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임. 잔혹동화




마빈과 로라 이야기



1



넓적한 코와 두툼한 입술.


구부정한 자세에 귀마저도 못난 그의 이름은 마빈(Marvin).


남에게 뭔가 주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도 그를 향한 조롱만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들에게 ‘저기를 보라’며 킬킬거렸고,


아낙네들은 지나가는 그에게 빨랫물을 퍼붓기도 했지요.


 

그러나 마빈은 그들 앞에선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구식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걷곤 했지요.


사람들은 그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2


그런 마빈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의 얼굴 만큼이나- 독특한 발명을 해내는 능력이었지요.


마빈은 사람들이 잠들고 나면 음침한 연구실에서 항상 연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분위기와 달리 결과물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죠. 예를들면


죽은 길고양이를 살리거나


아이들의 이빨을 아프게 않게 빼내는 일들-물론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아이들은 그만 보면 도망쳤거든요)- 마빈은 그런 발명들을 즐겼습니다.


 

3.



그 혼자만의 세계에서, 마빈은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적어도 더 나빠질 일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세상은 그에게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었습니다. 졸업식 날 침을 뱉었던 교수들부터 낳자마자 그를 버렸던 부모들까지. 그는 일찍부터 세상에 진정한 미소나 다정한 위로 따윈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네, 세상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내면 역시 살을 파먹는 구더기들로 가득 차 있었죠.


마빈은 그래도, 자신만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같은 더러움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사랑? 그런 건 믿지 않았죠. 서로 살갗을 비벼대는 저열한 쾌락 따위는.


우스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를 만나기 전 까지는…….


 

 4-1


 로라(Lora)는 상냥한 소녀였습니다. 마빈도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나이 또래치고 자신을 보고 웃거나 도망치지 않는 소녀는 드물었으니까요.


 

어느 무도회장의 뒤편,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로라는 걸어오는 마빈을 경계하며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처음엔 긴장했지만-그에 대해선 안 좋은 소문이 많았으니까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뒤편 조그만 벤치에 앉았습니다.


마빈은 로라와 눈을 마주치고 무표정하게 서 있었지만, 사실 긴장한 건 그가 더 심했습니다. 자신을 혐오감도, 지나친 호기심도 없이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는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른 채 쭈뼛거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로라는 옆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여기에 앉으시려는 건가요?”


마빈은 두려움에 가슴이 조였지만 아니라고 대답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어서, 어색한 동작으로 벤치에 가 앉았습니다. 로라는 조금 망설이는 미소를 띠며 물었습니다.


“연회를 피해 오셨나 보죠?”


마빈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처음부터 무도회는 그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괴상한 동물을 자랑하듯-그를 보여주려 했었거든요.


로라는 말했습니다.


“저는…… 잠시 꽃을 돕고 있었어요.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잡초가 너무 많아서, 지내기 힘들어 보였거든요.”


그리곤 흙투성이 양손을 감추며 수줍어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그녀는 혓바닥을 조금 내밀며 말했습니다.


“숙녀가 이런 짓을 하다니 이상하지요?”


마빈은 곁눈질로 로라를 살펴봤습니다. 푸른 드레스와 흙이 묻은 손. 확실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마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죠.


‘……예뻐요.’


 

4-2



저택으로 돌아 온 마빈은 로라를 생각했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어수룩한 자신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던 소녀를.


마치 어둡고 가치 없는 세상 속에 날아 온 베이지색 나비 같았죠.


마빈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도 안돼.’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설마,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그래도 거울에 비친 얼굴은 조심스레 웃고 있었습니다.


 

5.


그녀와 몇 번을 더 이야기를 나눈 끝에, 마빈은 로라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선물했습니다.


그 특별한 눈(snow)은 투명하게 녹은 채 조그만 유리병 안에 담겨 있었고, 뚜껑을 열면 화단에 내려 잡초만을 죽일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죠.


 


그런데 지나가던 젊은 여자가 병을 건네는 그를 보며 깔깔대며 웃어댔습니다.


마빈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로라마저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가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마빈을 로라는 조심스레 불렀습니다.


“있잖아요, 저 말은 듣지 말고 지금 나를 봐요.”


