”

... 문제는 없다만어째서?”

그냥요.... 딸처럼 대해주세요부탁드릴게요.”

알겠어요.”

그럼 이만...”

잠깐차 좀 마시고 가지?”

“....괜찮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검은 날개를 펼쳐 한 건물 옥상에 올라왔다.

 

“......조금 춥네.”

 

물론 신이기에추위 따위는 타지 않았다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기가 느껴졌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돌아가자 김독자.

 

그래.”

 

나는 씁쓸하게 웃고선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

 

20년 후

 

서울의 한 고층 옥상에서 하얀 코트를 걸치고 커다란 검은 날개를 가진 사내의 주변에 검은 그림자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래도 요즘은 저승에 찾아오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네.”

 

근 5년간 각종 바이러스 및 사고로 인해 저승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득했었다.

 

이제 바이러스도 종식됐고사고 예방도 월등해지고 있으니까 조금 한가해지는 것 같아.”

 

끼이이익!!!

 

그 순간 지상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고이윽고 쾅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앙!!!

 

.....김독자.

 

“......미안.”

 

너 입 조심해......

 

진짜 미안.”

 

그때 뒤에서 검은 포탈이 생성되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사신님.]

 

그래 지배인 비유야무슨 일이야.”

 

[대악마 카제로스가 이곳에 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건 썩 좋지 않은 소식이네근데 그렇다는 건....”

 

[사신님은 당분간 인간계에 간섭이 가능해집니다.]

 

그건 나쁘지 않은 소식이네.”

 

[그럼 이만....]

 

잘 가 비유야조심히 들어가렴.”

 

하얀 솜뭉치의 모형을 띤 내 지배인 비유가 실실대며 사라졌다.

비유는 얼마 전에 영원과 안식의 세계내 세계로 들어온 도깨비였다.

죽음과 어둠을 관리하는 내 세계에 처음으로 들어온 손님이었기에나는 그 아이를 딸처럼 대했다.

 

우리 비유진짜 귀엽지?”

 

도깨비가?

 

그래비유가 보고 있으면 20년 전에 내가 구해줬던 아이가 생각난다니까가령....”

 

나는 나와 똑같은 하얀 코트를 입고 대학교에서 나오는 한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저기 저 여자랑 똑같이 생긴 그 아이잘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하얀 코트를 입은 여인인 20년 전 내가 한 번 더 목숨을 주었던 아이와 똑같이 생겼었다어깨까지 오는 흑단발에 매력적인 눈물점......이 아니라 진짜 그 아이였다.

 

병신 김독자.

 

병신이라니 그건 좀 말이 심하잖아.”

 

......바보 김독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서둘러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저 아이와 만나려고?

 

뭐 문제 있어?”

 

대악마 카제로스의 이야기가 들리자이 세계를 관리하고 지키는 사신인 나에게는 이제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그 아이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 그러려나?”

 

나는 지상으로 내려와 그 아이와 자연스럽게 만나려고 하는 순간그 아이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저건.....”

...에이 설마..... 내가 보일 리가 없잖아... 그치....?”

 

하지만 그 아이의 눈은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

 

내 정체를 눈치챘는지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돌겠네 진짜그림자로 가려져 있어서 안 보일 텐데 어떻게 나를 보는 거야?”

 

평상시에 난 그림자를 나를 감싸고 있기에보통 사람들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아니 그냥 눈치를 채지 못 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항상 검은 오오라가 일렁이고 있으니까.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방방 뛰며 나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맞죠그때 그....”

 

저렇게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겠지....’

 

아니나 다를까대학교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수영이와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교수님... 저기에 뭐가 있어요.....?”

너희들 눈에는 저게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럴 리가....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안 보인다고?”

잘생긴...? 아니 도대체 뭐가 있는 건데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이대로 있다가는 그 아이에게 이상한 프레임이 씌어질 것 같아나는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한 소리과 함께 내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이내 새카만 공간에 나와 그 아이만 남아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변했어....”

주변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널 데려온 거야.”

아저씨아저씨 맞죠그 20년 전에 나에게 목숨을 준...”

그래 그 아저씨 맞으니까일단 좀 앉아봐.”

