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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zing on a Monday Afternoon (...Revisited)

#2 2018년의 2월에는 네 번의 화요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3 점심식사에는 120분 정도가 적당하다

#4 Have A Nice Day

#5 진실은 공상을 찢는가

새로운 시작 (완결)


#2 2018년의 2월에는 네 번의 화요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여름 휴가는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래전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다시금 힘차게 내일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소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미지의 장소에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이제껏 알지 못했던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나긴 사색의 끝에 인간 정신의 정점에 서서 생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에어컨이나 쐬겠지.


  에어컨은 위대한 발명품이다. 당신이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인간이 정온동물인 것은 신이 윌리스 캐리어를 인간세계에 보낼 예정이기 때문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역사 수십억 년간의 신의 시험은 고작 백몇 년 전에야 끝이 났다. 따라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냉각장치를 갈구하는 것은, 그가 시험을 통과한 선택받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나 또한 내가 선택받은 인간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러나 오늘의 최저기온은 안타깝게도 영하 14도다.


  에너지를 흩뿌리는 것은 그것을 거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하기 쉽다. 말을 주워 담기는 힘들어도 내뱉기는 쉬운 것과 같은 이치이며, 인터넷에 쓰인 글을 서버에 로그 하나 남기지 않고 지우는 일은 힘들어도 아무 말이나 싸지르는 것은 우리가 늘 행할 수 있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신의 섭리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의 이치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어째서 냉각장치를 개발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지만 가열 장치는 그렇지 않은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난방장치가 냉방장치와는 달리 인류와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따라서 긴 시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인류의 사용 범위 내에 있었던 난방장치를 인간이 사용하는 것은 이제는 당연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냉방을 갈구하는 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의 영역이지만, 난방을 원하는 것은 선택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인류 공통의 문화에 더 가까운 것이다. 자본의 신에게 선택받은 모든 당신들에게 심심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어떻게, 지난여름은 안녕하셨는지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가 누군가의 절망적인 감정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여름의 휴가였다면, 나는 이곳에 누군가가 며칠 동안 더 오지 않을 것을 꽤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냉방이라는 고도의 문명을 향유할 줄 아는 소수의 선택받은 자가 아닐 확률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대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경우, 다양한 장소로 이동해서 기록물을 남기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비문명인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과 또한 두뇌의 작업 범위 제한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을 다른 매체로 기록해야만 하는 본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생계를 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동은 유목민의 이동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한다. 이거 원, 무슨 큰일을 내려고. 어쨌든 지금의 상황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아니 많이 암울하다. 겨울의 휴가는, 아니, 난방의 문화는, 냉방의 문화보다는 조금 더 폭넓은 사람들에게 그 범위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 누군가가, 겨울에마저도 정착할 수 없을 정도의 비문화인 이라는 가능성은 물론 배제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이는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문명사회에서조차도 실제로 그러한 종족이 목격된 바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가능성은 충분히 합당한 근거로 부정할 수 있다. 그 근거란 바로 이 주택 건물의 현재 상태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를 어떻게 해놓고 지내는지는 상당히 다르다. 다만, 경향성은 존재한다. 그리고 문명도의 척도에서 한쪽 극단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분명 거주하는 공간에서조차도 그 흔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누군가가 이동을 활발하게 즐기는 사람이라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적막감은 그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기에 충분히 적합한 정도로 적응된 문명인일 것이라는 추측을 우세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이 주택에 또 다른 사람이 가까운 시일 내로 들어오게 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못한 채, 지금 여기 소파 밑에서 별 쓸모없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중에서는 하는 일이 애초에 거의 없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먹을 정도의 일이면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정도의 일이어서 그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 나 또한 어쩌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오분 전에, 이제는 내가 바닥에서 머리와 몸통을 떼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마 발목 언저리쯤이 소파 밑으로 나온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분명 어제는 이 집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는 집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손톱 조각이나 아니면 시체뿐일 것이다. 따라서 어제는 아주 안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가 잠을 자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부터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여기에서 빠져나가서, 주변을 살피고 안전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내가 마음을 먹은 지 십 분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일어났다.


