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5편


***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흑빛깔 머릿카락.

자연스레 시선을 올려다보게되는 커다란 키, 그리고 백옥같은 피부까지.

그곳에는 내가 익히 봐왔던 익숙한 모습의 나츠키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선배? 선배 맞죠??"


"...료스...케...?"


그동안의 잠적에 대한 원망도, 무시에 대한 서러움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선배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다름 아닌 안도였다.

다시 볼 수 있음에 대한 기쁨섞인 안도, 나를 알아봐준 것에 대한 감사의 안도.

그리고 멀쩡히 살아 있어준 것에 대한 안도까지.


윤기 흐르던 머릿결이 조금 푸석푸석해지고 눈 밑에 다크써클이 강하게 진 것만 빼면 선배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 두 사항이 결코 쉽게 넘길 거리가 아니었다는거지만.


"선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그 차림은 또 뭐고..."

"눈은, 눈은 또 왜 그래요? 잠 많이 못 주무셨어요?"


그 나츠키 선배가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것은, 분명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거나 그에 준하는 일을 겪었다는 말.

안 그래도 평소 학교에서부터 선배에 대한 걱정으로 골머리를 썩혔던 나는 그런 선배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료스케, 네가 왜 여길..."


"지금 중요한게 그게 아니잖아요 선배...!"

"학교도 빠지고 배구부도 탈퇴하고...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


"료...료스케 그,그게...."

"나,난... 그러니까....!!"


나는 선배를 향하여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선배는 도리어 나를 보곤 서서히 뒷걸음질 하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그만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선배?"


"...안해."


"네? 그게 무슨 말..."


"미,미안해애애애...!!!!!"


머릿속을 뒤흔드는 강렬한 비명과 함께 선배는 사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 비닐 봉투마저도 내팽겨 둔 채 말이다.


"...ㅈ,잠깐만요! 미안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히...히에에에엑!!! 따,따라오지 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냐니깐요...!!"


나는 깜짝 놀라 선배를 따라가보았지만, 배구부 에이스인 선배를 쫒는것은 생리적으로 무리였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마냥 내가 한 걸음을 내딛으면 선배는 다섯 걸음을 앞서갔다. 점점 빨라지는건 덤이었다.


"허억... 헤엑....!!"

"서,선배에에...!! 잠ㄲ,잠깐만.... 잠깐만요...."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아...!!"


"그게 아니라 선ㅂ...헤엑...!!!"

"쿨럭!! 서,선배 잠깐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얘기 좀...!"

"대체 무ㅅ, 무슨일...인ㅈ....우아아아악!!!"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되었다.

문득 느껴지는 통증에 무릎을 바라보니, 딱딱한 바닥탓인지는 몰라도 꽤나 크게 쓸려있었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감촉과 더불어 느껴지는 피로감이 힘 빠진 내 몸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피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낭패였다.


"...!"

"료...료스케...?!?"


그러자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선배는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뒤 선배가 충분히 접근하자, 나는 벌떡 일어나 선배를 붙잡았다.


"...자,잡았다!"


"ㅁ,뭔...! 비,비겁해...!!"


"비겁한게 아니라 똑똑한거죠!!"


"너,너 처음부터 이러려고...!"


"...그렇다고 일부러 넘어진건 아닙니다만!"

"이거 진짜로 아프다ㄱ...와악!!!"


선배는 팔을 힘껏 흔들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것이 바로 피지컬이라는건가?


비록 힘없이 선배의 손길에 따라 로데오 마냥 이리저리 흔들릴 뿐 이었지만, 그래도 버텨야만 했다.

아직 선배에게 듣고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이거 놔...!!!"

"놔... 놓으란 말이야...!"


"읏... 대체 왜 그러시는건데요 선배!"

"그동안 제 전화도 계속 무시하시고, 학교에선 도통 모습을 볼수도 없고!"

"제가 싫어지신거면 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큭, 싫은거 아냐...!!!"

"싫어서 그런거 아니니까..."


"...싫은게 아니라면 저를 피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학교까지 안 오시고, 배구부도 탈퇴했다고 하고... 대체 무슨 일인지 정도는 알려주실 수도 있는거잖아요!!"


"읏, 잠깐...!!"


선배는 간단히 내 손을 뿌리친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차, 싶었다. 지금껏 선배가 이런 반응을 보인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내가 너무 심했던것은 아닌지. 그게 아니면 선배를 귀찮게 한건지도 몰라 속으로 조마조마 하고 있을 때 즈음.

선배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널 위해선 내가 떠나는게 맞아. 이해해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니깐요...??"


"넌 몰라도 돼...!!"

"아무튼 난... 널 볼 자격이 없어..."


설마 했지만 정말로 일부러였다니, 무언가 허탈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선배는 정말로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자격이 없다는건 또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선배."

"어째서 절 그토록 밀어내야만 했는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까요."


"너가 알 필요 없어... 날 좀 그냥 내버려 둬!!"

"알겠어...? 그냥 가. 가버리라구...."


"선배...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싫어요. 도무지 그냥 떠날수가 없을것 같거든요."

"제가 잘못한게 있다면 얄려라도 주세요. 그래야 고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시면..."

"아무리 연습이 끝난지 오래라 하더라도 지인인데... 너무하잖아요!"


정적이 흘렀다.

불어오는 겨울 바람 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이어질 떄 즈음.

적적한 밤하늘 아래 가로등 불빛 너머로, 불현듯 선배의 눈빛이 번뜩였다.


"...료스케."

"너 말이야, 갑자기 왜 이렇게 집착하는건데..??"


"ㄴ,네??"

"왜냐니 그야..."


"너와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뭐 사귀는 사이라도 돼?"