어디에 앉아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검은 공간일 뿐이었다.

 

.”

 

나는 황급히 의자를 그녀 앞에 소환했다.

 

우와어떻게 한 거예요?”

그보다.... 넌 진짜 내가 보여?”

원래... 안 보여야 되요?”

당연하지.”

그래요이상하네.... 근데 여긴 어디에요?”

내가 만든 곳.”

아저씨가 만든 곳이요?”

이곳은 나의 영역영원한 안식이자죽음난 죽음의 안식이고 또한 공포...”

사신!”

“....그래이번에는 저승사자라고 안 하는구나.”

아저씨가 수경 아줌마한테 데려다 주고 그 아줌마 옆에서 크면서 아저씨를 찾아봤어요근데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고요.”

당연하지저승사자나 사신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니까.”

그치만 사신은 진짜 존재하잖아요사신은 어떤 일을 해요?”

“....나의 영역에서는 마음먹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

 

내가 작게 손짓을 하자옆에 커다란 나무가 생겨났다.

 

내 권속에 속한 이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그들을 통해 내 힘을 흡수할 수도 있지.”

 

내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주변이 환하게 빛나며 커다란 공원이 생겼다.

 

비록 내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지만세계를 창조하고 없애며 변화시키는 것까지 가능한 힘.... 전능한 힘이지.”

 

나는 그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이렇게 하는 건가?”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무언가 용을 쓰고 있었다.

 

“....내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는 하지만모두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힘이 섞인 내 권속들만....”

 

나는 그녀에게 차분히 설명해주는 순간그녀 앞에 작은 꽃송이가 생겨났다.

 

...수 있을... 텐데.....?”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꽃송이에 다가갔다.

분명하게 느껴졌다비록 나처럼 강대한 힘은 아니지만 작게나마 나의 힘이 조금 섞인 그녀가 만들어낸 꽃송이였다.

 

이게 어떻게......”

그냥 꽃송이야 생겨라 하고 생각했더니 생기던데요?”

 

그녀가 무엇이 문제라는 듯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넌 뭐지?”

뭐가요?”

절대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도 내가 보이고내 피와 힘이 섞이지 않은 내 권속도 아닌데도 힘을 사용할 수 있고.”

 

나는 의문투성이인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그리고 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네가.... 내 운명일지도 모르겠네.”

뭐라고요 아저씨?”

 

머리를 숙이고 고민을 하던 내 얼굴 앞으로 그녀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녀의 몸 뒤로그녀가 만들어낸 것들이 보였다가방노트북코트날개 등등....

 

아니 날개는 왜 만든 거야?

 

나는 그녀가 만들어낸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했다.

 

아 아저씨!!!”

됐고배 안 고파밥 먹으러 가자내가 살게.”

좋아요안 그래도 오늘 학식 맛없어서 배고팠는데.”

것보다호칭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 아저씨는 좀 그런데...”

왜요?”

어차피 내 실제 나이는 너랑 두 살 차이 밖에 안나그냥 편하게 불러.”

제 나이는 어떻게 알았어요?”

이 세계를 관리하는 죽음의 신인데사람들 나이를 모르면 되겠냐.”

... 그렇구나... 근데 아저씨 실제 나이라뇨?”

“....그냥 내가 죽고 사신이 된 나이를 말하는 거야나도 사신이 되기 전에는 사람이었으니까.”

....”

 

그녀와의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두 살 차이 밖에 안 나니까 그냥 편하게 부를게!”

“.....그래.”

 

나는 그녀와 검은 공간에서 나와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식사를 마치고작은 공원에서 잠시 걷던 중한수영이 내게 물었다.

 

근데너는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아?”

수백 년을 넘게 살았는데 돈이 없고신분이 없으면 내가 이곳에서 사신을 할 수 있었겠니그냥 죽어야지.”

.....”

 

그녀가 납득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여친은 안 만들어?”

여친?”

 

내가 의아하듯이 묻자그녀가 새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냥.... 수백 년이 넘게 혼자였다고 하니까....”

 

그런 뜻이었나.

 

그냥.... 나만의 규칙이야.”

규칙?”

