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 “마왕, 괜찮나? 안색이.”

 

마왕은 고민하지 않고 용사를 안았다. 기억을 보는 동안에도 계속 울었지만, 또 울면서 용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마왕 : “흐으윽. 으으윽. 용사. 용사.”

 

용사 : “. , 나 여기 있어.”

 

마왕은 용사의 품에서 한참을 울다가 진정이 된 듯 용사에게 자신이 기억 속에서 봤던 내용을 말했고, 용사는 진실을 알아갈 때마다 심장에 손을 얹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용사의 모습을 보는 마왕은 그만 말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용사가 끝까지 알려달라며 자신의 손을 강하게 붙잡자, 결국 용사 파티의 속마음까지 말해주었다.

 

마왕 : “용사. 흐극. 미안하다. 어떻게 여신에게까지. 흐윽. 이런 일들을 겪었단 걸 모르고 널.”

 

용사 : “괜찮아. 난 괜찮아. 오히려 고마워. 덕분에 저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미안.”

 

마왕 : “그대가 내게 사과할 게 뭐가 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용사 : “사실은. 네가 내 기억을 볼 때, 어째서인지 나도 네 기억을 조금 보게 됐어. 케스펠 마을에서 내 신념을 물어봤던 소녀가 너였구나. 그리고, .”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는 용사. 점점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마왕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어본다.

 

마왕 : “, 용사. 어디까지 본 것이냐?”

 

용사 : “. 나에 대한 기억과 마음 전부.”

 

마왕 : “.”

 

마왕도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두 남녀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며 시간이 흐르다가 용기를 낸 용사. 마왕의 손을 잡고 입을 땐다.

 

용사 : “마왕, 넌 내가 봤던 그 누구보다도 고결해. 널 마왕이 아니라 성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마왕 : “. 뭐냐, 본좌는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는다.”

 

용사 : “너의 약점을 찾기 위해 잠입했을 때 너의 모습을 기억해. 간부들의 이야길 끝까지 귀담아듣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 검사하면서 사기를 올리고, 최전선에서 항상 독려한 너의 모습을. 그리고 네 기억을 엿봤을 때 그 모든 게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았어.”

 

용사는 그 말과 동시에 눈을 감으며 그때의 회상을 하기 시작했다.

 

용사가 자신의 옛 직업의 특기를 살려 일회용 위장막을 만들어 마왕의 성을 정찰할 때 용사는 마왕을 처음 봤다. 용사는 마왕의 약점을 파악하고자 마왕 주변을 돌아다녔었다. 하지만 용사가 본 마왕의 모습은.

 

마왕 : “? 뭐냐, 휴식 시간이었나?”

 

마물 A : “, 마왕님! 충성!”

 

마물 B :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벽돌을 너무 오래 짊어져서 그만.”

 

마왕 : “그런가. 내놔라. 내가 하지.”

 

마물 B : “, 하지만.”

 

마왕 : “아앙? 병사들의 건강은 곧 사기로 직결된다! 아프고 다쳤으면 쉬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리치 녀석한테 말해놓을 테니 가서 쉬어라! 그리고 넌 전우조로 같이 가고. 실시!”

 

마물 A, B : “, 실시!”

 

용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참군인인데? 최고의 상관인데? 뭐지? 설마, 내 존재를 눈치채고 연기하는 건가? 일단은 계속 마왕을 미행하는 용사. 다음 장소는 간부들의 회의실이었다.

 

노스페라투 : “, 마왕님. 이번 용사 파티에 대한 전략에 대해서 말입니다.”

 

리치 : “아니, 그 문젠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마왕 : “아니다. 말해보게, 노스페라투.”

 

전략에 대해선 폭넓게 알지 못하는 용사지만, 마왕은 전략을 짬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간부들에겐 무시됐던 의견도 경청해 참고하거나 유연한 전환이 가능하도록 조율했다.

 

용사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모습이 다름 아닌 마왕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걸. 여태 만나고 같이 지내왔던 인간들보다도 더 인간적인 모습에 용사는 몸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아 버렸다.

