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은 발을 멈추고 휴식하기로 했다. 그게 30분 전.




“그쪽으로 갔다! 부탁해, 유리!”

“앗차!”

“아하하. 또 실수했어? 조금 잘 해봐~!”

 

 

좋네.

물에 몸을 담근 이레네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종다양한 종족의 미소녀들이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서 고무공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었다. 웃음소리와 첨벙거리는 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쉽다면 아쉽게도, 호숫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수면 가까이에 낮게 깔린 안개 탓에 시야가 나빠서 저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알몸의 소녀들이 한 데 엉켜 노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안개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실루엣을 훔쳐보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호위 대상을 훔쳐보는 게 도의적으로 어떤가는 둘째 치더라도.

하여튼 간에.

생각 외로 물이 따뜻하고 좋았다. 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그야말로 호강이네. 눈도 몸도. 이야. 무진장 출렁이잖아.

 

……저걸 부럽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

 

 

“왜 그래, 이레네? 쟤네들에게 관심 있어?”

“어어어, 어없는데요.”

“왜 말을 더듬고 그래?”

 

 

엘프, 테레지아는 이레네가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레네가 아까부터 동년배 여자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질 못하는 것이다.

저쪽을 부러워하는 걸까 싶었다.

당연하다면 무척 당연하지만, 이레네가 언젠가 남자였던 탓에, 출렁이는 가슴과 보드라운 배, 그리고 늘씬한 허벅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불쌍한 숙명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으음.”

 

 

그리고. 이레네의 현 상황은 둘째 치더라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테레지아가 생각하기에 이레네는 지금 자기 자신을 일부러 고립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오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가까웠던 누군가를 잃고 ‘망자는 산 자와 함께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누구와도 먼저 선뜻 가까워지려 하지 않고, 먼저 접근해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게 과연 옳을까?’

 

 

확실히, 망자는 고독하기 마련이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검은 탑으로 향하는 여정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망자라면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렸을 터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이 고독할 것이며, 모든 것을 걸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과 이어지는 인연의 구속에 적당히 순응하며 느긋하게 탑으로 향하는 망자들마저도 결국에는 가까웠던 존재들이 모두 부스러져 가는 가운데 홀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아무리 망자라도 역시 계속해서 혼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아니, 죽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망자이기에 더욱 외로움에 약할 것이다.

 

테레지아는 그런 연유로 이레네에게 계속 다가가려 했었다.

‘내게 다가오지 마’라는 아우라와 ‘난 외로워’라는 아우라가 동시에 느껴져서, 도저히 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레네에게 귀찮은 엘프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달라붙었다.

엘프는 오래 사니까.

물론 테레지아나, 이레네나, 둘 다 버러지들 사이의 유일한 꽃이라, 테레지아에게도 안식처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으게, 음. 둘이서 공놀이라도 할래?”

“아뇨.”

“그, 렇지? 조금 수준이 떨어지긴 해.”

 

 

반면, 이레네는 이 엘프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놀이를 하자고 말한 건지 그야말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어마어마한 착각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파고들면 귀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눈앞의 소녀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무시하려 했다.

 

물론 테레지아도 굉장한 미소녀지만, 자신과 똑같이 평평하기 그지없는 빨래판이라서 벗으나 마나 똑같다. 그러니 굳이 여기까지 와서 시선을 할애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다못해 튀어나온 곳이 없으면, 나처럼 들어가기라도 잘 들어갔었어야지. 그럼 적어도 벗은 몸에 나름의 가치라도 있었을 거 아니야.

성욕에 조금 상해버린 이레네의 생각이었다.

 

 

“저기, 나라도 상관없다면 안아줄까?”

“네?”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테레지아가 팔을 활짝 펼치고서 시선을 맞춰오고 있었다.

볼품없이 평평한 가슴마저도 가슴을 쫙 편 자세 덕분에 어느 정도 볼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정말로 아무런 감흥이 오질 않았다. 아니, 감흥이고 자시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싶었다. 도무지 영문을 몰라서 말없이 지이이 마주 보아주었다.

