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그때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유리는 자기 서랍에 들어 있어야 할 작은 병이 사라져 있자 멍하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난날의 기억들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꾹꾹, 관자놀이를 누르며 숙취에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도 굴려보지만 아무래도 전날에 남자 친구인 하늘이와 과음해서 그런지, 거기에 밤새도록 뜨거운 밤을 보냈다 보니 뇌가 재부팅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우웅...아마도오오...



그 순간 찢어진 필름이 이어지듯 하나의 단서가 떠오른다.

남자 친구는, 격렬하게 몸을 한바탕 움직이고 마실 것을 찾고 있었지. 그리고 무심결에 서랍을 열은 뒤, 작은 병을 바라보고는 마시는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그 약은 아빠의 회사에서 비밀리에 상류층들에게만 암암리에 뿌려지는 묘약이었으니까.



여성들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하는 약.

하지만  남성이 마신다면, 온갖 호르몬 폭풍으로 여성이 되어 버리는 약.

떠오른 게 맞는다면 그 약을 지금의 내 남자 친구가 마셔버리고만 것이었다.



물론 성전환을 위해서 마시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이가 그런 취향일 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고 곧 정신을 차린다면...아마도 자기 바뀐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말겠지.



"..."



나는 천천히 앉아 있는 의자를 회전시켜 등 뒤의 침대에 시선을 두었다.



"유리야..."



그곳에서는 미남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던 남자 친구는 하늘로 꺼진 듯 보지이지 않았다.

다만... 남자 친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고 소중한, 여성이 대신 누워 있었다.



아니 이제는 남자 친구가 아닌 여자 친구가 되어 버린 하늘이...



참 아름답기도 하다. 나와는 정반대되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침이 꿀꺽 절로 삼켜졌다.



성숙해 보이는 나와는 반대로, 귀여움, 사랑스러움, 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내 품에 쏙 들어올 것처럼 작은 몸에, 수줍게 보이는 균형감 있는 앞머리와 옆게 떠오른 홍조를 가리는 머리카락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지금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보고 싶다.

길게 뒤로 뻗은 포니테일로 만들어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온전하게 내 눈에 담고 싶었다.



"꿀꺽!"



그런 하늘이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홀린 듯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죄를 짓는 것처럼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물론 잘못을 하기는 했다. 내가 약에 관리를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하늘이가 이렇게 몸이 바뀌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태니까.



"분명히 난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게 이런 걸까?

하늘이가 여자가 되어 이제는 적당한 보상으로 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여자와 결혼하고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늘이에게 느끼고 있는 건 더욱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사랑이었다.

남자일 때보다 더. 더욱더 불타오르는 사랑.



"너무 주책을 부리는 건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난 하늘이에게 굉장히 미안해 해야 하는데..."



가슴이 옥죄는 감각이, 그리고 코끝이 찡해지도록 먹먹한 느낌이 내 모든 감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의 신체적 반응.

내 머리는 내게 속삭였다.



어서 저 앵두 같은 작은 입술에 키스하라고.

살짝 과육을 입에 맞추고 부드럽게 혀끝으로 한번 핥아보라고.



"헤헤헤..."



그리고 나는 하늘이의 천진난만한 미소에 그 속삭임을 거부하지 못했다.



쪽!



가벼운 키스. 연인을 깨우는 것 같은 기분 좋은 키스에, 좋은 꿈을 꾸는지, 미소가 지어졌던 하늘이의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아..."



그제야 나는 화들짝 놀라며 하늘이의 입에 맞춘 입술을 떼어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재빠르게 침대 옆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애써 심각한 표정을 연기하며 천천히 깨어나는 하늘이의 눈을 바라봤다.



"우웅...유리야 좋은 아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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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유리야 좋은 아치임..."



전날에 잔뜩 술을 마시고 격한 섹스했다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고 상쾌한 기상이였다.



빛에 적응되지 않아 뻑뻑 한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며 어째선지 침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유리의 모습을 그대로 올려다본다.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야?"



하지만 입을 틀어막고 무언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유리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허읏..."