 

머리를 감싸며 혼란스러워하던 용사. 정신이 들었을 땐 마왕이 자신의 앞에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들켰나 싶어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있을 때, 마왕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마왕 : “용사 무리가 곧 온다는 전보에 다들 주눅 들었군. 사기를 올리려면. 짧게 연설하고?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최전방에 서서 용사와 직접 싸우는 건 내가 하고, 다른 녀석들은 용사의 일행을.”

 

용사는 위장막을 뒤집어쓰고 쭈그린 채로 마왕을 빤히 보고 있었다. 굉장히 인간적인 마왕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용사는 마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용사는 마왕의 숨은 노력을 보고 감명받았다.

용사는 마왕의 고결한 인성에 감탄했다.

용사는 마왕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은 용사이고, 그녀는 마왕이기 때문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 용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며 체념했다. 그리고 자리를 일어나 성을 나가며 마물들의 마왕에 대한 감사와 존경, 그리고 맹세를 들었다.

 

용사는,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마왕과 자신이 평화로운 곳에서 반날 수 있길 바라며 파티로 돌아갔다.

 

회상을 끝낸 용사는 마왕의 눈을 응시하며 계속 고백했다.

 

용사 : “내가 추악한 인간들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모습이, 너에게서 나타났어. 그걸 알아차렸을 때부터였을까. 나도 너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건. 널 죽이는데 망설임이 들기 시작했던 건.”

 

마왕 : “그대여!”

 

마왕이 용사의 눈을 보자, 용사의 눈은 다시 빛나고 있었다. 과거의 투지와 고결함이 담긴, 진짜 용사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용사였던 시절의 눈. 자신감 있고 당당하며 흔들리지 않는 눈빛. 그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 “한심하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말할게. , 생각이 바뀌었어.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그러니까. 네게 의지해도 될까?”

 

용사의 고백을 들은 마왕은 표정이 밝아졌다. 이게 웬 기회인가! 운명이 갈라놓았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니! 용사가 제 발로 내게 온다니! 자신의 권위마저 잊을 정도로 행복한 얼굴로 용사에게 고백한다.

 

마왕 : “본좌의 기억을 봤다면 긴말하지 않겠다. 와라. 네 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해줄 테니 내 투사가 되어라. 무채색의 내게 색을 불어넣어 준 너와 영원을 같이하고 싶다. 그러니. 함께 있어 주겠나?”

 

용사는 슬며시 웃으며 마왕의 손등에 키스한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웃는 마왕. 마왕이 반대편 팔을 뻗어 공간 이동 포탈을 만들고 용사를 부축한다.

 

마왕 : “기억을 봤을 때도 그렇고, 피해를 주는 마법이 아니면 문제없는 건가?”

 

용사 : “. 그래서 포탈은 잘만 타고 다녔어. , 맞다. 마왕, 나 하나만 더 부탁하자.”

 

마왕 : “무엇인가, 용사여?”

 

용사 : “날 용사라고 부르지 말아줘. 더는 용사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

 

마왕 : “용사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하긴 생각해보니. 그렇겠구나. 그럼 뭐라 불리길 원하느냐?”

 

투사 : “카론. 내 이름이야.”

 

마왕 : “카론. 카론. 후훗, 드디어 그대의 진명을 알아 기쁘군. 그럼 그대도 본좌를 이름으로 부르거라.”

 

투사(카론) : “잠깐만, 넌 마왕이잖아. 내가 암만 전직 용사였다고 해도 이제 네 성에 가면 난 하급자라고.”

 

마왕 : “본좌가 허했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만약 뭐라 한다면 당장 내게 고해라. 그 녀석을 통구이로 만들어줄 테니. 그리고 본좌의 진명은 아샤! 꼭 기억해라!”

 

투사(카론) : “아샤라. 뭔가 희망찬 이름이네, 아샤.”

 

마왕(아샤) : “그런가? 칭찬으로 듣지.”

 

두 남녀는 서로를 보고 웃으며 포탈을 넘었다.

