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게임 출시가 임박했다.


아마도 다음 주면 정식으로 런칭할 예정인데 사소한 것을 두고 여자친구와 사소한 다툼이 생겼다.

그녀는 내 동업자기도 했다.


"이 사람들 불쌍하지 않아?"


그녀는 NPC가 불쌍하다고 했다. 용사가 구해주기 전까지 멸망을 반복하는 세계라니.

하지만 퍼블리셔와 합의된 내용이기도 했고 플레이어가 용사가 되어서 멸망 위기의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소재였다.

물론 그녀도 이미 합의된 얘기이며 매력적인 소재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듯 역시 NPC들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 세상에선 버티지 못할 거라고도 했다.


...여기서 끝냈어야 했다.

일 때문에 피곤했던 나는 혼잣말에 가까웠던 그녀의 말에 짜증내듯 말하고 말았다.


"지안아, 과몰입 좀 하지마. 네가 무슨 애야? 일일히 NPC입장에서 슬퍼하게?"


그녀도 피곤했던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오늘따라 유독 감성적이었단 걸 알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녀는 내가 피곤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슬픈 얼굴로 나를 흘겨보곤 조용히 방을 나갔을 뿐이었다.

그래, 밤 산책이라도 하고 와라. 그런 생각으로 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2. 그녀가 죽다.


나는 새벽에 전화 오는 게 정말 싫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새벽에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전화는 내가 받을 때까지 울렸다. 일부러 폰을 꺼놨는데도 집 전화를 계속해서 걸어댔다. 

별 것 아닌 이야기면 엄청나게 짜증내야지. 그런 마음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머님 일단 오라니요. 지안이가 왜 병원에 있어요?"


지안이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불길한 예감이 끈적하게 몸을 휘감는다.

뭔가에 홀린 듯, 택시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빗속을 헤치며 마구 병원으로 달렸다.

도착했을 때, 나는 흠뻑 젖은 채로 영안실 앞에 있었다.

병원에 있다더니 왜 환자실이 아니지? 내 뇌는 이미 그 이유를 알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잘못된 정보다. 그래야만 했다. 세상이 잘못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3. 게임 속으로 떨어지다.


사인은 교통사고. 빗길은 운전자의 예상보다도 미끄러웠던 것이 이유였다.

난 이래서 비보호 우회전이 싫어. 그런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며 제작 중이던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관전자 계정이었다. 내 캐릭터 주위로 그녀와 같이 만들었던 세계가 아름답게 흘러간다.


"...씨발."


이런저런 설정과 클리셰를 추가하며 즐거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다가도 흥미로운 스토리가 생각나면 소곤소곤 말해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씨발, 씨발! 개좆같은! 개씨발 병신새끼!!"


키보드를 마구 내리치고 되도 않는 주먹으로 모니터를 후려갈긴다. 마우스는 이미 걸레짝이 된지 오래.

그럼에도 세상은 일그러진 채 여전히 흘러갈 뿐, 게임을 향해, 나를 향해 아무리 울부짖고 욕을 뱉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내 불쾌한 감정과 후회만 점점 피폐해질 뿐이었다.


-관전 시간이 길어지면 게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급격하게 분노를 표출한만큼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감.

나는 잔해가 되어버린 기계들 사이에 머리를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우리가 만들었던 세상에 서 있었다.



4. 클리어 조건


이 세상이 멸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신이 쳐들어 오니까.

이제와서 자세한 설정따위 기억하기도 싫지만, 확실한 건 용사 없이는 마신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내가 꿈을 꾸나? 그런 생각이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빌어먹을 만큼 정교한 꿈이었다.

그래, 꿈이라면 깨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마신을 막으면 되지."


어차피 시간은 100일이나 남아 있다.

그 안에 아이템을 모으고 레벨을 올려서 압도적인 스펙으로 마신을 찍어 누르면 되는 문제다.

하지만 알던대로 정보창을 켰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곳의 용사가 아니었다.



5. 첫 번째 패배


용사는 용사만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경험치 배수' 스킬과 '모든 공격력이 2배 상승'하는 비기 스킬이다.

용사도 결국 팀을 이뤄서 싸울테니 다른 NPC들이 쓸 수 있는 스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용사 전용 스킬은 용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


"...어차피 나는 파밍 루트와 숨겨진 장소, 그리고 아이템 조합을 다 알아."