  나는 마침내 일어나고는, 이번에는 내가 잠을 청한 것과는 역방향으로 다시 전신을 소파 밑으로 구겨 넣었다. 이렇게 되면 머리가 현관 쪽을 향하고, 발은 발코니 쪽을 향하게 된다. 내가 발코니 쪽을 머리로 한 채 잠을 잔 것은, 유사시에 플랜 B를 가동하기 위함이었다면, 이번에 자세를 바꾼 것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돌다리도 한번 두들겨보면 부서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안심보다는 의심을 우선시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나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다. 둘의 차이라면, 확신에는 증거가 필요하다. 역으로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쓰기에 따라 아주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현관에 마련된, 아주 특별한 장치에 시선을 고정한다. 우선 나는 다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는 경로로는 현관만이 존재할 것임을 가정했다. 그 외의 경우에는, 뭐 될 대로 되라지. 여하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이 환경에서는 가능할 것 같은 장치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현관의 카펫을 향해서 들어오는 햇빛을 반사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것은 빛을 반사하는 머리카락이었다. 나의 머리카락 색과 카펫의 색은, 머리카락을 카펫 위에 올려놓는다는 전제하에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밤중이라면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제 목욕 중에 빠진 머리카락을 잘 말린 후 여기에 어떤 글자를 만들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았다. 누구든 이 카펫을 밟는 것만으로 머리카락은 떠오를 것이다. 그 정도로 불안정하게 올려놓았었다. 혹은, 누군가가 그 머리카락을 밟는 경우, 같은 원리로 머리카락은 이 경우 카펫 안으로 파묻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마주한 카펫은, 그 위에 떠다닐 정도로 보이는 '70'을 표시하고 있었다.

 

 

[INS]


  어느 추운 겨울날. 따듯하게 난방을 틀어놓은 아늑한 집에서 아침의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여기 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있다. 평일의 거리는 한산하다. 그 아늑한 정적을 즐기는 사람이 여기 있다. 각박하게 맞물리는 회색의 오늘에서 작년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진가가 여기 있다. 렌즈에는 회색 조의 오늘을, 눈에는 총천연색의 내일을 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사람, 십 분 전의 자신은 기억도 안 나나 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 사람의 하루는, 그의 평소 일과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특별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의 아침은 그렇게까지 이르지는 않다. 우리가 그 점을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도 예상했는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을 우리는 간혹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성실'을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고는 합니다. 저도 물론 그 발언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그 '성실'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거죠."


  그의 의식 수준이 우리와는 너무 차이나게 높은 것일까. 우리가 그의 말을 듣고서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자,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살짝 웃음을 보이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공한 사람 중에서 대부분은 미래의 성공을 담보로 현재를 희생시키고 있는 사람들이죠. 결과는 아름다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의 고생을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가지고는 과정까지 아름다웠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완성된 성공의 형태야말로 가장 큰 관심과 유지보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때로 그들은 자신이 완성한 분야에서, 더 이상의 요구되는 노동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을 떼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이죠, 끝까지 갈 겁니다, 끝까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을 몸풀기로 여기는 겁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내일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 겁니다. 이 말을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드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와 같은 식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이 가능할 거에요. 이제 어느 정도 아시겠는지요?"


  전언 철회. 우리는 여기서 포기하겠다. 도대체 당신은. 우리는 잠자코 그의 말을 적당히 들었다는 신호를 보내준 뒤, 그가 우리의 의중을 파악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가 외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시계와 일정표와 지도를 번갈아 확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 봤자 전부 휴대전화 한 대의 화면 속이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어제의 지갑에 손을 뻗어 한 장의 카드를 꺼낸다. 나머지 한 장의 출입 카드다. 적혀있는 곳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병원이다. 너는 누구인가. 조금씩 너에 대해서 더 알아가려고 하는 나에게, 오늘은 다가온다. 더는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 아니 사실, 시간은 있기야 하겠지만, 더 이상의 정신적인 여유는 없다. 나는 수 분 전의 나로부터 오늘을 살아갈 동력을 얻었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나는 중대한 사건을 넘어서 갈 것이다. 잠에서 일어난 후 나는 이 집에 더 이상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어느 정도 확신을 했다. 어제보다는 조금은 대담해진 태도로 나는 내가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나'의 휴가를 믿고 집으로 나선다.


  거리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평범하다. '언제나'의 시점과 종점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나는 이제는 이 위화감을 그저 즐길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래는, 어떤 사소한 계기로라도 늘 보던 풍경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원래 그렇게 무른 것이다. 작은 마음의 조각만으로도 사람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반면, 자극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지금 당장은 아주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도, 금방 잊히고 또 희미해져 간다. 쾌락은 고통보다 이 특성이 더 잘 드러난다. 고통은, 그러나, 희미해져 있다가도, 아주 작은 계기에 의해서 다시 심장을 가를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흔들린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모든 주변 상황이 나에게 주는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그리워지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 가슴이 시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마주할 때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나의 생활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자면, 그런 사람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병원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아니, 가까운 줄은 알았지만,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다. 내가 가는 곳은 병원의 정문 로비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또 집과 가까운 방향에 있는 별관 건물이다. 오늘 아침 나는 나의 이름을, 병원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았다. 그곳에서 확인한 사무실의 위치까지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들어가야 한다. 우선 지금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바깥 기온을 생각하면 이건 평범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엘리베이터도, 중앙계단도 아닌 엘리베이터 옆의 피난용 계단으로 들어간다. 어째서인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적고, 무엇보다도 열린 공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탈출 가능성이다. 만일 아래나 위쪽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가장 가까운 위나 아래층으로 몸을 숨길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경우에는 이것이 상당히 힘들게 된다. 따라서 나는 묘하게 담배 냄새가 베어 있는 피난용 계단으로 들어간다. 나는 평범한 속도로 걸어 올라가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 쪽에 붙어서 올라간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젠가는 도착했어야 할 어떤 문 앞에 도착한다.