"애초에 연습뿐인 사이였잖아... 그리고 그 연습도 모두 끝났고..."


선배는 꽤나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강하게 쏘아보는듯한 눈빛 탓에 나는 몸이 굳어 섣불리 다가갈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너, 굉장히 성가신거 알아?"

"내가 말했잖아. 지금 너 이러는거 집착이야."


"선배, 그게 갑자기 무슨..."


"조금 놀아줬더니 아주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내가 만만해 보여?"

"아님 내가 쉬운 여자로 보여? 그깟 연습 누구랑도 할 수 있거든? 주제를 알라고...!!"


처음 들어보는 독설이 계속해서 선배의 입으로부터 쏟아져나왔다.

선배에게서 들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심한 말, 동시에 선배라면 하지 않을 발언들.


하지만 어째서일까.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걱정스러웠다.

험한 말을 내뱉는 선배에게서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배는 딱딱할지 언정, 자신과 함께 인연을 쌓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령 허투로 쌓은 가식일지라도 선배라면 억지로라도 그 가식을 계속해서 유지할 터였다.


때문에 나는 그 발언들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에.


"..."


"왜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던거야? 안됐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거든"

"너 같은 애들 따위 차고 넘치거든? 알겠어? 이래서 나랑 너랑은 안맞는 사람이라고 한거야."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알아들었어? 꺼지라고!!!!!!!!"


"...선배."


"...하아? 내 말 안 들려? 내가 방금 뭐라ㄱ..."


"선배, 지금 울어요?"


"...!!"


선배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진지 오래였다.

이후 황급히 눈가를 닦아보았지만 이미 다 들킨 사실을 감추기엔 무리였다.


"우...우,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내가 왜?"


"이미 눈가도 퉁퉁 부었는데 좀 그럴듯한 거짓말을..."


"그,그나저나 이미 온갖 정이란 정은 다 떨어진거 같은데 너...! 그만 가지?"

"좋잖아 안 그래? 명분도 생겼겠다, 이제 평생 안 보고 살면 되겠네! 그치?"


선배는 애써 웃으며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눈가의 눈물은 계속해서 멈출 줄을 몰랐다.

애처로웠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걸까.

대체 무엇 때문에 선배는 나를 밀어내야만 했던걸까.


나는 선배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알아 내야만 했다. 내개 있어 선배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한없이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소중한 사람의 고통을 마냥 방관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자 선배는 당황한 듯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자, 선배는 깜짝 놀랐는지 그만 제자리에 넘어지고야 말았다.


"오...오지마! 내가 말했잖아!"

"귀축! 변태! 바보! 오지 말라ㄱ..."


바닥에 쓰러져있던 선배에게, 나는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선배는 꽤나 당황한 듯 헸다.


"...!"

"너...지금 뭐,뭐하는거야..."


"괜찮아요? 너무 흥분하신거 같은데."


"흐,흥분이라니... 누가 흥분했다고 그래??"


"딱 봐도 흥분해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는구만..."

"울지마요 선배... 힘든 일이 있다면 함께 나눠요."


선배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잔뜩 고인 눈물로 하여금 촉촉하게 젖은 선배의 눈가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건데."

"이렇게까지 너한테 심하게 굴었는데 왜...! 내가 미워질법도 하잖아..."


"아니요, 전혀."

"분명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선배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야기를 하기에 차가운 길바닥은 무리였기에 나와 선배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밴치에 앉은 선배는 내 눈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싫진 않아?"


"네? 제가 선배를 왜 싫어해요?"


"그야 내가 아까 전에 너에게 그런 말을..."


"다 티 나죠. 방금전의 말 모두 진심이 아니었던거잖아요?"

"제가 다 아는데. 선배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걸."

"...그래서, 그동안 왜 저를 피하신거에요?"


선선한 바람과 함께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괜히 무안해진 나는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였다.


"말 없이 피한건 미안해..."

"하지만 다 널 위해서 그런거야... 오해는 하지 말아줘..."


"절 위해서라구요...?"

"그렇게 말도 없이 피한다고 해서 제가 맘 편히 지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신거에요?"

"선배가 진정으로 절 위하신다면 이야기 해주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배는 꿀이라도 삼킨 것 처럼 말이 없었다. 이따금 나의 눈치를 살피며 힐끗 힐끗 처다볼 뿐.

마치 죽은 사람 처럼, 조용히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선배의 마음이 열릴 때 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뒤, 선배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힘없이 말했다.


"...네가 나를 너무 고평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료스케. 난 네 생각처럼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그걸 알고도 넌 나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거, 다 거짓말이었어."

"그리고 그때 나도 보고 있었어... 너가 아이자와에게 차이는거."


"예? 자,잠깐... 네??"


"딱히 보려는 의도나 그런건 없었는데..."

"그냥 길 가다보니 보여서 인사하려고 갔는데 그만..."


"아... 네..."

"그런데 그 얘길 지금 왜..."


"그것 때문에 그런거야... 너가 해어져서..."

"...비로소 네게 접근할 건덕지가 생겼으니까."


"..."

"...네?"


"연습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것도 다 핑계였다고... 너랑 데이트 하기 위한..."

"...최악이지? 이런 선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라던지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이윽고 선배의 눈가로부터 송골송골 맺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윽... 흐윽.... 미안... 미안해 료스케..."

"내가 그때 너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아이자와가 그 모습을 보는 일도 없었을테고..."

"그랬더라면... 너희 둘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텐데... 흐윽...!"


결국 선배는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쏟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선배가 울상을 지은 적은 있어도, 이토록 격한 감정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선배..."


"내가... 내가 다 망쳐버린거야... 내가 너희 둘을 갈라놓은거라고...!!"