마빈은 살짝 고개를 들었습니다. 로라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 볼 수 있었죠. 그는 놀랐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진심어린 목소리. 그녀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6.


물망초, 아도니스, 멜리사.


그녀가 좋아하는 다정한 꽃잎들.



마빈은 어두웠던 저택을 꽃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로라를 기쁘게 할 계획을 세웠죠.


겨울에 꽃을 피우는 방법을. 그리고 그 겨울이 오면 로라에게 꽃다발을 선물할 것입니다.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7.



마빈은 즐거웠지만 모든 게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가을 어느 날, 마빈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로라를 보았습니다.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사실 끔찍한 그녀의 친구들은 로라를 둘러싸고 있었죠.


“로라, 정말 그 괴물이랑 결혼할거야?”


“소문에는 벌써 잤다던데?”


발개진 얼굴, 눈물 맺힌 눈동자. 로라는 상처입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끔찍하다구!”



그 말은 아팠지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로라의 영혼은 자신과 닮았으니까. 순결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쩔 줄을 몰랐던 겁니다.


화원에 쪼그려 앉은 마빈은 침울한 얼굴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믿는다, 구요.



그러니 그저 빨리 겨울이 오기를.


 


8.



첫 눈이 내렸습니다.


겨울 여신의 축복이 내리는 밤. 손을 마주잡은 여인들, 뛰어 노는 아이들.


밤 거리는 촛불로 가득 찼습니다.


원래라면 마빈이 늦은 저녁에 나올 일은 없었겠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먹었거든요.


머리를 빗고 넥타이를 매고 새로 만든 정장을 입고-솔직히 여전히 끔찍했지만-


마빈은 저택을 나섰습니다. 오른 손엔 꽃다발을 들고 있었죠.



그 대화를 엿들은 후 로라를 만나는 건 거의 세 달 만이었지만 특별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 맑은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봐주길 원했고


작은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주길 바랬고


다만 그날 밤처럼 다시 한 번 자신을 보며 웃어준다면…….


그렇다면 그 역시 처음으로-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마주 웃어주고 싶었습니다.


깨진 거울은 고쳐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처럼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10.



그러나,


마빈은 좁은 골목길에서 멈춰 섰습니다.


골목 너머 밤 거리는 특유의 퇴폐적이고 화려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죠.


 

근사한 호텔 앞에 로라가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와 꼭 닮은 멋진 남자의 손을 잡고


예쁜 미소를 가득 띄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빈은 숨이 멎을 것 같았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더러운, 기쁨에 찬 미소를…….


그 얼굴은 너무 반짝이고 있어서 마빈은


지금까지 보여 준 미소가 모두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1.



등불이 꺼지고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마빈은 여전히 좁은 골목 안에…….


그리고 더는 물러나지 않을 처절한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 추위와 죽음은 꽤 오래 잊고 있었지만 익숙한 것이었지요. 마빈은 그 선명한 푸른색이 자신의 것임을 느꼈습니다.


 

로라가 들어간 호텔의 방은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꽃은 시들었죠.


마빈은 그 속에 온갖 더러움과 거짓이 소용돌이 치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역시 다 똑같았구나. 당신도, 이 겨울도.


이젠 알겠어. 그런 아름다움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이젠 내가 손에 넣어줄게’


 


12.



마빈은 키웠던 꽃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여태까지 하지 않았던 복잡하고 편집증적인 연구였죠.


그건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하기 위한 수술계획이었습니다.


 


13.



특별한 연구엔 특별한 재료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마빈은 늦은 밤이면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수집했습니다. 정말 필요한 재료들은 주로 젊고 예쁜 여성들에게서 나왔죠.



마빈은 그녀들을 죽이기 전 목을 조르고, 발광하면서 그들을 범했습니다.


아, 한 때는 저주했었던 쾌락, 뜨거운 호흡에. 마빈은 자신의 영혼이 젖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너덜너덜한 영혼을 구멍 속에 흘려버렸죠.


네, 그래요. 그건 아주 끔찍하고 버거운 타락이었습니다. 그 밑자락에 마빈은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빈은 울부짖으며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이걸 원해! 마치 그녀처럼!’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려가는 거야 더 깊은 곳으로. 나도 이제 똑같았다는 걸 알겠어.


이 세상엔 정말로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던 거야.‘


 


14.