그렇게 눈싸움을 약 2초 정도.

테레지아가 힘없이 두 팔을 내리고, 갑자기 얼굴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여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더니 옆자리에 두고 반신욕을 시켜주고 있던 샤이택을 들어서 품에 안았다.

 

첫째로 통짜 금속으로 이루어진 소총에게 반신욕을 시켜주는 건 도대체 무슨 논리를 통하여 행하게 된 행동인가, 둘째로는 저 금속 덩어리가 무겁지도 않은 걸까, 등.

묻고 싶은 건 한 둘이 아니었는데 어느 쪽도 테레지아 특유의 잘 알 수 없는 샤이택 신앙과 관련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뭐라 말을 걸 방법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어? 망아지다. 귀여워~.”

“정말로 말이네! 왜 이런 데 있는 걸까?”

 

 

공놀이를 멈춘 소녀들이 모여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확실히, 작고 귀여운 망아지 한 마리가 원을 그린 소녀들 사이에서 찰박거리며 뛰놀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저 망아지가 수면 위를 걷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땅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듯 수면을 찰박거리면서 소녀들의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는데, 허벅지만큼 잠겨있는 소녀들이 머리를 딱 쓰다듬기 좋은 정도의, 아주 작은 망아지였다.

 

 

“망아지, 라고?”

 

 

테레지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힘껏 노려보더니, 중얼거렸다.

 

 

“테레지아? 왜 그래요?”

“……에흐으시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테레지아가 철벅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중에서 샤이택을 들어 올린 테레지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총구를 소녀들 틈바구니의 작은 망아지에게 겨누었다. 이레네는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뒤따라 일어났다.

이레네가 대체 뭘 할 셈이냐며 테레지아에게 묻는 것보다 빠르게, 샤이택 상단의 홀로그래픽 사이트 뒤로 희미하게 푸른 마력이 모이더니 베를 짜듯 확대경으로 변해간다.

테레지아는 곧바로 견착하고 확대경에 눈을 올렸다.

진심으로 쏠 생각이다.

 

 

“뭐 하는 거예요, 테레지아!”

“조용히 해! 이익, 저 빌어먹을 물말, 이쪽을 눈치챘어!”

 

 

이레네가 고개를 돌렸다. 소녀들 사이로 뛰어다니던 망아지는 어느새 소녀들의 뒤로 이동해서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마치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뭔데요, 저게?”

“이레네! 저 녀석은 식인 말이야! 저 모습은 둔갑한 모습이고!”

“네?”

“아가씨들! 그건 에흐으시커다! 거기서 당장 도망쳐!”

 

 

목소리.

이레네가 고개를 돌리자, 등 뒤의 수풀 속에서 용병 여섯 명 정도가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서 마구 함성을 지르며 호수로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훔쳐보는 놈들이 있었네. 이레네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반면 테레지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는데, 그건 수치심보다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분노 탓으로 느껴졌다.

 

 

“도망쳐! 거기서 나와! 나오라고!!”

“잠깐, 뭐 하는 거야! 이 버러지들아!!”

“아니, 평평한 망자랑 엘프는 조용히 하고 있어! 저게 뭔지도 모르냐!?”

 

 

갑자기 나는 왜. 이레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평평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인데 뭔가 짜증나네. 사실이라 짜증나는 건가? 아, 열받네?

반면 테레지아는 화난 표정을 다 지우지도 못한 채, 그 위에 절망을 덧씌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호수 쪽을 보았다. 아수라장이었다.

저쪽은 평범한 소녀들이다. 호위를 받아야 할.

용병들이 갑자기 나타나 소리를 지르면, 과연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꺄아아악!? 뭐야, 뭐야!?”

“도, 도망쳐!”

“더럽혀질 거야!”

“이, 이봐! 지금 우리는 너희들을 구하러 왔다고!”

“꺼져! 사라져! 으아아앙!!”

 

 

소녀들은 당연하게도, 힘껏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용병들. 이를 한 번, 부러질 듯이 갈고는 호수 중앙으로 달리기 시작한 테레지아.