"내 어줍잖은 사심 때문에... 흐윽... 다 나 때문에... 훌쩍, 흐으윽...."

"나 때문에에... 훌쩍, 흐아아아아앙....."


그제서야 그동안 쌓였던 모든 의문들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선배가 그토록 힘이 없었는지. 어째서 선배가 나를 피하려고 했는지.


선배는 모든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선배... 일단 진정해봐요."


"흐윽... 그래서 널 볼 수 없다고 말했던거야... 난 널 속였으니까..."

"미,미안해... 미안해 료스케... 훌쩍, 흐으으...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미안해에에... 흐윽... 쿨럭, 흐으윽...."


"선배."


"으,으응...?"

"...!!!"


나는 두팔 가득 선배를 껴안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선배와 포옹은 연습한 적이 없었는데.


보드라우면서도 까슬까슬한 감촉과 왠지 모르게 안심되는 느낌.

정감가면서도 눅눅한 선배 특유의 향이 섬유 너머로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잦아든 주변 소음들의 빈 공간 사이로, 자그마한 심장 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뭐,뭐하는거야..."


"선배 탓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요."

"어차피 언젠가는 깨질 운명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이자와도 절 그닥 반기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전 연습 재밌었는데요 뭐. 그럼 된거 아니에요?"


"...이러지 마. 나같은게 뭐가 좋다고 계속...!"


"선배는 재미 없었어요?"


"....그건 아닌데..."


선배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저보고 싫지 않나고 하셨죠?

"다시 한 번 말씀그릴게요. 전혀요. 싫지 않아요."

"대신 말없이 잠적하거나 홀로 속을 썩이는 선배는 싫어요. 제가 선배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째서?"


"어쨰서라뇨, 당연하잖아요?"

"그게... 크흠...! 선배가 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저도..."

"...저도 선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니까요."


"...???"


"그... 저기... 선배만 괜찮다면 중단되었던 그 데이트, 계속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번에는 연습이 아닌 실전으로..."


나와 선배는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신이 감전된 것 처럼 짜릿하게 떨려왔다.

고요하던 주변도 어느덧 조심스레 울리는 고동음으로 점차 채워지고 있었다.


"..."

"...으 ....으으으"


"...선배?"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으윽, 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


선배는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폭발하는 것 마냥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깨가 서서히 젖어감을 느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왜,왜 울고 그러세요..."


"나... 훌쩍, 너무 기뻐서... 흐으윽..."

"그치만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나 해서..."

"흑,미안.... 미안해 료스케... 내가 몹쓸 짓을... 후아아아앙..."


나는 흐느끼는 선배가 진정할 수 있을 때 까지, 등을 두드리며 묵묵히 위로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선배였지만, 그녀도 결국은 사람이었나보다.


선배의 눈물이 그칠 때 까지 나는 선배와 같이 골목을 걸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함께였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잠시 뒤, 조금 진정이 된 선배는 눈물을 닦으며 내게 말했다.


"훌쩍, 미안... 최악의 고백이 되버렸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하는 거였는데... 푸에훙!!"


나는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순백색의, 딸기모양 자수가 자그마하게 박혀있는 손수건.

그때 나를 위로해주며 선배가 내밀어 주었던, 선배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받아 든 선배는 꽤나 의외라는 듯 한 반응을 보였다.


"고,고마워... 훌쩍."

"근데 이거 내 손수건 아니야? 왜 너가..."


"그때 제게 선배가 빌려주셨었잖아요."

"돌려드릴게요 이제.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어찌보면 그때의 선배덕분에 지금의 제가 여기에 있는거니까요."


"...너무 부끄럽게 그러지 마."

"손수건 하나 빌려준 것 가지고 뭔..."


선배는 손수건을 대충 포개어 접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은 어느덧 늦은 저녁. 날씨도 부쩍 추워질 즈음 선배가 말했다.


"그래서, 아이자와에겐 어떻게 말하려고?"


"하... 모르겠어요 이젠. 애초부터 이미 해어진 상태였는데요 뭐."

"아이자와는 왜 궁금하신데요?"


"아이자와가 어떻게 말했길래 네가 망했다고 까지 한걸까 해서..."


"그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고 했어요."

"지금은 배구 때문에 안된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이전이랑 똑같은 답변이죠 뭐."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잖아...?"

"나중으로 답변을 미룬다는 말은 거절을 의미하는게 아니라고?"

"혹시 모르니까 다시 생각해봐. 물론 나라고 네가 싫은건 아니야. 다만..."


"원래 제 목표는 아이자와 였다, 그 말씀이세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사실 이야기도 많이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알던 아이자와는 이제 없어요.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아이자와에게 있어 1순위는 배구고, 저는 거기에 방해되는 장애물 취급이잖아요...?"


"료스케..."


"근데 그게 또 완전 억지는 아니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잖아요? 제가 이기적인거니까..."

"그래서 든 생각이 어쩌면 나랑 아이자와는 안 맞을수도 있겠다... 였어요."

"반면에 선배는 뭐랄까... 아이자와와는 달랐어요. 함께 있으면 왠지 안정되는 느낌...?"

"무엇보다 선배는 이미 제게 있어서 없으면 안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너무 오글거리잖아.

스스로 뱉은 말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무렵, 게슴츠레 나를 바라보던 선배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으으음."

"료스케. 잠깐 여기좀 봐봐."


"네? 갑자기 왜..."


입가에 축축하고도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음을 깨달은것은 그로부터 꽤나 시간이 지난 후의 시점이었다.