푸들푸들한 살결, 매혹적인 입술, 날카로운 눈매, 깊고 푸른 눈동자.


황금색 머리카락, 젊고 어린 육체, 곧고 바른 등뼈와 벌어진 어깨.


믿음직한 숨결, 낮게 울리는 목소리.


이파리 같은 영혼과 정욕적이고 저돌적인 두뇌까지!


그 모습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썩어가는 수십 구의 육체 위에서. 마빈은 마침내 다시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마빈’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 미소는 결코 순수하거나 밝지는 않았지만 천사라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올 만큼 매혹적이긴 했죠.


 


15.



마빈의 모습은 완벽했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양 손은 새빨갛게 변해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연구과정에서 손목 자체를 몇 번이고 바꿔 붙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창백했던 양 손에는 금세 흘러내릴 듯 빨간색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사소한 건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양 손에 하얀 장갑을 끼고서 그는 당당하게 거리로 나섰습니다.


 


16.



술집이든 무도회장이든 그의 주변은 여자로 북적였습니다.


마빈은 한동안 매일 새로운 숙녀와 잠자리를 가지며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녀들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마빈의 입술에, 허벅지에 키스를 했고 몸을 떨며 헐떡이다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녀들의 마지막이었죠. 마빈은 지난 몇 년 동안 관계를 가진 후 상대를 죽이는 게 습관이 되었거든요.


그는 편안하게 웃는 여인들의 얼굴을 뜯어내 뒤집어 쓰는 걸 즐겼습니다.


 


17.



그리고 마침내


마빈은 어느 초라한 술집에서 혼자 취해있는 로라의 옆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더는 청순해 보이진 않았지만 젊음이 무르익은 나이였고 그만큼 더 고혹적이었지요. 그러나 이젠 마빈이 새로 소유하고 죽였던 여자들 중엔 훨씬 아름다운 여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죠. 심장 깊숙한 곳 한 쪽은 여전히 아렸지만요.


 

로라는 이미 취했는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않았지만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상대가 취한 경우라면 보통 일은 오히려 더 쉬웠죠.


마빈은 자신의 목소리, 태도, 젊음이 그녀를 사로잡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빈은 즐겁게 많은 이야기를 떠들었죠. 그는 솜털 같은 태도로 로라에게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구요?”


로라는 수줍게 웃었습니다.


“네, 있었죠. 세 명 정도……. 하지만 전 남편은 그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창녀 같은 년.' 마빈은 생각했습니다.


로라는 새빨간 와인을 들이키더니 발그레 웃었습니다.



“나 취했나 봐요. 처음 만난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혹시 우리 본 적 있나요?”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마빈을 바라보았습니다. 마빈은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여자들이 항상 하는 멘트였죠.


로라 역시 잠시 후 피식 웃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마빈의 머릿 속을 온통 뒤죽박죽 흔들어 놓았습니다.


 


19.



“제 사랑은 전부 짝사랑이었어요. 사랑을 알게 될 나이엔 이미 결혼 한 후였으니까. 마음을 숨길 수 밖에 없었죠.


그 결혼은 부모님의 뜻이었어요. 빚을 갚으려면 꼭 필요한 거라고, 아버지가 그랬답니다.


로라야, 우리는 네가 소중하단다. 네가 필요하단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세요.


하필이면 그 말을 제 생일에 하시더군요. 매년 제 생일마다 가족과 묵는 호텔이 있었거든요. 저는 그날 밤 어두운 방에 들어가 혼자 울었답니다.”



로라는 와인을 홀짝이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미움을 샀어요. 저는 아이를 낳지 못했거든요. 결국 쫓겨날 즈음에는 온갖 이상한 약들을 먹어야 했죠. 그러다 결국…….”


로라는 잠시 먼 곳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지친 얼굴로 마빈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랑이라구요?


파혼당한 후에 줄곧 방황하고 있었는데……. 아주 그리운 말을 들었네요. 사랑, 이라니…….


네.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세상엔 그런 게 있었죠.”


그녀는 고요하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죠.


“그런데 있잖아요, 요즘은- 그 바랜 인연들보다 결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떠올라요.


어쩐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한테는 미안한 게 많아요.