사신은 인간과 이어질 수 없어.”

그럼 인간 말고 너랑 같은 존재면 상관없는 거 아니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어차피 이 세계를 관리하는 신은 나 혼자고....”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한참동안 말이 없었던 난 작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그렇구나.....”

 

왜인지 모르게 그녀와 내 사이가 조금 숙연해진 것 같았다.

 

근데 인간과 왜 이어지면 안 돼그냥 이어지면 안 되는 거야?”

“...딱히 큰 제약이 있는 건 아닌데내 정체와 힘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뿐더러나는 죽지 못하는 존재고그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잖아.”

 

의외의 답이었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내가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안 만드는 걸로 하자.”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달빛이 오늘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슬슬 춥다데려다 줄게가자.”

 

나는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조심히 들어가.”

... 고마워오늘 재밌었어.”

 

그녀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나에게 말했다집으로 들어가던 도중그녀가 갑자기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졌다.

 

“....?”

오늘 선물이야다시 만난 기념이랑 나랑 놀아준 선물나중에 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내 손에는 그녀의 이니셜이 박힌 작은 금속 책갈피가 있었다.

 

“...작가라고 하더니자기 이름으로 된 책갈피도 있네.....”

 

나는 그녀가 쥐어준 책갈피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귀엽네.”

 

스르르륵

 

나는 그녀의 집에서 발걸음을 돌리고주변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를 감싸며 사라졌다.

 

*

 

20년 전나에게 따듯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 그 아이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된 한 여인이 되어 나타났다다시 만난 그녀와 재회를 했고몇 년 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오늘은 어디 갈래?”

.... 놀이공원 갈래나 한 번도 못 가봤거든.”

그래 가자.”

 

나는 그녀와 몇 번이고 계속 만났다그녀와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점점 내 감정이 무뎌져갔다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그녀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다시 생명을 얻게 됐는데나 때문에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근데... ... 피부 왜 이렇게 하얗냐사신이라 그런가?”

원래도 하얬거든?”

그래피부에 잡티도 하나 없고좀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뭐라는 거야.”

진심이야.”

 

정말이지 싫어할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아름다운 외모에매력적인 눈물점새하얀 피부그리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미소까지그녀를 보면 볼수록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뭐야오늘은 한껏 꾸몄네?”

“...그러는 너도 안 하던 화장도 했는데?”

뭐야... 눈치 챘네막상 나오려니까 꾸며보고 싶더라고... 별로야?”

“....아니 예뻐.”

진짜?”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제일 예뻐.”

헤헤... 고마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하면 너무 힘들었다죽은 사람들을 인도하고더럽혀진 내 마음을 그녀와 만나면 항상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엔 그녀가 자신도 내 권속이 되면 안 되냐고 물었었다.

 

“...야 나도 네 권속이 되면 안 돼?”

?”

아니... 내가 네 권속이 되면 앞으로 너 혼자 안 다녀도 되잖아너랑 노는 거 꽤 재밌단 말이야.”

 

처음에는 정말로 혹했었다하지만 그녀를 이곳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고그녀는 나와 다르게 조금 더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만날 때마다매일 똑같은 문장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조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조금 평범하게 만났다면.... 우린 좀 달랐을까?’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꿈이었고나는 신그녀는 인간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그 선을 넘으면 안 되면서도 난계속 그 선을 넘고 있었다.

 

또 왔네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냐?”

... 보고 싶었어.”

“....갑자기 훅치고 들어오네.”

진짜야.”

그래... 나도 좀 심심했어.....”

 

어느 날에는 사신 일을 때려치워 버리고 너랑 도피나 해버릴까라고 생각도 했었다.

 

“....그냥 사신 그만둘까.”

진짜?”

“....글쎄잘 모르겠다.”

뭐야 식상하게... 근데.... 난 오히려 너가 사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

너 아니었으면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고이렇게 널 볼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그녀는 나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야.”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뭐야.... 재미없게어 야별똥별 떨어진다빨리 소원 빌어!!!”

 

그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빛나면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그녀의 모습에 나는 살짝 웃고나도 내가 아닌 또 다른 신에게 기도를 했다.