두 눈을 뜨자 선배에게서 나온 미온의 숨결이 나의 콧잔등을 미약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선배는 내심 부끄러웠는지 나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 선 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대답을 안 했던 것 같아서."

"이 정도면 좋은 대답이 되었으려나?"


"이,이게 지금...?!?"


"내일 아침 8시까지 내 집 앞으로 와."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늦으면 혼낼거니까 그렇게 알아~"


"선배, 그...말인 즉슨...?"


"몰라~ 알아서 생각해.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 뿐이야."

"...그리고 이제 둘 만 있을 때는 나츠키라고 불러. 후훗."


소리내어 웃으며 멀어져가는 선배를 보며 내심 다행이라고 느꼈다.

저렇게나 밝은 얼굴인데, 어째서 평소엔 그토록 힘을 주며 구기고 다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도 몰려왔다. 선배의 말처럼 아이자와가 내게 아직 마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뭐,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아이자와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설령 사랑하더라도 이미 나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으니까.


더 이상의 고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실연 보다는 지금 내게 일어난 기적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 이거면 된거야.

아픔보다는 행복이 더 좋은 법이니까.

나의 진심은 이제 더 이상 아이자와가 아닌, 선배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


옛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부지런한 이는 앓을 틈도 없다.' 

말 그대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 버렸다.


산산한 가을바람이 콧잔등을 간질임이 느껴졌다.

그래, 그러고보니 작년 가을도 이런 느낌이었지.


그동안 배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배구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루도 연습을 빠진 날이 없었고 드래프트가 다가올 시점에는 24시간이 부족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 있어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수줍고 풋풋한 신입생이던 나는 이미 과거의 산물이 되어버린지 오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4달후면 성인이 되는 프로 배구 입단 예정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모든걸 다 이루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


물론 기쁘지 않은건 아니었다. 처음 입단이 확정 되었을 땐 뛸듯이 기뻐 했으니까 말이다.

부모님도, 감독님도, 주변 부원들도.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내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나를 축하한답시고 샴페인을 터트렸다가 천장을 부숴버리는 바람에 곤혹을 치뤘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마음속에 무언가 응어리진 듯 한 이 느낌은 도무지 무슨 짓을 해도 해소 되지 않았다.


어쩌면 선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츠키 선배. 우리 학교 부동의 에이스이자 드래프트 예비 지명자 1순위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던 전설.

그러나 선배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열릴 즈음에 선배는 더 이상 배구부가 아니었으니까.


당시 추억을 회상해보자면 참 어이가 없었던 것 같다.

선배는 근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학교를 결석중이던 상황이었고, 배구부 내에서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선배가 체육관 문을 열고 나타났다.

허리를 꼿꼿히 편 채 당당하게 감독님 앞으로 걸어간 선배가 꺼낸 말은 다름 아닌 "그만 두겠습니다." 였다.


당연히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 모두가 당황하여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을 정도니까.


나는 아직도 그 날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체육관을 나서는 선배를 내가 급히 불러 새웠을 시점이었다.


"선배... 선배!!"


"응? 아아. 아이자와."


"허억, 허억... 대체... 대체 무슨 생각이신거에요??"

"배구부를 왜... 선배가 왜 그만두는데요?"


"그게, 조금은 복잡해서 그래."

"쨋든 좋겠네. 내가 없으니 네가 지명될 확률도 더 늘어났잖아. 너라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거야."

"...그러고보니 전에 날 이기겠다고 하지 않았어? 축하해. 정말 날 이겨버렸네."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으면 선배가 저런 말을 한걸까하며.


선배를 이기겠다고 한것은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한 경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렇게 한 쪽이 먼저 빠져 버리는걸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래서 그만 둔거에요? 날 동정해서요?"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됐어요! 듣기 싫어요! 혼자 이렇게 멋대로 빠져 버리는게 어딨어요??"

"...그래서 이제 뭐 하실건데요? 배구가 아니면 뭐, 다른 진로라도 있으신거에요?"


"음... 아마 공부를 하지 않을까?"


"고... 공부요???"

"선배 3학년이잖아요... 이제와서 수험 공부를 한다구요??"


"그게... 새로운 가정 교사가 생겼거든. 헤헤."


그렇게 선배는 떠나갔다.

나에게 커다란 충격과 의문만을 남긴 채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제와서 수험이라니, 말이 안되잖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선배에게 큰 불이익이 있을것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난 선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동안 봐왔던 모습이 아닌, 생기와 총기가 넘치는 그 눈빛 때문에.

그 쓸데없이 각오에 가득찬 눈망울 때문에 나는 선배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뭐였을까. 그 배구 밖에 모르던 선배를 바뀌게 만든 것은.

한없이 공허하던 선배의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넣어준것은.


단순한 반항심? 그게 아니라면 소소한 반향?

뭐, 어디까지나 진실은 본인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만약 선배 때문에 이 응어리가 생긴거라면.

그렇다면 이 응어리의 정체는 분노와 수치일것이다.

선배에게 패배했다는 분노와 끝까지 선배에게 농락 당했다는 수치 등등.

그동안 2인자로써 쌓여온 설움일테지.


하지만 달랐다. 

지금의 나는 선배에게 화가 나지도, 선배에게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속의 이 알 수 없는 허함은.


외로움? 그게 아니라면 애정결핍?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계속 외로웠고,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해 왔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이 허함을 체워줄 존재는 단 하나.


오직 료스케 뿐이었다.


사실 그동안 계속 기다려왔다. 

드래프트를 비롯하여 모든 일정이 끝나기를.

그리고 다시 한 번 료스케를 만날 타이밍이 오기를 말이다.


그때 카페에서 료스케를 다시 만난 이후로부터 쭈욱.

