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경하가 중학교에 들어가 전교에서 1등을 했던 날이었다.


경하는 성적표를 확인했을 때, 그 어떤 때보다도 기뻐하며 수업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집으로 성적표를 들고 달려갔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으며 반에서는 물론이고 학년도 뛰어넘어 전교에서 가장 높은 수석의 직위를 차지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으니까. 


지금까지 학년 1등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었던 그 장애물이 부서지는, 그 전까지 없었던 더없이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기에 기쁨은 더욱 더 커지고 있었다.


경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덧없는 환상과 환각을 보고 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 감각의 정수를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었으면서도 경하는 그 감각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곧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나도 이제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가 될 수 있다고. 경하는 경성부의 거리를 거쳐 성적표를 들고 혼마치에 있는 그 양관으로 가는 길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본 환상과 환각보다도 더욱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그 환상과 환각이 꺼지기 직전의 클라이막스였을지도 몰랐다. 이제 이 클라이막스보다도 더욱 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경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경하는 몰랐다.


이 환상과 환각이 영원히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사실과, 클라이막스는 어디까지나 경하의 상상인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경하가 곧 맞이할 결말은 결코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불행한 결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지금까지 그 환상과 환각에 빠져 살아,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던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경하가 기대하던,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은 집에 없었다.


경하는 아무것도 없는 거실을 보고 기분이 일시에 크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여전히 경하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잠깐 어디로 가셨을 뿐이야. 곧 돌아오실 테니까..”


째깍거리는 괘종 시계의 시침 소리만이 거실 안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경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은 그 환각과 환상은 아무도 없는 공허한 자신의 방처럼 빈 거실을 보았을 때 옅어지기 시작했지만, 경하는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불안감을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경하는 자신의 환상과 환각이 깨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차분한 발악’ 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부모님이 어디를 갔을지를 예측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며 자신의 불안을 덜으려 한 것이다.


그나마, 경하의 말에 틀리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어딘가로 갔다’ 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어딘가로 갈 ‘예정’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이게 뭐지?”


유경하는 거실의 흑단나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어머니가 쓰는 검은 가죽 표지의 일기장을 보았다. 경하는 조심스럽게 그 일기를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조선어로 적힌 그 글자들을 경하는 눈에 담으며 머릿속에 넣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하의 그 덧없는 환각과 환상을 너무나도 허무하게, 동시에 비참하게 없애 버리고 말았다.


‘1934년 7월 24일.


앞으로 정확히 3년 6개월 후에, 당분간 우리들은 미국에서 지낼 예정이다. 지금은 사전에 돈을 출금해 달러화로 환전하기 전에 미리 써 두고 있지만 아이들이 그것을 알아챌 때는 우리가 집에 없을 때겠지.


아마도 달러화로 환전하는 과정은 조금 오래 걸릴 것 같다. 지금 출발하면 은행을 방문하고 다시 돌아올 때 저녁 시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미국?


경하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고? 거짓말이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거나 경하가 착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일기에 날짜나, 어법이나, 오자 등의 잘못된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그것은 경하의 부모님이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날 예정을, 오늘 정한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경하에게 사전에 한 마디도, 조금도 알리지 않고서.


왜 아무런 말도 없었던 거지?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럴 리가 없어- 그렇게 경하는 중얼거리면서도 식은땀을 흘리며 일기를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 특히 경하라면... 어째서 우리가 떠나는지를 궁금해 할 것이다. 분명 그 아이라면 그 덧없는 상상과 환각에서 빠져서 평생 나오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걱정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심하니 조금 적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쉽게 말해서, 이제 조선에서 우리가 벌 수 있는 수익은 한계에 도달했다. 집안에 있는 돈으로 전부 땅들을 사들인 뒤 그것을 총독부의 관유지로 넘기고 매매하는 행위로 돈을 벌여들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나... 살 수 있는 땅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고 수익률은 정체되고 있다. 


따라서, 더 수익률이 좋은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나와 그이는 이제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할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사용인들이 잘 관리할 것이다.’


경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일기장을 읽어 갔다. 이제 경하의 행위를 ‘차분한’ 발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내 자식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래 내 가족들은 사랑 같은 얄팍한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아이들은 나를 위해 사용될 목적과 그 한계가 명확했고, 내 기대보다도 더욱 더 떨어지는 능력을 가진 것들에게 무의미하게 사랑을 줘야 할 이유는 없다.


경하는 그중에서도 더욱,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책 따위를 읽고 머리가 좋아진다고, 1등을 받아 온다고 사랑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경화는 결혼이라도 시켜서 상대 가문에 지참금이라도 뜯어 올 수 있지만 경하는 그조차도 할 수 없다. 처음부터 어떻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떠안아야만 하는 쓸모없는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설령 경하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경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언젠가 결국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단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아이가 날 사랑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까.


애초에 그리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유경하는 어머니가 쓴 오늘의 일기를 완전히 읽고선 손을 파르르 떨었다. 성적표는 바닥에 떨어졌고, 이제 그것은 유경하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환상과 환각이 깨지며 그 달콤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은 한 순간에 사라졌고, 이제 경하는 자신의 모든 것이 빼앗겨 버린 듯한 고통스러운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툭.


경하는 손에 힘이 빠져 버려 그 일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부모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 일기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본래 있었던 탁자 위로 떨어졌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져 있던, 지금까지 그 무의미한 기대를 원천으로 한 환각과 환상이 완벽하게 사라진 뒤 그제서야 보려고 하지 않았던, 신경쓰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들이 경하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떠올랐다.


부모님은 지금까지 경하에게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런 경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지금까지 어리석게도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부모님을 사랑하려 기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부모님은 지금까지 경하를 대할 때 얼굴 빛이 한 번도, 조금의 차이를 보인 적도 없었다. 마치 방해되는 것을 보는 듯한 그 차갑고 냉소적인 눈빛을 경하는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느끼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경하는 마치 어항 속에 갇힌 잉어 같았다. 환상에 빠져서 물 밖으로 나가면 그 주인이 자신이 살던 원래의 물로 돌려 보내 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인 부모님에게 있어서, 잉어인 경하를 어항에 가두는 것은 죄가 되지도 않았고 그러니 경하가 어떤 마음을 가지던지, 어떤 짓을 하던지 아무래도 상관 없었던 것이었다. 


비단 무늬가 있는 잉어들은 그 주인들이 특별한 먹이를 주고 있기에 그 아름다운 무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경하는 지금까지 그 주인인 부모에게 무늬를 만들어내는 먹이를 받은 적도 없으면서 자신이 비단을 가진 잉어라고, 특별한 존재이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리도 바보 같을까?”


경하는 그 때 마침내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지만, 그것은 경하가 원하던 사랑받는 법이나 사랑하는 법이 아니었다.


부모가 경하에게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고통이었다.


무언가를 빼앗기고 잃어버릴 때의 사무치는 고통을 경하는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덧없는 환각과 환상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경하는 현실의 아픔에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강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경하는 그 날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도, 행복한 환각도, 달콤한 환상도,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의미도 더는 경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유경하는 눈을 떴다. 욕조 속에 앉아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만져 보았을 때, 눈가에 물이 묻어 나왔다. 울어서 눈가가 붉어진 것인지, 열기 때문에 붉어진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묻어 나온 그것이 눈물이었는지, 피부에 수증기로 물이 맺힌 건지도 알 방법이 없었다.


"난 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죽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