 

만약에 다음에 사신이 아닌 인간인 김독자로 널 만나게 된다면그때도 널 좋아하고 싶다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쉴새 없이 떨어지는 별똥별이 우리를 환하게 빛냈다.

 

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차갑지만 따듯하게 불어오는 밤공기를 맡으며 조용한 분위기에 휩쓸렸을까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그녀의 입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

 

고요한 밤하늘 속에서 달콤하고 따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창 기도를 하던 그녀가 갑자기 느껴진 감촉에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나 또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 .....”

미안이건 잊어이만 가볼게.”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자기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갑자기 이렇게 기습 공격하는 게 어딨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얼굴도 은은하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그녀는 밝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그녀에게 기습 뽀뽀를 한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그 일 이후로 나는 그녀를 마주치는 게 두려워 인간계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백 년 만에 인간계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계신 건가요 아빠.]

 

... 비유구나.”

 

[그 여자 때문이에요그날 무슨 일 있으셨어요?]

 

비유의 말에 그날의 일이 머릿속으로 다시 재현됐다.

 

아악!! 김독자 멍청한 새끼!! 뒤져라 뒤져 그냥!!”

 

내가 미친 사람처럼 퍼덕거리자 비유는 조심스럽게 내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진짜 어떡하냐 나?”

 

그러게 내가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누군 만나고 싶어서 그랬냐걔한테 내가 보일지 누가 알았겠어너도 예상 못한 거잖아.”

 

크흠....

 

!! 거기서 왜 입을 맞추고 지랄이야 지랄은!!!”

 

한참 자책 중이던 그때 세계 바깥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김독자.

 

그래 나도 느꼈어.”

 

그 녀석이 온 걸까?

 

아니그 녀석이랑은 조금 다른 기운이야일단 가보자.”

 

하얀 코트를 펄럭이며 나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세계의 바깥으로 와보니 아름답게 빛나는 우주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언제봐도 더럽게 예쁘단 말이야.”

 

우주를 빛내는 수많은 별 사이에서 기분 나쁜 검붉은 오오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오오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그리고 나지막이 읊었다.

 

“....대악마 카제로스네가 이곳엔 무슨 일이지?”

 

그때 검붉은 오오라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한쪽이 뜯겨져 나간 빨간 날개와 커다란 대검을 든 악마대악마 카제로스의 검군주 아카인이었다.

 

아카인.....”

 

[푸하아어우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니까 상쾌한 걸?]

 

거대한 거구를 가진 악마가 나를 발견하더니 유심히 쳐다봤다.

 

[...? .... 크하하!!! 넌 그 사신이잖아?]

 

아카인이 피범벅이 된 대검을 휘두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수백 년 전카제로스님에게 힘을 뺏긴 빛과 어둠의 감시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커다란 송곳니를 나에게 드러냈다.

 

[이제는 그냥 사신인가그 은 이미 모두 잃었으니까.]

 

그 입 닥치지?”

 

[워워진정해오늘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새끼가 아까부터 그 좆같은 살기는 왜 내뿜고 있는데?”

 

아카인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대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카아아앙!!!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낫이 나타나 그 대검을 막았다.

 

[.. 정말 넌 여전히 눈치가 너무 빨라그러니까 그 날개를 잃었지.]

 

아카인이 커다란 안광을 밝히며 내 등에 펼쳐진 검은 날개 밑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흉터를 쓸어봤다그 흉터는 검은 날개와 내 또 다른 날개빛의 힘이 담긴 새하얀 날개가 뜯겨진 흉터였다.

 

[조금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었으면 그 아름다운 날개를 잃지 않았을 텐데.]

 

말 더럽게 많네 진짜.”

 

[네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어빛의 힘을 잃고 네 세계는 어둠으로 가득 찼지근데 역시 신이라 그런가고작 어둠의 힘만으로 세계를 유지시키다니 정말 대단하다니까.]

 

용건이나 말해.”

 

[용건 같은 건 없어그 분이 원하시는 건 너의 몰락과 지배자가 되시는 것.]

 

아카인이 대검을 나에게 겨누며 말했다.