팀원들과 함께 패스를 할 때도, 하루 1000번의 토스를 연습할 때도.

감독님의 지도를 들으면서도, 팔 뼈가 부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 때도 내 버팀목은 오직 료스케였다.


료스케가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었고, 료스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따지고보면 내 꿈 자체가 료스케의 산물이니 말이다.


한때 료스케에게 매우 모질게 군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다던지, 일부러 거만하게 군다던지 하는 등.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너만 좋다면...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하지만 그런 나를, 료스케는 받아주었다.

나의 과거를 용서하고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매일 밤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때문에 그를 생각하며 버텼다.

아무리 적은 문자라도 나누면 뿌듯했고, 단순히 그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그에게 매우 끔찍한 짓을 저질러 왔었다는 것을.

바보같이 사념에 사로잡혀 나의 소중한 인연을 잃을 뻔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인터하이도, 드래프트도 없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목표와 진심을 담은 인연 중 절반을 이미 이뤄냈으니, 남은건 다시금 료스케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 뿐.

나는 전화기를 꺼내 조심스레 자판을 두드렸다.


[안녕. 오랜만이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시간 있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오랜만에 쓰는 문자는 퍽 어색했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어떤 인사를 해야할지 등등 고민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다.

대체 료스케는 이런걸 하루에 한 번씩 어떻게 해 온거야?


잠시 뒤,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료스케의 전화였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가라앉힌 후, 조심스래 전화를 받았다.


"여...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이자와?"


"어? 어어... 나 맞아.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네."

"그건 그렇고 만나자며, 무슨 일이야?"


"어? 그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아아. 알겠어."

"어디로 가면 돼?"


"그, 우리 처음 만났던 그 카페 기억나? 거기서 만나자."


"알겠어. 학교 마치고 바로 가면 되지?"


"으,으응... 그때 보자."


행복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거구나.

목소리만 들어도 설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기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것은 당연했다.

기다릴 수 없었다. 1분 1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료스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가슴이 떨려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았다.


만나면 어떻게 말해야하지? 

뭐라고 말하는게 좋을까?


그동안 미안했다고? 

처음부터 분위기를 너무 잡치는게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 계속 너만 생각하며 버텼다고? 

너무 징징대는거 같아서 별로잖아.


너가 사라지고 나서야 네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이건 너무 비호감이니까 절대 하지 말자...


고민을 많이 하니 또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행복한 고민이라는 말이 정말로 있는 현상이었구나.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마칠 때 즈음이 되니 다리가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토록 바라왔던 재회의 순간이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지 않은가.

카페로 향하는 내 발걸음도 기분을 반영하듯,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넌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지금도 내게는 오직 네 생각 뿐이야.'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단 하루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은적이 없었어.

너와 갈라선 뒤로부터는 더욱.


보고싶었어.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네게 다가갈 수가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이젠 너를 다시 볼 수 있어. 너를 비로소 만날 수 있어.

더 이상 나와 너 사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없어.


미안해. 라는 말이 하고 싶었어.

그리고는 좋아해. 라고 말하고 싶어.


"허억... 허억...!"


드디어 나의 진심을 깨달았으니까.

내 진실된 인연은 너라는걸 깨달았으니까.


아아.

정말 행복할텐데.


너를 다시 만난다면.

너와 다시 함께일 수 있다면.


"어서오세요~"


오후대의 카페는 산산했다.

그리 많지는 않은 인원들에 아늑한 분위기.

남녀간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 1년만에 다시 온 카페였음에도 특유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부드러운 의자부터 커피향이 나는 테이블, 맨들맨들하게 윤나는 바닥까지.

지난 3년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짤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료스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을 하였다.


"료스케, 여기야 여기!"


"어... 아! 아이자와!"


"어...어?"


료스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뭐랄까, 조금은 변한 느낌이었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곤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이전의 료스케가 나른한 포메라니안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장성한 리트리버 같은 느낌이었다.

미소도 이전과는 다른, 조금 더 포근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단적으로 말해 더 잘생겨졌다고 해야하나. 뭔가 키도 더 큰거 같고.


"얼마만에 만나는거지 우리?"


"그,그게 아마 1년...?"

"너와 해어진 이후로는 1년 6개월쯤... 되었지."


"이야... 벌써 그렇게 됐나?"

"나도 참, 까맣게 잊고있었네."


"그 옷... 새로 산거야?"


"응? 이거? 아아~ 아니?"

"저번에 너 만났을때도 입고 온 옷이잖아 이거."


"그,그래...? 미안..."


"아이~ 뭐 그런거 가지고 미안하다 그래~!"


분명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걸까.


차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지금도 이런데 만일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아마 난 제자리에 꽁꽁 얼어 붙은 채 아무 말도 못하겠지.

왜 이러는걸까 정말?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난 뭐 평범하지. 공부하고, 모의고사 풀고... 힘들어 죽겠어."

"그래도 고교 3년생의 삶이 다 그런거 아니겠어? 하핫."

"...그러는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어? 아... 그,그게..."


"그,그러니까..."

"....나, 프로 배구선수가 되었어...!"


"어어어어? 정말로??"


"으응. 1순위 지명을 받아서 내년부터 활동할거래..."


"우와아아...!! 진짜? 미쳤네...!!"

"너 그동안 계속 그랬었잖아, 일본 최고가 될거라고! 이제 진짜로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 안 남은거 아니야?"


"그, 그런 샘이지...?"


"이야~ 축하해 아이자와! 진심으로!"


낮 뜨거울 정도의 축하를 받으니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고 해야하나. 단순한 안부인사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만 어째서 계속 아이자와라는 성씨로 불러주는걸까 싶었다.