그러자 갑작스럽게 심장을 부여잡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정말로 넘어지려 하는 유리의 몸을 부축했다.



"어...?"



그런데 무언가가 조금...아니 많이 이상했다.



'유리가 이렇게 컸었던가?'



평소라면 내 가슴에 유리의 머리가 닿아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내 얼굴이 풍만하리만큼 거대한 유리의 가슴에 이마가 닿아 물컹거리는 느낌이 나고 있었다.



"뭐...뭐야...이 팔은...아... 아...! 내 목소리는 왜 이러는 거야...?"



뭔가 이상하다. 목소리도, 가느다란 팔다리도, 모두가.

마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그래 꿈이구나? 어쩐지 상쾌한 기분이라고 했더니, 전날에 그렇게 엄청나게 마셔 놓고는 멀쩡할 리가 없지.



"아...꿈이구나... 살다 보니 이런 생생한 꿈도 다 꾸네. 내가 여자가 되다니..."

"하늘아...?"

"유리야, 이것 봐...나 다리 사이에 있던 똘똘이가 사라졌어, 대신 이렇게 살짝 봉긋해진 가슴이...신기한 기분이네...왜...느낌이...만지는...."



문득 불길함이 엄습했다.

꿈인데 어떻게 내 피부를 만지는 느낌이 나는 거지?



나는 답을 얻기 위해 고개를 들어 유리의 눈을 마주 봤다.

간신히 발뒤꿈치를 들자, 유리의 가슴 위로 눈이 빼꼼 내밀어 져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해."

"어...?"

"정말로...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미안해 하늘아...정말로..."



유리는 눈에서 굵은 눈방울을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보며 흐느꼈다.

천천히 내 어깨를 감싸는 유리의 손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분명히 이런 상황은 꿈에서만 일어나야 하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유리에게 이런 꿈을 꿨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야 했을 텐데...



"꿈이 아니야...?"



나는 그런 유리에게 물었다. 

도대체 유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내가 이렇게 여자가 되어 버린 거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애초에 현대 과학으로 하룻밤 만에 이렇게 성전환을 할 수 있는 거냐고...혹시 밤사이에 내 뇌가 이 육체로 옮겨져 버린 걸까?



"무...무슨 소리야...이게 꿈이 아니라면...도대체 어떻게..."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약이야."

"어...?"

"우리 아빠가 운영 중인 제약회사에서 만든 약이라고...원래 용도는 여성의 외모를 아름답게 가꿔주는 약인데...부작용으로 남자가 먹으면 여자가 되어 버리는 부작용이 있어... 그리고 어잿 밤사이에 네가 마신 게..."



말을 중간에 끊은 유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그제야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밤에 비몽사몽 한 목마름에 마신 무언가를...



"말도 안 돼..."



털썩!

유리의 말에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만다.

이게 현실이라니...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여자가 되는 약이 있다면 그 반대의 약도 있을 거 아니야..."

"미안...그런 약은 없어...애초에 이 약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약이야..."

"...으으!!"



차마 유리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술에 의한 실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직 유리를 사랑하는 감정은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유리의 말은 내게 크나큰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속에서 기분 나쁜 무언가가 송골송골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나무판자에 날치 알이 한가득 달라붙어 아래쪽으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나무판자처럼 내 기분은 점점 최악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깊은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유발했고, 점점 숨을 내뱉는 게 아니라 토해내는 것처럼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과호흡으로 넘어간 가녀린 육체는 뇌에 산소를 보내지 못해 눈이 멀듯이 외곽부터 점점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하....아...정....차려...!"



'뭐...? 뭐라는 거야..."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남자의 강건한 육체는 군대에서 극악에 가까운 행군에서도 이렇게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가녀린 여성이었다.

남자보다 스트레스에 더 민감하고,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연약한 여자.



'아...어지러...'



털썩!



그 순간 세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푹신한 느낌과, 무언가 떠받히는 느낌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예쁜 벽지들과 까만 점들이 반반씩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에 넋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하늘아! 하늘아!!"

"으으..."



바스락! 바스락!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반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내 눈앞에 투명한 비늘 봉지가 내 숨결에 따라 커졌다 작어졌다를 반복했다.