그러는 사이, 망아지 에흐으시커가 푸르릉, 하고 한 번 울더니 늠름한 모습으로 앞발굽으로 호수 중앙을 툭툭 쳤다. 그 소리는 어째서인지 다른 소리보다도 훨씬 크게 들려서, 소녀들의 시선이 한 번에 집중되었다.

에흐으시커는 푸르릉, 하고 한 번 울더니 호수 중앙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소녀들 중 한 명이 ‘저쪽이 안전하다는 것 같아!’라고 외치자, 모두가 철벅이며 에흐으시커가 내달린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버러지들이 일을 망쳤잖아!”

“테레지아. 저 말을 잡기만 하면 되는 거지?”

“윽. 이젠 말처럼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테레지아가 말을 마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반룡 소녀가 수면 위로 픽 쓰러지더니 물거품을 남기며 순식간에 호수 중앙의 깊은 곳으로 끌려간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갈게.”

“잠, 이레네!!”

 

 

잔뜩 즐기느라 잊을 뻔 했지만, 쟤들은 호위 대상이잖아.

절대 죽게 두어선 안 돼.

이레네는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수면을 얼려 올라탄 뒤, 빙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깊은 곳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다이빙하듯이 뛰어들어 잠수했다. 맑디맑은 호수였지만, 그 깊은 곳은 그렇지 않았다.

 

무수히 잠긴 백골들. 검게 부패한 나뭇잎들. 서로 얽히고설켜 썩어가는 수초들.

마치 개미귀신의 둥지처럼 켜켜이 쌓인 부패물들. 악취. 빌어먹을.

그리고 에흐으시커가 온 전신에서 자라난 더러운 갈기를 휘날리며, 그 중앙을 향해 더욱 더 깊게 잠수해가고 있었다. 저것이 에흐으시커의 본모습이리라.

 

반룡 소녀는 에흐으시커의 갈기에 묶여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잡아끌면 끌리는 대로, 맥없이. 보글보글 숨을 뱉으며.

심연으로.

 

 

“「겨울이 남긴 것」.”

 

 

이레네가 자신의 부장품인 로켓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에흐으시커가 향하는 진로에 그 창끝이 도달하도록, 호수 바닥으로부터 얼음의 창을 솟아오르게 하려 했다.

얼음의 창을 직접 쏘거나, 에흐으시커의 본체를 얼리는 것은 무리다.

수중에서 창을 쏴 봐야 물의 저항 탓에 별 의미가 없을 것이고, 수중에서 고속으로 이동하는 걸 얼려버릴 만한 한기를 응축시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그리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자폭이겠지. 스스로 꿰여 죽도록 하는 게-

 

 

“……?”

 

 

창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다.

안 되잖아. 물 속이라서 그런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에흐으시커는 어느새 둥지 중앙에 도착해, 마치 그곳이 땅 위라도 된다는 듯이 섰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앞발을 들어 부패물의 둥지 바닥을 톡톡 쳤다. 부패물들 틈새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유령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 것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한다면 바로 생각해낼 수 있을, 두 눈구멍이 난 하얀 기류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에흐으시커의 부름에 응답해 수없이 솟아 올라왔다.

 

 

이레네는 부장품에 손을 올리고, 자신을 지킬 빙벽을 만들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제대로 만들어졌다. 만들어지자마자 쿵, 쿵. 두들기는 소리가 빙벽 뒤에서 잔뜩 울린다. 다행히도, 유령들은 빙벽을 뚫어내지 못했다.

유령들이 모두 덧없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빙벽을 해체. 이레네는 다시 호수 밑바닥을 향해 분주히 발을 놀렸다.

에흐으시커는 자기 공격이 막히자 흉한 주둥이를 열고선 이쪽을 향해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짜증에 겨워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 것 같았다.

그 사이 반룡 소녀는 기절한 듯 축 늘어졌다. 시간이 많진 않았다.

이쪽은 망자이니 숨을 쉴 필요가 없다고 해도.