 

-------------------------------------------------------------------------------------------------------------------------------------------------

 

한편 그 시각, 마법사 로잘린은 자신의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예언의 석판을 연구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사(로잘린) : (어떤 원리로 이게 예언이 새겨지고 바뀌는지 알아내 보이겠어. 이것만 성공한다면 내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어. 마법학회 총장은 오직, 나 하나여야만 해.)

 

이전엔 용사와 자신이 자주 싸우면서 알게 된 지식을 자신이 알아낸 지식인 것 마냥 학회에 제출해 손쉽게 총장이 됐지만, 용사가 탑에서 떨어져 사라진 이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 총장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그랬기에 모두가 연구에 도전했었지만 아무도 성과를 내지 못한 예언의 석판을 조사하겠다 선언했고, 제자들을 갈아 넣어서라도 찾아내겠다는 집념으로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로잘린은 용사와의 여정을 떠올렸다. 마왕 토벌을 위해 왕궁에 모였던 자신과 다른 이들. 사제가 데려와 소개한 용사. 솔직히 첫인상은 꽝이었다. 용사라면 무릇, 키 크고 잘생기고 검술의 천재 아닌가? 그런데 자신의 앞의 이 남자는 자신과 키가 비슷하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칼을 쓸 줄 몰랐다. 손에 든 이상한 물건이 자신의 무기라고 말을 하질 않나, 온몸을 꽁꽁 싸맨 방어구를 개조하면서 입질 않나, 노출도 높은 옷은 방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고. ‘네가 뭔데 날 가르쳐?’ 라는 생각으로 그와 자주 싸웠다. 하지만 끝은 항상 용사의 사과였다. 내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의견에 반박한 건지 몰랐기에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로잘린은 그때마다 용사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마법사(로잘린) :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로잘린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랬으면 안 됐다. 용사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 당연히 이 세계의 문화나 양식을 모른다. 용사가 이 세계에 적응하게 된 건 사제의 도움도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의 말싸움이 용사의 적응을 도운 것이다.

 

마법사(로잘린) : (차라리. 차라리 그때 말싸움이 아니라 가르침을 줬더라면. 용사가 내 곁에 있었을까?)

 

로잘린은 용사의 학구열을 떠올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견습들은 자신과 같다. 더 높은 지위, 부와 명예만을 쫓는 불나방들. 이론에만 몰두하는 책상머리들. 그에 반해 용사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딸려오는 이득보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고 유용한지를 따졌다. 피곤할 텐데도 자신들이 쉴 수 있게 야간 경비를 서면서 지식을 음미했다. 그 지식들을 응용해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물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로잘린이 그런 용사의 모습을 그리며 조금만 더 잘해줄걸.’하고 생각하며 석판을 보고 있었을 때였다. 석판에서 강력한 파장이 방출되더니 새겨진 글씨가 바뀌기 시작했다. 연구를 보조하던 마법사들은 이 신비로운 현상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로잘린은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 집중하라며 닦달했다. 그때였다.

 

견습 마법사 : “, , , , , 로잘린님! 이걸 보십시오!”

 

마법사(로잘린) : “연구에 집중하라고 했죠?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호들갑입니까?”

 

견습 마법사 : “, 내용이. 내용을 보십시오!”

 

견습 하나가 계속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봐달라고 하자 로잘린은 한심하다는 듯이 석판에 손을 댔다. 그러자 석판의 내용이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바뀌었고, 그 내용을 본 로잘린은 매우 당황해하고 있었다.

 

마법사(로잘린) : “,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있어선 안 된다고!”

 

로잘린은 석판을 부쉈다. 하지만 석판에 새겨진 내용은 조각 하나하나에 모두 새겨지며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었다.

 

로젠탈 왕국에 파멸의 그림자를 덮을 두 영혼이 드디어 제 짝을 찾았다.


------------------------------------------------------------------------------------------------------------------------------------------------


TMI

카론은 고대 그리스어로 '기쁨'을 뜻하는 카라(Chara, χαρά), 아샤는 힌디어로 '희망'(आशा )을 뜻함


후붕이들 댓글 볼 때마다 내 생각을 읽는 것 같아 두렵다

후회 느낌은 초반부터 막 펑 터트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흔한 후회 마냥 써본거긴 함

물론 나중에 가면.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