"뭐...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다행이다...정신이 조금 들어?"

"조금..."



충격덕분일지도 몰랐다.

나는 봉지 위의 내 가느다란 손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쁜 손이었다.

길고 잘 뻗은 예쁜 손가락이었고.



나는 가볍게 허공에 피아노가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토도독 움직여 봤다.

정말 이게 내 손인가 싶어서.



"잘...움직이네."



그리고 내 의지대로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내 손가락이었으니까. 이 아름다운 손이 내 것이란 말이었다.



"나...정말 여자가 되어 버렸구나..."

"...미안 해."

"아니야 내가...내가 잘못한 거지.."

"아니야...하늘아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어도..."



유리는 곧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바늘로 툭 건들면 터질 것처럼 매달린 눈물방울에 나는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지금 절망해 봐야 나에게 상처만 될 뿐이지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바로 옆에 유리가 있어서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후우..."



손을 들어 천천히 내 입가에 가려진 봉투를 치운다.

유리는 아직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지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지금은 괜찮았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는 거지 갑작스럽게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는 돼 있지 않았으니까.



"유리야 나 불안해..."

"괜찮아...내가...내가 곁에 있잖아."

"나...여자가 되어 버렸잖아. 그리고 너도 여자고..."



그리고 그건 유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갑작스럽게 남자 친구가 여자가 되어 버렸다면...아무리 사고라지만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불안한 눈으로 유리의 눈을 마주 봤다.



"그래서?"



하지만 유리는 내 말에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손에 들린 비늘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내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려는 건지 힘을 잔뜩 줘 꽉꽉 누르는 유리의 손에 살짝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라니...당연히 여자와 여자끼리는..."

"하늘아."



멈칫.

유리는 내 말을 단호하게 끝으며 눈가의 눈물을 슥 닦아내며 차분하게 크게 심호흡했다.

비장한 유리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태산과도 같았다. 거대한 태풍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킬 것만 같은 태산. 그런 유리의 모습에 어쩐지 내가 기대하는 답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슬쩍 눈을 마주친 나.



"나는 네가 남자라서 사귄 게 아니야. 네가 고아라고 불쌍해서 사귄 것도 아니고, 네가 잘생겨서 사귄것도 아니야. 너니까.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너니까 나도 너를 사랑했던 거라고."

"유리야..."



그녀의 말에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기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던 순간처럼, 아니 그보다 더 설렘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우리의 관계가 변할 일은 없어."

"정말로...?"



유리의 말에 어쩐지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남자면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아니 이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면 눈물을 보여도 되지 않을까?



"정말이야. 맹세해."



유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양손을 내 눈가로 가져왔다.

어느새 눈물을 흘린 걸까? 유리의 상냥한 엄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문지르자 짙은 수분 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응?"

"알았어..."



끄덕끄덕!



그녀의 말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크흥!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어쩐지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어엿한 성인인데. 지금 몸이 조금 작아졌다고, 명확하게 달라진 유리의 말투에 나는 조금 입술이 튀어나와 버렸다.



"일단...우리 부모님하고 이야기해보자."

"응...? 그래도 되는 거야?"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 아... 하늘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



유리는 갑작스럽게 나를 바라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잔잔하게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사회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이후에 나올 말이 얼마나 기분 나쁜지는 모두가 알 것이었다.



"너...우리 회사에 취직하자."

"뭐...?"

"지금 다니는 알바랑 직장은 때려치우고 우리 회사로 오라는 말이야. 너를 보니까 불안 해서 안 되겠어. 남자들은 모두 늑대란 말이야 그런데 자. 봐봐."



유리는 갑작스럽게 옆으로 두어 걸음 게걸음을 걷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유리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뭘 하는 것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날보지 말고 앞을 봐."

"앞을...?"



나는 유리의 말에 정확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화장대에 놓여 있는 커다란 거울이.



"이게...나야?"



그제야 나는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성이 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 상상하지도 못했다.