 

[혹시 몰라 네놈이 빛의 힘을 되찾았으면 어쩔까 하고 찾아왔는데 괜한 걱정을 했군조만간 또 보지그때는 그 분도 오실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라고?]

 

그는 검을 거두고 붉은 오오라 속으로 사라졌다.

 

.....”

 

나는 쓴 표정을 지으며 내 공간으로 사라졌다.

 

일생에 난빛과 어둠을 다루는 신이었다그 어느 쪽도 균형을 잃지 않도록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내 의무였다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둠 속에서 악마들이 태어났고어둠의 힘을 흡수한 대악마 카제로스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겠다면서 나를 공격했다.

 

그와의 전투에 난빛을 잃었고내 힘 또한 급격하게 약해졌다.

그를 봉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빛은 어딘가로 사라졌고나에게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난 이 어둠으로 세계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정했고며칠 뒤따듯한 기운을 가진 그 아이를 만났다어둠인 나를 빛나게 해준 한수영을.

 

[빛과 어둠이 희미하게 움직입니다.]

 

*

 

하아.... 막을 수 있을까.”

 

내 공간으로 들어온 나는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해에레보스는?

 

“....에레보스는 어둠의 힘이야빛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어.”

 

지금의 내 힘으로는 그를 절대 막을 수 없었다수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가던 도중그녀의 얼굴이 비췄다항상 밝게 빛났던 그녀의 얼굴이.

 

.... 어떻게든 막아야지.”

뭘 막아?”

 

검은 공간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어딜 봐여기야.”

 

그녀는 한쪽 벽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냥 너 생각하니까 이쪽으로 와지던데?”

“....그게 된다고가능할 수가..”

됐고우리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지 않나?”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살짝 움츠려졌다.

 

...?”

기억 안 나네가 그때 나한테 기습 공격하고 튀었잖아!!”

...”

아는 무슨 아야뭐 할 말 없어?”

그날은... 미안해....”

아오 멍청한 새끼야그거 말고!!”

...?”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

김독자너 나 싫어?”

?”

나 안 좋아하냐고.”

그럴 리가... 널 안 좋아했으면 그날 너한테 뽀뽀도 안 했겠지....”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좋아하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

김독자난 너 좋아해그러니까 피하지 마.”

무슨...”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그때와는 조금 다른 게 있다면이번엔 입술만 살짝 부딪힌 뽀뽀가 아닌키스였었다.

그녀의 혀가 조심스럽게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나 또한 그녀의 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아..... 어땠어...? 나 첫키스인데.....”

 

그녀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난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다 작게 속삭였다.

 

나도 최고의 첫키스였어.”

너도 첫키스야?”

.”

헤헤.... 다행이다.”

뭐가?”

그냥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서로가 서로의 첫키스 상대가 된 거잖아.”

그러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작은 행동에도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근데.... 너 인간이랑 연애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히히... 그건 그래이왕 이렇게 된 거나랑 행복하게 지내자.”

 

훗날 닥칠 일을 알고 있어서일까규칙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그저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이런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아 참김독자.”

?”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미신 알아?”

알지유명하잖아.”

그치마치 너와 내가 그 붉은 실과 연결된 것 같아.”

?”

연정을 품은 우리의 인연이 지금 이렇게 이어졌잖아그때 널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래.”

사랑해 독자야.”

나도 사랑해 수영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 했지만그 순간 나와 수영이 사이에 희미하게 붉은색의 실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마치 태초의 빛과 어둠처럼.

 

*

 

.

 

달콤한 소리가 방안에 조용하게 울러 퍼졌다.

 

잘 지내 수영아.”

 

그녀에게 작게 입을 맞추고 방을 빠져나왔다.

 

수영이 잘 부탁해 비유야.”

 

[아빠.....]

 

우리 딸아빠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런 말 하지 마....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힘들다는 거 비유도 알잖니.”

 

하얀 솜뭉치의 눈에서 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늦겠다가볼게.”

 

우우우웅

 

한쪽에서 거대한 낫이 움직였고검은 오오라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나를 덮으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좀 늦었네?]

 

우주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아카인만 있었다.

 

“.....카제로스는?”