물론 기우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꼬박꼬박 하나에라고 이름을 불러줬었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난 또 빤히 처다보길래, 이에 뭐라도 끼었나 싶었지. 헤헤..."

"...그래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왔다. 그 순간이.


안 그래도 떨려 미칠것만 같았던 심장이 더욱 고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긴장했던 탓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기, 료스케."


"응?"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그치?"


"으응. 분명 그랬지. 뭔데?"


"그게, 지금부터 말 할건데... 잘 들어줬으면 해."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응, 당연하지. 말해봐. 무슨 이야기인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더 이상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을 가릴 수도 없었다.


"...우리가 해어진지 1년하고도 6개월... 이 지났지?"

"외롭진 않았어?"


"...그게 좀 복잡한데..."

"외로웠지? 외로웠고... 나도 참 힘들었어."

"그래도 견딜만은 하더라고. 남들처럼 명확한 이유가 없던것도 아니고 뭐..."

"어디까지나 네 미래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그래...?"

"...미안해 료스케.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아니야, 미안할 필요가 어딨어."


"그,그래도. 내가 널 멋대로 차버렸으니까..."

"사실 그동안 계속 생각해봤어. 그때 너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게, 참 힘들었을 것 같더라..."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 한들 인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건 아닐테니까..."


료스케는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침묵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뭐야. 그것 때문에 날 부른거였어??"

"내가 말했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난 괜찮아."

"어차피 다 옛날 이야기고, 너가 미안해 할 필요도 하나 없어."


료스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웃음 너머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는걸.


"그래서 할 말은 이게 다인거야?"

"다 끝난거라면 출출한데 밖으로 나가서 뭐라도 먹을래? 내가 살게."


"..."

"아니. 아직 안 끝났어."


"응?"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만족만 하고 끝낼건 아니잖아?


최고를 넘어 너의 진심을 전해.

말해. 말하는거야.


"...이제 앞으로 일정은 없어."

"하루코는 끝났고, 인터하이와 드래프트도 모두 끝났으니까."


"..."


"그래서 말인데... 우리 다시 만나지 않을래?"


"...에?"

"방금 고백한거야?"


"...으응. 고백하면 안돼...?"


"아,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미안해 아이자와."



"..."

".....ㅁ,뭐?"


"말 그대로... 미안하다고."

"무,물론 너가 싫다는건 아니야. 넌 좋은 친구잖아? 내 첫 연인이기도 했고..."

"다만... 타이밍도 그렇고 좀 그래서... 안 될 것 같아."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차였다고? 지금 차인거야?


그렇게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는데.

차였다고?


그럼 나와 료스케의 미래는?

다시금 시작될 인연은?

지금껏 내가 바라온 버팀목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거야?


눈 앞이 깜깜해졌다.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분명 저번에 재결합을 먼저 제안한건 료스케가 아니었나? 그런데 날 찬다고?


왜?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왜?"

"왜 안된다는건데?? 타이밍이라니, 대체 왜??"


"그게... 곧 있으면 프로 데뷔라며."

"지금 같이 중요한 타이밍에 나랑 연애를 해도 될까 싶어서 그래..."


"거기서 프로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말했잖아. 일정은 앞으로 없다고...!"

"설마 아직도 그때 일로 화나 있는거야? 내가 배구에 집중하고 싶다며 너를 찬 일 때문에...???"

"말했잖아, 미안하다고...!! 그때 일은 ㄴ..."


"화난거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내가 싫은거야? 아니라며! 그런데 왜 안된다는거야...!!"


"잠깐, 너 너무 흥분했어."

"열 난다. 일단 진정 좀 해봐."


료스케는 내 뺨에 손을 가져다 서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후 차갑고도 부드러운 료스케의 손결이 볼살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왔다.

평소라면 기뻐서 팔짝 뛰었겠지만, 당혹감에 가려져 감흥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료스케의 손을 쳐낸 뒤 말했다.


"됐고...! 말 해봐."

"왜 안된다는거야? 너가 다시 만나자며, 너가 다시 사귀자며...!!!"


"...전에 너가 그랬잖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너에게 있어 나와의 만남은 유한 하지만 배구는 아니잖아..."

"너에겐 배구가 중요하잖아. 이제 생업이기도 하고... 그러니 너가 좋아하는 일에 조금 더 힘을 써."


"그러니까 말했잖아...!! 지금은 여유로워서 상관 없다고!"

"역시 화난거 맞지? 화난거 맞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괜찮다는데 찰 이유가 없잖아...!!!"


"아니, 아까도 말했듯이 화난건 절대 아니야...!"

"오히려 난 너가 프로 배구단에 입단할거라는 소식을 들어서 한없이 기쁠 뿐인걸."

"하지만..."


"하지만 뭐. 하지만 뭐...!!!"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젠건데...!"


"...우리가 다시 이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담담하게 말하는 료스케.

어쩜 저리 담담할 수 있지?

슬프지도 않은건가? 


난 이토록 괴로운데.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왜...??"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대체 뭣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지.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부족한지 등등.


그게 무엇이든 간에 빨리 듣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말 미쳐버릴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널 믿지 못하겠으니까."

"언제 너가 돌변할지 감도 잡히지 않으니까... 언제 다시금 날 떠날지 모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떠나...?"

"떠날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래...! 프로 데뷔까진 아직 시간도 남았고... 또 그때가 되면 떠난다는 보장도 없잖아...?"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이자와. 미안해..."


아까전의 따뜻하고 밝은 모습은 어디가고, 지금 내 앞의 료스케는 오직 차가운 태도로만 일관하였다.

한없이 이성적인 어조에 뚜렷한 눈빛. 전 여자친구를 대하는 태도라기엔 다소 알맞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맞을지도.