꽤 초췌한 모습임에도 마치 피어나기 직전의 백합처럼 청초한 느낌에 멍하니 거울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손이라고 느꼈지만, 본격적인 외모가 이렇게 아름다울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

"그런 얼굴로 원래 다니든 직장이든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든 무슨 일을 당할 거 같아?"

"..."



내가 남자라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수많은 고백 세례를 받겠지. 편의점 알바를 한다 치면, 내 얼굴을  한 번 보려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들 것이고, 다른 직장을 구한다 치면, 일은 뒷전이고 내 관심을 받기 위해 온갖 경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음..."

"애초에 지금 신분증도 없고 대한민국에서 너라는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일 같은 걸 구할 수 있겠어."

"그러네..."



유리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남자였던 나는 대한민국에서 증발한 듯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을 태니까.

물론 지금 행정상에는 살아 있겠지만...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에게 상의하자는 거야. 이 약의 비밀을 알고 있는 분들이라 믿어 주시기도 편할 테고."

"응..."

"마침내 비서가 한 명 필요했는데 잘됐다."



배시시.



유리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인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유리의 노력에 나도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올려 마주 미소를 지었고.



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내 속마음이 있었다.



그 속마음은 숯을 갈아 넣은 것처럼 검었고, 타르를 뭉친 것처럼 끈적거리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한순간 다른 인생을 살게 된 나로서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죽고 싶다는 감정이.

유리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일순간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마...마침 부모님도 모두 계시니까 한번 같이 만나뵈러 가 보자."

"응...?"



그런 그늘진 내 얼굴의 그림자를 유리는 눈치챘는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려고 노력했다.



우울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울한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니까.

유리가 어떻게 내 기분을 알았는지는 그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모습이 달라졌을지언정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게 했을 태니까.



모습이 바뀌었을지언정 행동이나 습관 같은 것은 모두 똑같을 테니까.



"미안...조금 힘들어서...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도통 평소처럼 있을 수가 없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나를 위로하려는 유리였지만, 도통 내 기분은 좋아질 생각하지 않았다.



긍정이라는 감정이 메말라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푸릇한 꽃들을 피워올렸던 마음의 동산은 순식간에 절망이라는 햇빛에 매말라 사막이 되어 버려 삭막하게 변해 버렸다.

절망. 어디를 바라봐도 절망이라는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며 여자가 된 게 무슨 상관이냐며 무덤덤하게 넘겨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우습게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십 년을 남자로서 살아온 정체성이 부정당해 버렸다.

갑작스럽게 여자가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고, 옆에서 유리가 내 메마른 가슴을 다시 꽃피우게 하려고 실컷 물을 뿌려주고 있지만, 그래 봐야 피어오르는 건 꽃이 아닌, 모래를 갈색으로 덮어 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늘아...도대체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만약에 나도 남자가 된다고 한다면...혼란스러워서 방안에 처박혀서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말이야... 하늘이가 있으니까 위로받으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하늘아 만약에 내가 남자가 됐다면 너는 나를 버릴 거야?"

"아니...! 절대로!"



하지만 유리는 의미 없어 보이는 물을 끊임없이 퍼붓고 또 퍼부었다.

온 마음이 눈물로 촉촉하게 적셔질 정도로.

진심을 담은 유리의 말에 점점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를 의지해 줘. 나를 믿고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만 덜어내 줘."

"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더 이상 복잡한 생각하지 않고 유리를 믿기로 했다.

그 잠깐 사이에 설마 유리가 일부러 내게 약을 먹인 게 아닐까, 혹시 실험체가 필요한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쓰레기 같은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쯤 아침이 준비되고 있을 거야. 우리 부모님도 너를 잘 알고 계시니까... 그러니까 부모님께 도움을 청해 보자. 네가 싫다고 해도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행정적으로 민증이든 최소한 해외에서 귀화를 한 것이든 행정상의 정보가 있어야 할 테니까. 우리 엄마 아빠가 그 정도 힘은 있을 거로 생각해."

"혹시...아...아니야! 아무것도."

"왜 혹시 하늘이 너를 실험체로 사용할까 봐?"



꺄르르!



