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님이여, 어서 수정구에 손을 대주시지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면 마력이 측정된다, 이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이거야 뭐 뻔한 전개 아니겠는가. 이세계 클리셰잖아. 이제 내 손을 수정구에 대면 수정구가 터질 거 아닌가. 자, 잘 봐라. 수정구가 터지는 모습을!

"자,잠깐! 대피 대피!"
"훗, 제가 그렇게 잘났습니까?"
"아니, 이거 터진다고! 야! 그레이스! 또 돈 떼어먹었냐!"
"아이, 뭘 그거 가지고 그럽니까?"
"야! 네가 떼먹은 것만 2억 세르트야!"
"고작 2억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 부장님은 17억을 먹었는데요."
"아 나 씨, 사표 내던가 해야지! 아무튼 빨리 피해!"

그 때 수정구에서 폭발이 일었다.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고 천막이 폭발에 잠겼다. 나무로 된 기둥에 금이 쩌저적 갈라지며 폭삭 주저앉았다.
정신을 잃었다. 얼굴과 온 몸에 수정구의 유리조각이 박혔고 나무로 된 천장이 날카롭게 조각나 내 허리를 꿰뚫었다.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아, 겨우 이세계에 왔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하 진짜 내 로망 돌려내라고.



*


"용사님, 일어나세요! 깨어나세요 용사여!"
모르는 천장이었다. 옆에서 그레이스가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살짝 헝크러진 옷매무새가 보였다.
그레이스가 내가 깬 것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마력 측정 때는 별 생각 없었지만 지금 보니 얼굴도 딱 내 이상형이고 몸매도 내가 만났던 여자들 중에 가장 훌륭했다.
"여기가 어디죠?"
"성 하이디 병원입니다."
병원인가. 그럼 나는 여기로 실려왔겠군.
그럼 이제 나는 뭘 해야하지? 아마 뭔가 간지나는 걸 시키겠지?
"죽 드세요. 맛있게 끓였어요."
그레이스가 그릇이 담긴 쟁반을 가져왔다. 전복과 당근을 잘게 썰어서 만든 죽이었다. 비주얼도 좋았고 냄새도 아주 훌륭했다.
한 숟가락 떠서 먹어보았다. 간이 아주 적절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전복의 맛에 들깨가 알맞게 춤추는 느낌이었다. 내가 먹어본 죽 중 최고였다.
"용사님 생각하면서 끓였어요."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레이스가 옆에서 말했다. 감동했다. 이세계에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눈물에 겨웠다.
설마 이게 라노벨에서 말하는 소위 '플래그가 세워졌다'라는 건가? 마침 그레이스도 내 이상형이니 이거 딱 신이 나를 위해 준 선물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용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이벤트인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전부 헤아려보았다. 나를 동료로 삼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나랑 사귀자는 걸까?
순간 결혼에 아기에 손주 생각까지 스쳐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네, 들어드릴게요."
"정말요? 그러면..."
그레이스가 종이랑 인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내 앞에 종이를 보여주고 인주를 건넸다.
"손가락에 이거 묻히고 종이에 찍어주세요."
종이가 뭔지 보았다. 다행히 글자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이 배려해주어서 다행이었다.

아 잠깐. 이거 보증이잖아.

"안 해요! 안 해!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이거 보증이잖아!"
"칫, 조금 띨띨해보여서 이 정도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천사같은 목소리는 어디가고 불량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래도 생판 처음인 사람한테 보증 서달라는 게 어딨냐!"
"제가 이거 하려고 얼마나 준비한 줄 아세요? 용사님을 병원에 옮기고 간호도 하고 용사님 병원밥도 대신 먹어주고!"
"야 그게 말이 되냐? 안 되겠어. 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몸도 나아졌겠다, 침대에서 나와서 문을 열려고 했다. 이불이 어디에 엉키든 상관 없었다.
"뭐야, 안 되잖아?"
"제가 문 잠가놨거든요."
"아, 안 돼!"
"아깐 들어주겠다면서요!"
"이런 건 줄 알았겠냐?"
"아무튼 악속은 끝까지 지키세요. 그러니까, 자~!"
병실에서 살기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돈을 떼어먹으러는 그레이스의 눈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와도 같아보였다. 이미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있었다. 극한의 공포감에 첫인상에 느꼈던 사랑의 감정도 이제 싹 씻겨져나갔다.