한 번은 친구들이 너무 놀려서 싫다고 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녀는 쿡쿡 웃었습니다.


“전 정말 어렸었거든요.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를 다시 만나면-비록 그가 듣지 못했더라도-그런 말을 한 걸 사과하고 싶었는데……. 그 후로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어쩌면 정말 제 얘기를 들었는지도 모르죠…….”


로라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가만있다가, 예전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믿어요. 그라면 결국 용서해 줬을 거예요.”


 


20.



말 없이 앉아있는 그들의 테이블로 잘생긴 사내 한 명이 걸어왔습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마빈이었지만 그 얼굴은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변했지만, 그 해 겨울 로라와 손을 맞잡고 있던 호텔 앞의 사내였습니다.


“로라?”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로라는 기쁜 듯 일어나다 비틀거렸습니다.


“오빠!”


남자가 그녀를 품에 받아 안자, 로라는 그대로 잠들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죠.



남자는 경계하는 눈으로 마빈을 내려다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당장 기절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거든요. 잠든 로라를 소중히 안고서 남자는 마빈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벌일 작정이었다면 그만 두세요. 동생은 이미 시력을 잃었습니다. 다른 상처까지 주지 마세요.”


 


21.



그들이 떠나고 마빈은 가게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엉엉 울면서 거리를 걸었죠. 하얀 입김, 밤 하늘은 금세라도 비라도 쏟아져 내릴 듯 검은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건 누구였지?’


마빈은 되뇌었습니다.


‘아름답지 못했던 건 대체 누구였지?’


바닥에 꿇어 앉은 그는 장갑을 집어던졌습니다. 그의 양 손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죠. 살갗이 뭉개지도록 바닥에 비벼도 지워지지 않는 색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진창 속으로 걸어들어갔던 겁니다. 그리고 사실 그 진창이야 말로 그의 영혼에 어울리는 자리였죠.


그걸 부정했었던 옛날에는 적어도 아름다움이란 걸 생각할 수는 있었습니다. 적어도 바라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습니다.



로라는 더 이상 순결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고귀하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마빈은?


로라의 아름다움이 절대 그 외모가 전부가 아닌 것처럼


그의 추악함도 단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질투와 아집, 추잡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건 세상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던 겁니다.


 


23.


연구실로 돌아 온 마빈은 썩어가는 시체 더미 속에서 거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야 보였습니다.


부서진 거울에 비친 그는


커다란 검은 뿔과 일그러진 얼굴, 새빨간 손에 더러운 성기를 지닌 악마였습니다.


 


24


마빈은 무릎 꿇고서 마음 속 깊이 용서를 빌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깨달았습니다.


네, 그는 감히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미안해요, 로라.”


마빈은 권총을 들어 관자놀이에 댔습니다.


오른쪽 검지로 가볍게, 방아쇠를 당겼죠.


죽음은 새처럼 가벼웠고 마빈의 몸은 자신이 만든 시체더미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5.


그리고



로라는 뺨에 닿은 서늘한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살짝 만져보자 천천히 흘러내렸죠. 네, 올해 첫 눈이었습니다.



문득 그녀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눈’ 덕분이었지요. 그 옛날 마빈이 건네 준 눈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여름에 내리는, 꽃을 지켜주려는 눈은 허망하지만 가치있는 것이었죠.


그러고 보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 눈꽃처럼.



이제 그녀의 세상은 검게 변했지만,


첫 눈은 영원히 아름다울테니까.


“오빠.”


“응?”


“나, 이제부터 다시 꽃을 기를래요.”


로라는 조그마한 꽃집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마빈이 찾아오면 꽃다발을 선물해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영원한 어둠 속에서, 소중한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26.


거리에 첫 눈은 소리 없이 내렸습니다.


마음에 내린 눈은 멈추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죠.



로라는 옷깃 속에 얼굴을 묻고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끝





군대에서 잔혹 동화 컨셉으로 같이 만들었던 거

그림은 그때 같이 복무했던 동생이 그렸는디 이젠 거의 디자인 쪽으로 빠졋다..

그림, 기초 플롯: marvinkim (https://spine-press.com/Type-Plant-1)


썼던 것 중에 좀 행복한 거 없나 뒤져보다가 발굴해서 올려봄

근데 이것도 문장선은 가는데 결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