유리는 내 의문에 조금은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뺨을 양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은 격한 애정 표현에 볼이 조금은 얼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브브아. 하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문질러지는 유리의 손에 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손목을 잡아 봤지만, 힘 차이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으니까.

과거에는 내가 유리를 번쩍 들었다면, 지금은 유리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릴 것처럼 나와 유리의 체격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이미 우리도 이 약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걸 포기했어. 나도 나름 우리 회사의 간부라서 정보를 알고 있거든. 뭐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아직 벗어내지는 못했지만. 실험은 끝났어. 그냥 마법이라는 결론으로 말이야."

"정말...?"

"하늘아. 의심스럽겠지만, 우리의 사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여?"

"아니..."



유리의 모습은 당당했다.

거짓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틱틱 튕기는 버릇도 나오지 않았고, 동공이 한 번씩 위쪽을 바라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은 이상, 유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첫발을 내 딛는 게 어렵겠지.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강제로 너를 이끌어낼 생각은 없으니까. 차분하게 기다려줄게. 우리 부모님도 만나기 싫다면 이 방에서 기다려도 좋아.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내가 곁에서 기다려줄게."



유리는 말을 마치며 천천히 내가 걸터앉아 있는 침대로 걸어와 내 옆에 궁둥이를 바짝 붙이며 앉았다.

평소처럼. 비록 팔을 옆으로 뻗으며 유리의 어깨를 가볍게 둘러싸던 기억처럼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안정이 온다.



내 마음은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끝끝내 유리의 노력으로 적은 새싹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조금만...조금만 이렇게 있어 줘."



==========================================



내가 용기를 낸 시각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이제 막 정리를 시작할 때쯤이었다.

그것도 유리의 몸 뒤에 숨어 수줍게 발걸음을 맞추며 걸어나간 나와 유리의 모습에 신문을 잃고 있던 유리의 아버님은 신문을 든 손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술은 적당히 마시라고 했잖아 유리야. 아침은 이미 치우고 있으니, 사용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네 남자 친구와 밖에서 사 먹는 쪽으로...응?"



그 순간 유리의 등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던 나와 눈을 마주친 아버님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에 든 신문을 반으로 접은 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아버님..."

"아버님...?"



그제야 나는 멈칫, 옆걸음질로 두어 걸음 걸어간 뒤에,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인사를 했다.



끼익~!



"아니 유리야 이 아이는 누군데 나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한 것 같구나."



그런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셨는지, 아버님은 다급히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구십 도로 꺾은 내 허리를 들어 올리며 유리를 질책하는데...솔직히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버님...저 하늘이에요..."

"뭐..?"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버님은 내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유리에게 지금, 이 말이 맞는지 눈으로 말해요를 하고 있었으니까.



"네...네가 하늘이라고..?"



커피를 내리고 있던 유리의 어머님은 내 말에 들고 있던 잔을 놓치며 충격을 받았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셨다.



그 광경에 나는 두 눈을 살포시 감아버렸다.

무언가 나쁜 짓을 저질러 버린 것처럼, 불안감이 한가득 퍼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두 분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재벌 집 망나니들이 아닌, 직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품격 넘치시는 귀족 같은 분들이셨으니까.



그러니 유리와 나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허락하실 수 있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유리의 말로는 부모님께서 불만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나의 진심과, 그리고 유리를 존중하는 마음에 허락하셨다고 한다.



"네..."

"유리야?"

"일단 엄마도 앉아보세요...설명해 드릴 테니까요."



유리의 부모님들은 내가 아닌 유리에게서 답을 찾으려는지 해바라기처럼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 마음속에서 또다시 절망이라는 곰팡이가 피어오른다.



피해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행동에 어쩐지 불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유리와 해어지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꿀꺽!



나는 유리의 손을 꽉 붙잡으며 유리가 앉아 있는 의자의 옆에 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거울 없는 엘리베이터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물론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버렸고. 주변은 깜깜했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감정과 언제 유리의 부모님의 입에서 나를 배척하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심정은 비슷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전날에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어요..."



그리고 유리는 자기 부모님에게 내가 여자가 되어 버린 그 순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