  문 옆에는 작은 표식이 붙어있다. 익숙한 얼굴 사진을 보면서 드는 짧은 생각이 있다. 저 사진은 어제나 오늘 촬영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 그 모습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도, 지금이라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내가 그 사진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내제되어 있는 의식의 영향일까, 아니면 일체감을 느끼려는 나의 본능인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은 허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객관적으로 마주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허구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기에.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보통 의사나 간호사, 아니면 원무과 직원 따위를 생각해 볼 것 같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떨까. '상담사'라는 직함은 병원에서 마주하기에는 조금 신선한 것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신과 병동과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이곳은, '상담실'이다. 문이 제대로 닫혀 있는지를 확인한 나는 방을 적당히 둘러본다. 내 생각에는, 보통의 진찰실보다 크기가 큰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담 대상자와 동행한 사람을 위해 놓여 있는 듯한, 구석의 소파에 앉아본다. 이 방을 쓰는 사람은 오늘 여기에 오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 여기에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산한 점심시간을 노려서 여기에 들어온 것은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 혹시 몰라서 문을 열 때 화분에 걸리도록 화분을 옮겨두기는 했지만, 다시 보니 별 효과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이런 곳의 청소나 관리는 아침에 하거나, 특히 주인이 부재중인 이곳이라면 오늘은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법이므로 나는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의 노트북 컴퓨터다.


  생채 인식이라는 물건은 아마도 인간의 편의를 위하면서도 최상의 보안 효과를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논리를 비웃듯이 내가 쓰지 않던 컴퓨터의 지문 인식 장치를 통과했다. 이를 통해 나의 휴대전화 또한 이 노트북 컴퓨터와 같은 사람이 쓰던 물건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의 화면에는 별다른 특징은 없었지만, 나는 자동으로 로그인되어 화면에 띄워진 하나의 프로그램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메신저 프로그램이었다. 병원 직원들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 듯하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정당한 일은 아니지만, 또 그렇기에 묘한 배덕감이 느껴지는 법이다. 다만 그 배덕감이 나에게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사람들의 대화 기록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휴가라곤는 하지만 어디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럼 다음주에 이만]


  금요일의 대화 기록이었다. 둘 다 한 사람이 한 말이었다. 그 이외의 다른 기록들까지 확인한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것 같다. 상담실을 나오면서 나는 문을 닫지 않았다. 십 미터쯤 앞으로 걸어간 후에 뒤돌아보자 문은 닫혀있었다. 이제 망설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살면서 어떻게든 해결되는 일도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니까.

 

 

[INS]


  돌아오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볍다. 교차로에 멈추어 서면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 눈앞의 횡단보도를 건널 수도 있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혹은 뒤로 되돌아가거나 멈추어 설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걷고 있는 이 길에는, 나에게 존재하는 길은, 즉 경로는, 단 하나뿐이다.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가야만 하는, 언젠가는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줄 그 하나의 경로만을 머릿속에 그리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행동 양식을 따라서 생각을 이어나갔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일 것이다.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수를 잦게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조금 이해해 주어야 할 부분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는 미래 못지않게 주관적인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부터 지금 순간 직전까지를 의미하는 '과거의 나'는 객관적인 존재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단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이해관계와 시점의 차이를 극복하고서 나의 과거는, 최소한 '절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의 과거는 조금은 어리석은 선택을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다시금 궤도를 수정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있지만 아마 그들 중 아무도 나의 진짜 표정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눈앞에는 하나의 길만이 보이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볍다. 

 

 

 

  현관문을 열면서 나는 확신한다. 휴가를 떠난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멀리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주변에는 그렇게 알렸다. 따라서 그 사람이 이 주변에서 목격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그 사람의 집에는 최소한 어제부터는 그 사람이 부재중이다. 따라서 오늘 내가 그 장소에 발을 들인다면 그 집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을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 사람의 모습은 계속 이 근처를 돌아다니더라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 사람이 멀리 갔든 가지 않았든, 그 사람이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확률은 곱하는 것이었던가. 모든 조건이 나의 상황에 맞추어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곱하는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일어날 확률은 절대 0이 될 수 없다. 나의 앞에 펼쳐진 서로 다른 무한한 개수의 확률 세계 중에서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따라서 나는 그 하나만을 본다. 그리고 나는 문을 연다. 언젠가와는 다른,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찬 움직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