 

[그 분께선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다하지만 머지않아 혼돈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너 혼자라는 얘기네?”

 

[나 혼자라면 그게 무슨 상관.....]

 

콰아아앙!!!!

 

내 신형이 튀어나가며 아카인에게 쏘아져 나갔다.

 

[네놈이 드디어 미친 것이냐!!!]

 

아카인이 포효를 내지르며 대검을 꺼내들었다.

 

신의 부름에 눈을 떠라 에레보스.”

 

[태초의 어둠, ‘에레보스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뜹니다!]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낫이 나타나더니 내 검은 날개와 함께 힘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무슨..!!!]

 

카제로스가 오기 전에널 먼저 족치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크아아악!!!! 반쪽짜리 어둠 신 주제에 감히 나를!!!!!]

 

빛을 잃었다고 해도너 따위는 충분히 죽이고도 남아.”

 

에레보스를 휘두르며 아카인을 몰아붙였다점점 아카인의 몸에는 큰 상흔들이 나기 시작했고마침내 녀석의 목에 낫을 겨눴다.

 

[크윽....! 어떻게 어둠만으로....!]

 

어둠이기 전에빛도 관리했던 신이고작 빛을 잃었다고 해서 네놈 새끼한테 질 것 같냐?”

 

[거기까지.]

 

아카인의 목을 베려는 순간음침하고 오싹한 혼돈의 기운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쪽에서 붉은 전격이 튀며 거대한 한쪽 뿔과 검붉은 날개를 펼치며 악마가 나타났다.

 

“....카제로스.”

 

[오랜만이군감시자아니이젠 사신인가?]

 

우리가 그렇게 정겹게 인사를 나눌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정녕 네놈 혼자 나를 막을 것인가.]

 

원래 혼자였어그리고 나 혼자서도 충분해.”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는군.]

 

스겅!!

 

에레보스가 아카인의 목을 처참히 베었다허공에 피가 튀며 아카인의 목이 나뒹굴었다.

 

[....에레보스인가성가신 낫이었지.]

 

너나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고 빨랑 덤비지설마 쫄았어?”

 

카제로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품속에서 긴 검을 꺼내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실력은 여전하군하지만 역시 빛을 잃고 너무 약해졌군.]

 

하아.... ....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냐계집애도 아니고.”

 

[감히....!]

 

카제로스가 거대한 검격을 날렸다.

 

아이기스.”

 

등에 있는 두 개의 흉터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그리고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싸며 거대한 방패가 나타나 검격을 막았다.

 

쿨럭...!!!!”

 

[... 약하지만 빛의 힘 일부를 쓸 수 있는 것인가역시 태초의 신답군.]

 

하아... 하아... 개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덤벼.”

 

[안일하군.]

 

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카제로스에게 쏘아져 나갔다.

 

하아... 하아...”

 

제법 몇 합을 나누나 싶었지만결국 얼마 안 가 내 몸 곳곳에는 작고 큰 상흔들이 나 있었다반면에 카제로스에게는 작은 상흔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둠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버티다니그 노력은 칭찬해주지허나이제 거기까지다.]

 

카제로스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이미 내 등에는 그의 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때 내 말을 들었다면 빛을 잃지 않았을 텐데....]

 

좆까네놈 말 들을 바에는 차라리 죽고 말지.”

 

[예나 지금이나 고집은 여전하군하지만 그래서 네놈이 맘에 든다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하아.... 하아..... 내가 무슨 말 할 것 같냐?”

 

나는 천천히 카제로스를 응시하며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좆까.”

 

[네놈의 신념만큼은 존중한다이만 죽어라.]

 

카제로스가 검을 치켜들었고내 심장에 찔렀다.

 

크헉...!!”

 

[이제 마지막이군.]

 

“....그래마지막이야에레보스.”

 

카제로스 허공에서 그림자가 생기며 에레보스가 나타나 그에게 쇄도해한쪽 팔을 잘랐다.

 

[크아아악!! 네놈!!! 쓸데없는 잔머리는......!]

 

하아..... 하아.....”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갔다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는 지금쯤 일어났을까내가 없어도 넌 잘 지낼 수 있을까.

