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15일은 쌀쌀했다. 흰 눈이 내리고 있었음에도 살이 베일 듯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 장씩 종잇장을 넘기던 한수영은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봤다. 몇 년 전의 겨울에, 직접 김독자한테 선물했던 책이었다. 한수영은 책을 옆으로 밀어냈다.


 겨울의 저녁. 한수영은 말없이 창 밖을 내다봤다. 부는 바람에 짧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 날은 김독자의 생일이다. 이 날에 웃었던 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독자가 있던 해에는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던가. 이 날에 웃을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붕 위에 쌓인 흰 눈이, 잊지 못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한수영은 창가에서 물러나 레드 와인을 유리잔에 따랐다. 유리잔에 투과된 붉은 빛이 탁자 위 리볼버에 닿았다.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한수영은 창가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눈이, 이제 보니 싸늘해 보인다. 헛웃음을 지은 한수영은 책에서 종이를 뜯어 화롯불에 집어 던졌다. 흰 종이가 불에 사그라들면서 활활 타올랐다. 동시에, 창가에서 날린 눈송이가 옆에서 녹아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종이에 헛웃음이 짙어졌다. 어쩌면 헛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일지도 모른다. 주인을 꼭 닮은 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처럼 김독자는 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흰 눈을 닮았다던가 아니면 흰 종이를 닮았다던가 하면서 농담따먹기 하던 것이 떠올랐다. 구역질 나는 내용의 농담이었다. 어느 기점부터는 구역질 나지 않는 것도 없었지만.


 이 날은 김독자의 기일이었다. 생일인 동시에 기일이라니, 웃기기도 하지. 그러나 한수영은 웃지 않았다. 비웃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졌다. 웃기에는 너무 지쳐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죄다 지쳐서 그만 두고 싶었다. 작가 인생은 이미 끝내버렸다. 출판사도 이 날이 지나면 더 이상 협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김독자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진은 몇시간 전에 불태운 지 오래였다. 한수영은 다시 눈을 떴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좋겠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 놓은 와인을 한 잔 마시자 입가에 와인이 묻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랜 소원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한수영은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곧 그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한수영은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한수영은 한숨을 쉬었다. 김독자가 원망스러웠다. 떠나간 날 부터 이 날이 되도록 원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원망스럽지 않았다. 지쳐서는 아니었다. 그리워서였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한수영은 리볼버를 장전시켰다. 한수영의 목숨은 쉽게 끊길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닮았다고 하던가. 그러므로 한수영의 목숨은 불길에 눈이 녹듯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한수영은 김독자를 닮고 싶었다. 이번에 비는 염원은 장난스러운 비유도 아니었다.


 한수영은 언제나 김독자를 찾아가는 역할이었다. 먼저 멀리 간 김독자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았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무슨 방법을 쓰든 미련 없이 실행할 것이다. 종이를 태우듯 방법은 쉬웠다. 한수영은 작가로서 종이를 아끼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종이는 밖에 널린 눈처럼 흔한 것에 불과하다.


 곧 만날 연인을 위한 축배를. 조금 남은 와인을 한수영은 그대로 들이켰다. 언제나 김독자의 앞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듯 리볼버를 장난처럼 한 바퀴 돌렸다.


 탕-!


 불 위에 피가 쏟아졌다. 죄다 뒤섞여 뭐가 붉은 지 알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