사람이 전 연인을 만나는데엔 크게 두가지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아직 미련을 정리하지 못했을 경우.

미련을 접지 못한 사람은 행동거지나 말투에서 티가 나기에 마련이다.

괜히 구구절절 말을 늘어 놓는다던지, 괜스래 질척해진다던지 등.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말은 최대한 간단 명료하게. 질척 거리기는 커녕 칼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그런 사람들.

이들이 바로 두번째, 마음을 이미 정리한 경우이다.


료스케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나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료스케의 마음은 이미 떠나갔다는 것을.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것을.


"...핑계 대지마."

"지금 나 끊어 내려고 하는거지?"


"자,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이미 마음 떠난지 오래면서... 이럴거면 그때 왜 다시 만나자고 했어?"

"...누구야? 나츠키 선배?"


"뭐...?"


"...맞구나."

"어쩐지... 둘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료스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여전히 그 입을 열지 않은 채, 말없이 내 눈치만을 살필 뿐.

전신에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짜증났다. 

나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친근하게 군 료스케도, 그런 사정도 모르고 괜스래 호들갑을 떨며 기뻐한 나도.

모두가 짜증나고 가증스러웠다. 이쯤되니 내가 이 카페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이자와, 난..."


"됐어. 듣기 싫어."


"...알았어."


"..."

".....나쁜 새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고, 가방을 챙기고, 외투를 입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리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료스케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순간 울컥했다. 

왜 그대로 거기 앉아있는걸까 싶었기에.

예전처럼 붙잡아 주지 않는걸까 기대했었는데, 아니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었던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왜 안 잡는거야...?"

"왜 부정하지 않는거야?? 왜 그때처럼 따라와주지 않는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가만히 있는거야...?"


"...미안해."


"왜, 왜, 왜에에...!!!!"

"정말... 정말로 마음이 떠나가버린거야...?"

"어떻게...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어떻게 그냥 바라만 볼 수 있냐고...!"


"..."


"그동안... 흑, 그동안 너 하나만 보며 버텼는데..."

"나도 힘들었지만 너와 다시 만날걸 생각하며 버틴건데...!"

"그렇게 이 악물고 버텨왔는데 뭐...? 왜 그러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건데...!!"


"...물론 지금이라도 잠깐 만날수는 있지. 하지만 입단 후에는?"

"입단 후에도 넌... 지금처럼 날 사랑할 자신이 있어?"


"훌쩍, 그래! 당연하지!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와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데에...!!"


"...거짓말."


"에?"


료스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난 그저 스처 지나가는 사람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와 배구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그때도 넌 날 선택할 자신이 있어?"

"나라도 배구를 고를걸...? 그 정도로 너에게 있어 배구는 중요하니까...."


"...그래. 네 말처럼 짧은 만남일수도 있어."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거잖아... 안 그래?"

"이전처럼 함께 파르페를 먹고... 함께 영화도 보고... 그렇게 보내면 되잖아. 시간을 값지게 쓰면 되는거잖아...!"

"그것도... 그것도 싫은거야...?"


"그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결국 너와 나 모두에게 상처만 남는걸..."

"프로 생활을 하다보면 일정도 잘 안 맞을거고... 만나는 날도 점차 줄어들거고..."

"그러다가 또 중요한 일정이 생기면 나를 차고 다시금 생각할 시간를 가지게 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그,그래도..."


"...미안해. 하지만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아."

"너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나도 정말 힘들었거든."


'힘들었다'

이 한없이 짧고도 단순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하나하나 꽂혀들었다.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서. 상처가 미칠듯이 아려와서.


힘들었구나. 고통스러웠구나.

하지만 그런 너를, 나는 알면서도 방치해 두고 있었던거구나.

그래. 내가 바보였던거구나.


"그래서... 미안해. 다시 만날수는 없을 것 같아."


"..."

"...싫어."


"...뭐?"


"싫어! 싫다구...!!!!!"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노력해 왔는데... 그래서 프로 배구선수까지 되었는데...!"

"그런데 그 상황에 너가 없으면 어쩌자는거야...? 응? 난 너 없으면 안돼 료스케... 제발..."


"아이자와, 나는..."


어떻게 버텨왔는데. 어떻게 이룬 꿈인데.

꿈도 이루었겠다, 이제 너만 잡으면 되는건데.

이제서야 내 진심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너를 그냥 보낼 수 있겠어?


"흐윽... 그놈의 꿈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집착을 해서..."

"미,미안해 료스케... 내가 잘못했어... 흐윽, 내가 너를 그렇게 차버리면 안됐어...!"

"너가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훌쩍, 아무도 내 고민을 들어주지 않았어... 아무도 날 진심으로 염려해 주지 않았다고...!!"

"그런데 너는... 너는 달랐단 말이야... 너만은 나를 진심으로 대해줬단 말이야아..!!!"


"...아이자와, 일단 진정해봐..."


"바보같고 또 병신같지만...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지마안..!!!"

"흐윽... 너가 사라지고... 너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겠더라... 너가 내게 있어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훌쩍, 흐으윽..."


"..."

"아이자와..."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어쨰서... 어째서 성씨로 부르는거야...? 왜 아까부터 계속 성씨로 부르는거냐구우..!!!"

"흐윽...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 훌쩍... 제대로, 제대로 하나에라고 불러줘...!!! 이름으로...!!!"


"..."


"...그러니 돌아와 제발, 응...? 사랑따위는 바라지도 않을게... 메니저라도 좋아... 아니면 단순한 관객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제발 내 곁에 남아 있어줘... 제발... 흐으윽... 부탁이야... 부탁이니까아...!!"