 

 

이레네는 곧바로 발판으로 삼을 빙벽을 만들었다. 아까는 왜 안 되었던 걸까.

그런 뒤에 물속에서 몸을 빙글, 하고 한 번 돌려, 빙벽을 짓밟고 호수 바닥으로 쏘아졌다.

에흐으시커가 다시 유령들을 불러낸다. 이레네는 이번엔 멀리 나오지도 못할 생각으로 부패물 둥지 주변을 얼려서 빙벽을 만들려고 했다.

 

다시 실패.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미 호수 바닥 가까이까지 가라앉을 만큼 속도를 붙여서 멈출 수가 없었다.

유령들이 마치 화살처럼 몸에 꽂히고, 사라진다.

 

 

“큭……!!”

 

 

뽀그르르. 입가에서 공기가 잔뜩 새었다. 상처에선 피가 새었다.

공기 쪽이야,  내겐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긴 한데. 이레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이런 더러운 물로 배를 채우는 건 사양이야.

 

몸에 구멍을 내어가면서 다가가자, 에흐으시커가 앞발을 높게 들더니 갈기를 쏘았다.

갈기 한 올 한 올이 마치 의지를 가진 촉수처럼 이레네에게 다가간다. 이레네는 곧장 아이템 하나를 아이템 창에서 꺼내어, 에흐으시커의 눈앞으로 던지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마력으로 작동하는 이 섬광탄은 물속에서도 확실하게 폭발했다.

호수 바닥에 가득한 부니腐泥와 썩어가는 물의 색 때문에 어두웠던 이 깊은 수중에선 효과가 굉장했다. 에흐으시커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고, 갈기는 제 갈 길을 잊고서 마구 흔들렸으며, 심지어는 반룡 소녀까지 놓아버렸다.

이레네는 곧장 쏘아져 반룡 소녀를 붙잡고 수면 위를 향해 부상하기 시작했다.

 

수면에 가까워지자, 이제 막 잠수해 이쪽으로 향하려던 용병 몇과 테레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호위 대상은 구했으니 이제 올라가자고 씨익 웃어보였는데, 뭔가가 발목을 붙잡았다.

도대체가 쉽게 넘어가 주질 않네. 이레네는 얼굴을 구겼다. 안고 있던 반룡 소녀는 놓아주고, 그대로 심연 속으로 다시 끌려 들어간다.

웅, 웅. 점점 소리가 멀어져간다. 끌어당기는 힘이 원체 강해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래, 네년을 먹는다. 망자의 고기라곤 해도, 내겐 특식이다!]”

 

 

그렇게 끌려가서 점점 가까워지자 말 주둥이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말이구나. 이레네는 별 감흥 없는 감상을 흘리며 검을 만들었다.

얼음의 에스톡. 그리고 끌려가는 기세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검이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에흐으시커는 방어도 없이 에스톡에 찔렸다.

그것의 목에서 보랏빛 피가 뿌옇게 피어오르며, 이레네를 묶고 있던 갈기가 풀려 나간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에흐으시커의 잔뜩 벌어진 아가리가 다가온다. 자신을 묶고 있던 갈기가 풀렸다 해도 수중이라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기에, 이레네는 왼쪽 팔을 방패로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으스러지는 소리.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온다. 붉은 피가 안개처럼 섞여든다.

 

이레네는 고통을 참으며, 에흐으시커의 목에 꽂힌 에스톡에 부장품의 힘을 더했다.

얼음을 폭산시켜서, 내부로부터 헤집으면.

 

 

“빌어먹, 을!”

 

 

또다.

또 얼음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이레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겨울이 남긴 것」은 이미 몇 번이고 효과를 발휘했었다. 목에도 제대로 걸려 있다. 그런데도.

왜 이러는 거야. 말 들어. 지금 같은 위험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곤란해……!

 

 

“[여긴 내 둥지다! 그딴 시체의 장난이 통할 성 싶나!]”

 

 

이번엔 에흐으시커가 입을 열지도 않고 말했다. 처음부터 텔레파시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뭐. 부장품을 탓할 필요는 없었네.

