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교집합은 미친소리였다.
적어도 지구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은. 한수영은 당연한 것을 말하듯 생각했다.
한수영은 얇은 옷을 입은 채 바닷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눈이 내리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중이었다. 물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꽤 드문 일로서 눈 없는 크리스마스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십중팔구를 차지하는 건 눈 있는 크리스마스보다 눈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비열이 큰 탓에 육지보다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는 정정했다. 흰 눈을 모래사장의 모래가 대신하는 크리스마스다.
바다에는 수영복을 입은 여행객들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에 입는 옷차림으로서는 미친 짓이지만 이 곳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어째서 당연하냐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지구가 뒤집어지면 가능했다.
그녀는 호주-남반구의 땅에 있었다.
"내가 살다살다 크리스마스에 바닷가를 다 와보네."
"여름이니 와 볼만도 할텐데."
"그러니까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보낼 일이 몇번이나 있겠냐고. 그 말한거지!"
"왜, 불가능한 일은 없지 않겠나? 네가 한 말이다만."
"아니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아예 불가능한 것에 붙이라고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한수영은 미간을 좁힌 채 투덜거렸다. "야, 놀리는 표정을 안 지어도 약 오르게 만드는 건 어디서 배운 재주냐?"
유중혁은 비웃지 않았다. 입가 주변의 근육은 경련의 기미 조차 없었다.
이 말인 즉슨 비웃든 깔깔거리며 웃든 간에 웃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저 놈 지금 속으로 웃고 있는 거 같은데? 한수영은 매우 합리적인 의문을 던졌다. 4년-한 지붕 아래에서 둘이 동거한 기간의 정보들이 이를 뒷받힘 하는 질문이었다.
"어디선가 배웠을 거다. 배운 기억은 없다만 별다른 의미가 없었는 데도 분통을 터트리는 자들이 몇몇 있었지."
거 말 잘해서 좋으시겠습니다. 한수영은 말 없이 투덜거렸다. 입을 열면 진다. 뻔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사라진 김독자가 도서관에 처박혀 있고 유중혁은 스스로 해 놓은 요리만 처먹고 있을 확률로. 그 정도의 확률은 충분히 된다고 보였다. 이지혜가 F로 도배된 성적표를 가져올 확률도 이와 같았다.
유중혁은 슬러쉬 한 잔을 한수영한테 넘겼다. 냉수 대신-차갑기만 하면 뭐든 된다는 전제조건 하에 먹고 속이나 차리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수영은 받아들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더운 여름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재능을 가졌고 시원한 얼음은 상황에 한해서 만병통치약이었다. "짜증내서 미안하다."
시원한 슬러쉬가 목을 식히면서 가물거리는 짜증이 물러갔다. 때마침 바닷바람이 눈치 좋게 불어왔다. 서 있는 곳은 바다였다. 와 바다다. 피곤에 찌들은 애들의 목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바다였다. 하늘도 파랗고 그 아래의 파도도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다가 싫지는 않았다. 여름의 바다만큼이나 시기적절한 것도 없었다. 탁 트인 바다는 넓었고. 그녀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푸른색 하늘이 눈동자에 어리고 있었다. 여름의 파란색이 보였고, 시원한 색이라면 시원한 색이었다. -때로는 검은 색 외의 색들도 유중혁과 어울렸다. 한수영은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비치볼 할래? 시원하게 바다 옆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물에 들어가지는 말고."
"좋을 대로 해라. 뭐든 괜찮으니."
"둘이서인데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애초에 코트부터 없으니 규칙은 못 지키지 않나. 그리고 규칙을 꼭 따를 필요는 없지."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있지 않나. 게다가 너라면 규칙 정도는 필요한 대로 바꿔서 쓸 텐데, 내 말이 틀렸나? 한수영은 유중혁의 질문에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고양이가 장난을 치고는 조용히 발을 뒤로 빼듯이. 늑대와 고양이는 개과와 고양이과인 탓에 어울리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그런 대로 어울렸다.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유중혁은 공을 꺼내들었고, 한수영은 그 옆에서 걸었다. 이번에는 안 봐줄거야, 봐주고 하는 건 없어. 걱정마라, 저번에도 네가 봐준 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거다. 이번에도 내가 이길테니. 농담따먹기 따위가 이어졌고, 유중혁과 한수영은 바다에서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그러면 시작한다?"
불던 바람이 그쳤다. 그에 맞춰 한수영은 씨익 웃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까딱였다.
팡-! 하고 공이 공중에 떠올랐다. 떠오른 순간은 찰나로. 허공의 공은 빠르게 날아갔다. 유중혁은 땅을 박차고 손바닥으로 공을 쳐냈다. 코트로 삼은 선을 빠르게 넘은 공이 한수영한테 달려갔다.
한수영은 모은 두 손으로 공을 위로 띄웠다. 잠시 자세를 낮췄다가. 다시 힘차게 펴냈다. 허공에 뜬 공을 한수영은 한 손으로 때렸다. 공이 다시 선을 넘었다. 날아드는 공에 발 맞춰 유중혁은 손을 휘둘렀다. 손바닥과 충돌한 공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한수영은 힘차게 쳐냈고, 유중혁은 힘을 조절하면서 코트와 가까운 곳에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공은 한수영의 옆에 떨어졌다.
초반의 1점을 넘겨줬다. 한수영은 승점에 상관없이 웃었다. 이기고 지고를 떠들었지만 둘은 승점과 승패 따위를 신경쓰지 않는다.
"잠시 물 좀 마시고 할래?" 1점이 나는 데는 10분이 걸렸다. "그래. 잠시 쉬어라."
한수영은 모래사장에 앉았다. 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다. 유중혁이 한수영의 옆에 있었다. 시선이 곳곳에 가면서 수영복에 각각 그려진 고양이와 늑대가 보였다. 각자 닮았다면서 서로에게 골라준 수영복이었다. 그것을 기억했다. 크리스마스에 수영이나 하라는 쪽지와 함께 수영복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에 담겼다. 둘만이 이해하는 유머감각이었다.
늑대와 고양이는 의외로 잘 어울릴 지도 몰랐다. 보이는 대로는 그러하다. 지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노트에 적었다가 써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데? 하는 생각도 든다. 신작은 로맨스 물로 하지 뭐. 쓰면 여럿에게 돌릴 계획이다.
크리스마스. 다른 말로 하면 12월 25일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다.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날이나 연인들의 날이 된 것은 의미가 퇴색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를 퇴색되었다 보다는 때, 시, 그리고 당사자들에 맞춰 변화한 것으로도 부른다.
이번 해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다른 크리스마스였다. 집 근처 1호선의 전도사들이 계속 꼬투리를 잡곤하면 저희는 고양이랑 늑대라서 안타깝게도 못알아 듣겠네요. 라는 말을 해줄 용의가 차고 넘친다. 그렇게 말하면 유중혁은 말을 받아 줄 것이다. 어울린다는 말은 자주 못 들었어도 유머감각은 어딘가 서로 맞는 부분이 있었다.
늑대와 고양이는 꽤 잘 어울렸다. 당사자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