"흐윽, 흐으윽...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다.


흘러 내리는것이 눈물인지, 콧물인지, 그게 아니라면 침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면 따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저 내 눈앞의 이 남자를 잡고 싶었다.


제발. 내 꿈을 포기해도 좋으니.

배구? 까짓거 은퇴하지 뭐. 그런게 대체 뭐가 중요해?

료스케가 없으면 다 부질 없는 일인데.


"...하나에."


료스케는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 젖은 내 뺨을 넌지시 어루만지며, 료스케가 말했다.


"나도 널 좋아했어. 지금이라고 딱히 싫거나 그런건 또 아니야."

"너가 처음 재결합을 제안해 줬을 때, 솔직히 말해서 기뻤어. 하지만..."


"..훌쩍, 흐윽... 흑..."


"떠나간 마음이 쉽게 돌아오는건 또 아니더라..."

"사람의 마음은, 잃어버렸다가 금방 되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흐윽.... 흑...."

"...미,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훌쩍, 흐에에에엥...."

"내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쿨럭...! 흐윽... 흐으윽....."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오직 단순히 거친 들숨과 날숨을 내뱉는 것 뿐.


왜 몰랐을까?

이미 지나간 인연이라는것을.

나에겐 사랑이지만, 료스케에게는 집착이라는것을.

이제 더 이상 료스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갈게. 이따 과외가 있어서."


"훌쩍, 후으으으... 크흡, 흐에에에에...."

"가...가.... 가아.... 가아아아....."


"...그래."

"오늘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웠어."

"...안녕."


"아아... 아아아..."

"...지마... 가지마... 가지마아아아...!!!!"

"흐윽... 흑.... 가지마... 가지... 흐윽.... 흑...."


하지만 료스케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내 간절한 외침이 무색하게 남은것은 오직 고독, 그리고 정적 뿐이었다.


.

.

.


"...저기. 파르페 나왔습니다."


"왠일로... 다 녹아 있네요."


"그게... 죄송합니다 손님... 재료가 중간에 떨어져서 다시 만들다 보니..."

"다 녹은 파르페는 원하신다면 새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대로 주세요."


"네?"


"주시라구요. 제가 다 먹을게요."


"예.? 예.... 알겠습니다."

"정말,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손님...!"


테이블 위에 놓인 파르페 두 잔.

료스케를 위한 한 잔은 비교적 형태가 멀쩡했지만 내건 아니었다.

흉측하게 녹아내려 제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볼품 없어진 모습.

나는 파르페를 한 입 떠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했다.

나는 단 맛을 좋아하기에, 예전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종종 파르페를 먹곤 했다.

담백하면서도 포근한 식감. 또한 너무 깊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은 맛.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유독 파르페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쩝쩝."


이미 녹을대로 녹아버린 파르페였기에 잔을 비우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남은 한 잔. 료스케의 몫이 될 예정이었던 자몽 파르페였다.


"..."

"...우웩, 써..."


자몽 파르페의 맛은 최악이었다.

오렌지의 단 맛을 상상했건만 정작 느껴지는것은 단맛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떫은 맛이었으니까.

그래, 떫은 맛. 단맛의 몰입을 해치는 장애물이자 미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버러지...

하지만 왠지 오늘따라 그런 떫은 맛이 싫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우욱...!"

"으웨엑... 맛 없어."


"..."

"...훌쩍, 맛 없어... 맛 없다고...."


눈물 섞인 파르페의 맛은 짭짤했다. 더 이상 먹고 싶지도 않았다. 

기껏 만들어 주신 직원분께는 죄송하지만 당장이라고 치워버리고 싶은 맛 이었다.


하지만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의미없는 숟가락질을 하며 내 입 안으로 파르페를 넣을 뿐.


문득 환불에 관한 욕구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입 떠먹었기에 환불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대체 왜 자몽 파르페를 먹겠다고 한걸까 료스케는.

그걸 곧이 곧대로 믿고 시킨 내 선택도 최악이지만 하여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회해봤자 돌아오는것은 없었다.


아무리 후회하고 자책해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미 한 입 떠먹은 파르페를 환불 할 수 없듯이, 이미 떠나간 마음이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남는것은 오직 혀가 느끼는 고통인 떫은 맛.

떫은 맛, 떫은 상처, 떫은 마음 이었다.


"우욱... 욱..."

"...꿀꺽, 흐윽.... 흐으으윽..."


모든것을 스스로 걷어찬 자의 말로.

그것은 자몽 파르페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최고가 되는 것.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기에 나의 진심을 애써 무시했고, 그 결과 최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허전함.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중요한건 진심이었는데.

내게 남은 유일한건 그를 향한 진심 뿐 이었는데.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최고와 진심.


둘 다 지켜 보겠다며 호기롭게 출발한 여정이었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돌아보니 더 이상 내게 남은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둘 중 나는 어느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샘 이다.

최악의 선택, 그리고 최악의 결과.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겠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린 서로 다른 길을 가겠지.

후회하고 또 후회해봤자 떠난 열차를 다시금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우으으으으으....."

".....훌쩍, 후으으으으.... 흑, 흐으윽... 훌쩍, 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오직 내게 남은 고통을.

입 속에 남은 쓴맛과 떪음을 다시금 되새기며 맛보는 것.

그리고 그 감상을 남몰래 조용히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누가 그러던데,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바다의 향이 난다고.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그날 먹은 파르페에서는 바다향이 났다.


***


왠지 모르게 쥰네 길어진 느낌인데, 분량 조절 실패한듯.

이제 에필로그 한 편만 더 하면 진짜 끝임.

마지막까지 응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자몽에서 바다향 안 남. 내가 지어낸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