미안해내가 조금 더 강했다면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뒤척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짜 멍청이.”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한수영이 쪼그려 앉은 채내 앞에 있었다.

 

.... 어떻게.....”

이게 무슨 꼴이야.......”

 

그녀는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놈은 뭐지....?]

 

카제로스가 잘린 팔을 다 재생시키고는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 빨리 여기서 피해위험하단 말이야!!!”

너가 없는데 살아서 뭐해운명의 붉은 실 기억나?”

?”

내 목숨네가 준 거야원래 끊어졌어야 할 내 운명이너로 인해서 다시 생기게 된 거라고.”

그게 무슨....”

그러니까 이건 그 빚을 갚는 거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그녀의 이마가 나의 이마와 맞닿게 했다.

그녀와 내 몸 사이에 서로 이어져 있는 붉은색의 실이 환하게 보였다.

 

고마웠어그리고 널 다시 만나게 돼서 행복했어.”

 

그녀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안녕 김독자세상의 빛이 되어줘서 고마워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리고 그 실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꼭 다시 만나자사랑해 김독자.”

 

그녀는 새하얀 빛이 되어 사라졌다그리고 그 빛이 점점 나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태초의 빛, ‘아이테르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잃어버렸던 빛이 새로운 빛을 냅니다.]

 

몸 곳곳에 나 있던 상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등의 흉터에서 새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빛과 어둠의 힘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태초의 신, ‘프로토게노이가 온전한 힘을 되찾습니다.]

 

거대한 검은 날개와 하얀 날개가 등에서 펼쳐졌고 내 몸에는 은빛 색의 갑옷이 나를 감쌌다그리고 새하얀 빛을 내는 창과 깊은 어둠을 내뿜는 낫이 나타났다.

 

[태초의 빛, ‘아이테르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태초의 어둠, ‘에레보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 힘이 모두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안 돼.... 어떻게 네놈이.....!]

 

카제로스이만 끝내자이 세계는 네놈 뜻대로 되지 않아.”

 

창과 낫이 카제로스의 사지를 잘랐고곧 그 창과 낫이 합쳐져 거대한 검이 되었다나는 그 검을 들고 카제로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헉....! 이게.... 이렇게 될 수는.........]

 

세상을 원망하지 마라고작 네놈의 알량한 욕심 때문에 생겨난 결과니너를 원망하고 너를 증오해라.”

 

거대한 붉은 심장이 점점 사그라져 갔고곧 카제로스의 시체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었다.

 

[태초의 빛, ‘아이테르를 바라봅니다.]

 

난 새하얀 빛을 내는 창을 바라봤다그녀는 사라진 내 빛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내 빛이 되어 사라졌다항상 혼자서 이 세계를 지키고 바라봤다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운명의 붉은 실이 우리를 이어줬으니까.

 

운명의 붉은 실이라...... 나쁘지 않은 미신이야.”

 

[당신은 태초의 빛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태초의 어둠이 되었습니다.]

[태초의 빛이 새로운 생명을 찾습니다.]

 

내 등에 펼쳐진 하얀 날개와 거대한 창이 하나의 점이 되었고곧 그 점이 어느 여인의 모습이 되기 시작했다.

 

[태초의 빛이 탄생합니다.]

[태초의 어둠, ‘김독자가 태초의 빛,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태초의 빛, ‘한수영이 태초의 어둠, ‘김독자를 바라봅니다.]

 

안녕김독자.”

오랜만이야.”

... 글쎄우리 헤어진 지 1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뿜었다.

 

이제는 너 혼자 말고 나와 같이.”

너와 같이.”

 

나와 그녀는 서로 손을 꼭 쥐었다그리고 서로 입을 맞췄다.

빛을 잃었고 어둠으로 가득했었다그런 나에게 한줄기의 빛이 나타났고그녀는 사라진 내 빛이었다오랜 시간 떨어진 빛과 어둠은 붉은 실과 함께 다시 인연이 닿았고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어둠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설화, ‘빛과 어둠의 붉은 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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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신과 인간의 비극적인 독수 이야기로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그래도 즐감!! 개추와 댓글 부탁!!

다음엔 마피아 독수로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