미안해, 라고. 이레네가 자조하며 자기 목에 걸린 채 수류에 흔들리고 있는 파트너에게 말했다.

알몸으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둥지 틈새로부터 유령들이 솟아 올라와 이레네를 마구 꿰었다.

부장품은 여전히 침묵 중이었고, 이레네에겐 유령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신체 여기저기에 또다시 작은 구멍이 생기고, 붉음이 마구 퍼졌다.

 

거기에, 우드득. 에흐으시커가 증오로 타오르는 눈으로 자기 목을 휙 돌렸다.

깨물렸던 팔이 팔뚝에서부터 뜯겨나간다. 이레네는 이빨을 으스러지게 악물어서 겨우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믿고 있던 부장품이 침묵한 탓에 너무 놀라서 정신이 흐려질 새도 없었던 것도 다행이라면 전혀 다행이진 않았지만.

 

하지만, 정신은 잃지 않았다뿐이지.

다시 갈기가 뻗어 나온다.

에스톡은 어느새 놓았고, 물려있던 팔은 잘려나가고. 닻을 잃은 채 수면을 향해 떠오르려던 이레네의 몸이 다시 붙잡혀 끌려간다.

더군다나 이젠 발목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은 팔목과 발목마저도 묶여버렸다. 교수대처럼 목도 묶여버렸는데, 이대로 찢어 죽일 생각인지 압력이 강했다.

부그르. 이레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공기가 새었다. 에흐으시커는 가학적인 웃음을 지었다. 말 따위가 사람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지만, 이젠 방도가 없다.

 

나에게는. 이레네가 씩 웃었다.

심한 아픔 탓에 그다지 예쁜 미소는 아니었다.

 

 

“------------!”

 

 

우우웅. 물 속이라서 잘 들리진 않았다.

그래도 비키라는 건 잘 알겠어. 이레네가 고개를 옆으로 최대한 기울였다.

 

무엇인가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귓가를 지나친다. 부그르르.

수면 위에서부터 여기까지 끌고 온 공기방울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고속이었다.

콰득.

 

 

“가, 아, 악.”

 

 

에흐으시커의 미소 사이에 샤이텍이 꽂힌다.

총검을 단 저격 소총이 마치 기마대의 랜스처럼 힘차게 말의 미간 사이를 꿰뚫고 튀어나와, 심장마저 꿰뚫는다. 보랏빛 살점이 잔뜩 피어올랐다.

 

테레지아의 등에는 투명한 마력의 날개가 자라나 있었다. 그야 저러면 미사일처럼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지. 이레네가 씩 웃었다.

사각에서 그 속도로 쏘아진 거잖아? 피하지 못해도 이상할 건 없어.

 

 

“--------!”

 

 

테레지아의 입에서 보그르르, 하고 새었다. 물론 들리지 않는다.

테레지아가 방아쇠를 당긴다.

 

샤이택의 마탄이 쏘아져 에흐으시커의 뱃속에서 붉게 폭발했다. 깊은 물 속에서 붉은 화염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언젠가 이레네가 처음 불꽃놀이를 보았을 때처럼 자극적이었다.

갈기의 속박이 풀린다. 에흐으시커 본체도 천천히 기울어져 힘없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는다.

 

다행이긴 한데, 팔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사무라이 망자에게 상반신을 반쯤 썰렸을 때처럼, 급격하게 피로해져서 곤란했다.

이대로 물속에 방치되어도 죽진 않겠지만, 그건 팔 하나 잘려나갈 정도의 출혈이 없을 때나 말이 되는 이야기다.

 

 

“[이제 괜찮아. 쉬어. 다 끝났으니까.]”

 

 

이것도 텔레파시 같은 건가. 그럼 처음부터 텔레파시를 하지. 듣지 못해서 머리를 치우지 못했으면 내 머리가 터졌을 거 아냐.

이레네는 테레지아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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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잃어버린 작품에서 전투씬만 떼와서 조금 수정해서 올려봤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