"신성한 병원에서 뭐하는 짓거리야!"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벌컥 열었다. 내 또래의 여자였다. 그녀는 바로 구속마법을 써서 그레이스를 묶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도야."
그녀가 나도 구속마법으로 묶었다. 뭐야, 이건 무슨 일이냐고!
"그레이스라고 했던가? 넌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다."
"아, 누구신데 그래요?"
"여기 병원장 딸이다. 명령이다. 신고했으니 여기서 썩 나가거라."
"흐이익!"
그레이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의 말에 바로 굴복하여 밖으로 도망친 듯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 모습에 정이 확 떨어졌다.
"용사님이라고 했던가요? 괜찮으세요?"
한껏 다정한 말투였다. 감동했다. 지옥의 입구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원자였기 때문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알리샤라고 합니다. 이곳 병원장의 딸로서 회계를 맡고 있습니다."
설마 이건 그린라이트인가? 생각해보니 나를 구해주었기에 동료 플래그가 선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레이스보다는 내 이상형에 멀었지만 남자들이 한 번 쯤은 마음에 둬볼만한 미소녀였다.
"감사합니다 알리샤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구속마법 풀어드릴게요."
구속마법이 풀어졌다. 나는 이에 옷을 주섬주섬 추스르고 다리에 엉킨 이불도 한쪽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불을 정리하고 밖으로 가볍게 나왔다. 문 밖으로 가니 공기가 시원했다.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근데 병원비 안 내세요?"
"네?"
알리샤가 그냥 가는 게 의심스러웠는지 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병원비가 있어요?"
"4천만 세르트에요."
"4천만이요? 뭐가 그렇게 비싸요?"
"마력 측정 업체에서 4대 보험도 안 들어놨고 용사님은 아직 국민건강보험 등록 안 하셔서 보험 처리가 안 되셨거든요. 그래서 보험 들으셨으면 4백만 세르트였겠지만 안 들으셔서 4천만 세르트에요."
아니 그 수정구 업체는 횡령에 사기에 대체 안 하는 게 뭐야?
"내시면 됩니다."
"저기, 제가 용사라서 돈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알리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영업미소를 유지하느라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말투도 똑같이 감정이 점점 사라졌다.
"그래도 내셔야 합니다.^^"
"여기는 왕실이 대신 내준다던가 그런 거 없어요? 그래도 저 용사잖아요?"
"아퀴나스가 소환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 분 집권세력과 정치적 반대세력이라 지원금같은 거 안 나옵니다 용사님."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습니다 용사님."
머리가 하얘졌다. 돈을 어떻게 모아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수정구 업체에서 돈 안 내줘요?"
"거기 세무조사 들어가서 재산 전부 압류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용사님."
"그럼 아까 그 그레이스는 어떻게 된 거죠?"
"탈옥했나봅니다 용사님. 저기서 경찰이 잡아가고 있습니다 용사님."
병원 뒤뜰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그레이스가 보였다. 쌤통이었다.
"그럼 제 담당자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듣자하니 그 분은 잘못 없지만 내부고발하다가 기업이 압력 넣어서 도망중이랍니다 용사님."
왜 진짜 이세계에 정상인 게 하나도 없냐.

"아 그래도 여기에 생판 처음에 떨어진 사람한테 돈 이렇게까지 받으려고 하는 건 좀..."
"제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계속 베풀다가 사기당하고 병원이 파산 직전까지 몰려 자살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반발로 돈에 대해서만큼은 빡빡합니다 용사님.^^"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박하면 패드립이 될 것 같아 마땅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데서 갑자기 과거회상을 하니 내가 나쁜 놈 같았다.


확실했다. 내 이세계 라이프는 시작부터 심각하게 ㅈ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