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시는 수확의 신이었다. 생명이 움트고 성장하며 완연하게 되면 키시는 자비로써 생명을 거뒀다. 어떤 생명도 자비를 거부하지 않았다. 


반대로, 키시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게 자비를 주었다. 키시눈 오직 결과에게만 자비로웠다. 

키시에게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명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해도, 그 끝은 키시의 자비였으니까.


가지의 신 아라카는 늘 키시를 방해했다. 자라나는 생명에게 가능성의 속삭임을 불어넣어 영원한 삶에 대한 무자비를 바라도록 했다. 뒤틀리고, 곪아서 결국 터져버릴때까지.

키시는 그런 생명마저 자비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라카는 뿌리의 신 로르히에게서 생명의 씨앗 한개를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키시가 굽어보는 정원에 가져다 두었다. 여느 때와 같이 다른 모든 생명이 자라나고, 속삭임을 들으며 자비를 받았다. 그리고 그런 자비로움 속에서 씨앗 하나가 발아했다. 자비를 받아야 할 생명 하나를 휘감고서. 

키시는 그런 생명에게도 자비를 주었으나 그것은 무자비했다.


자신이 휘감은 줄기를 붙들고서 그것만이 자신의 자비라는듯. 

키시는 당황했다. 잘려나간 줄기는 사방에서 뒤틀리며 땅으로 파고들고 새 생명이 자라날 정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곤 자비를 거부했다. 

아라카는 마침내 키시를 비웃으며 키시의 앞에 나타났다. 두 존재는 말로써 현실을 재정립하고 행동으로써 정원을 분단했다. 

자비로웠던 키시는 자비로움을 잃었고, 음흉한 아라카는 커져가는 정원에 숨어들었다. 


로르히는 여전히 씨앗을 뿌리고 있었으며 이제는 독초가 된 생명의 씨앗은 다른 씨앗들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로르히는 사라진 씨앗을 눈치채고 독초에게서 씨앗을 빼앗아갔다. 그러자 독초는 다른 생명의 가지를 잘라 자신을 접붙여 살아남았다.


아라카는 정원 여기저기애서 속삭임을 불어넣고는 금새 사라졌다. 속삭임을 받은 생명은 곧 저들끼리 묶여 뒤틀렸다. 그러자 독초가 뒤틀린 풀씨를 잘라냈다. 

키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에 대해 고뇌하던 키시는 곧 두려움에 빠졌다. 자비를 거절하는 독초가 이젠 자비를 베풀며 자신의 일 마저 대신하고 있었다. 키시 자신은 거둬감마저 로르히에게 주어야 하는지 고뇌했다. 그러나 독초는 오직 뒤틀림만을 고사시켰고 그 사실에 키시는 다시금 분단된 정원에서 자비를 행했다.


키시의 사제들은 끝에서 회고하는 이들이다. 죽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이다. 그러한 지식을 남들보다 더 많이 깨우친 이는 존경을 받으며, 끝에서 처음을 되돌아 볼 줄 아는 이는 곧 키시의 혀로 여겨졌다. 다른 이들은 그들을 예언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키시의 혀가 움직였다.

불온한 생명 하나가 영면 대신 영원을 얻으려 한다. 그것을 막을 자비가 내려오니, 그 자비의 이름은 아르위움이다. 

그리고 그들은 시작의 끝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