그딴 전용 스킬 없어도 나는 충분히 강해질 자신이 있었다. 이 세상, 아니 게임의 제작자니까.

빠르게 루트별 사냥터를 기억해내며 엄청난 속도로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모았다.

99일 동안 그 짓을 반복했다.

만렙은 찍지 못했지만 모든 스탯을 풀로 찍고 비기 스킬까지 마스터. 아이템은 대마족 결전 병기로만 도배했다.

아니나 다를까 100일 뒤 몰려오기 시작한 마신의 군대는 내가 검을 휘두르고 고함을 칠 때마다 부대 단위로 휩쓸려 나갔다.


하지만, 마신은 정말 강했다. 자체 회복과 데미지 반감까지 지녔는데 내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 패턴까지 구사했다.

퍼블리셔에서 뭔가 만져놓은 게 틀림없었다.


결국 놈의 피를 반정도 깎았을 때, 나는 죽고 말았다.

마검에 베이는 느낌은 정말 끔찍하도록 아팠다. 근데 꿈이 이렇게 아플 수 있나?

뭐, 쨌든 이제 꿈에서 깰 차례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6. 파티를 이루다.


눈을 떴을 때는 처음의 장소 그대로였다.

레벨 1에 마신이 오기까지의 카운트 다운도 100일. 정말 지독한 꿈이었다. 설마 클리어 해야 깨어날 수 있는 건가.

내 꿈 속인데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뿐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이 좆같은 꿈, 깨어나고 만다.

일단 딜이 부족했으니 NPC들을 데리고 파티를 이루면 될 것이다.

파티사냥은 솔플과 루트가 조금 다르지만 이 또한 다 꿰고 있었다.

대충 한 명당 10퍼 씩만 더 깎아줄 수 있어도 확실히 클리어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용사가 아닌 관전자는 이곳에서 모험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험가는 NPC에 대한 호감도가 0에서 시작한다. 정말 짜여진 대사대로 모든 NPC가 파티 합류를 거부했다.


"씨발. 진짜 좆망겜이네."


하필 이 부분은 내가 설계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기억을 꼼꼼히 되새겨봤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기억이 떠오르며 이 파티의 해답도 역시 떠올랐다.


"지안아..."


감정이 마구 역류했다. 그녀는 과몰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려깊게 설정을 안배해 놓았었다.

그것 중 하나가 호감도에 관계없이 파티를 맺어주는 '착한 NPC' 들이었다.

용사는 어차피 그런 것과 하등 상관없지만 그녀는 왠지 그런 설정까지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돌아오다니. 하지만 게임 속이라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게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 나는 울 수조차 없었다.



7. 두 번째 패배



다니아, 루시, 화란, 에리, 려. 총 5명의 NPC와 파티를 맺었다.

착한 NPC라는 설정이지만 그것은 호감도와 별개로 행동할 수 있다는 기준일 뿐이지 성격이 착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해보지 않은 온갖 미사어구와 칭찬, 그리고 처절한 연기까지 해가며 그들을 이끌어야 했다.

다행히 어느 수준부턴 내 리드에 잘 따라와줘서 95일동안 전설급으로 모든 세팅을 마쳐줄 수 있었다.


"우린 이제부터 마신을 막는다."


NPC를 구하느라 소모한 2일을 생각하면 남은 시간 역시 2일뿐.

가장 효과적인 버프를 부여하는 전술을 가르치며 2일을 보냈고, 다시 한번 나는 마신과 싸웠다.

이번엔 5명이 더 있다. 평균 레벨은 첫 트라이보다 낮았지만 버프와 전술 효과 덕분에 마신의 피는 이제 10퍼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마신은 남은 체력이 10퍼일때 부터 정신제어 능력이 추가된다.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이 또한 역시 대비를 해둔 상태라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는데...


설정상 마음이 여린 에리가 점점 행동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정신제어 내성 버프에 룬까지 박아줬건만, 마신은 누가 가장 정신제어에 약한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에리만 집중적으로 케어하면 되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모두가 내 지시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파티원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마신은 모두에게 정신제어를 걸고 있었다. 에리만 케어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결국 다시 한번 나는 마검에 베여 죽었다. 두번째 패배였다.



8. 세 번째 패배


용사가 아니란 이유만으로 나는 패배하고 있는 걸까.


"젠장. 밸런스 좆망겜이네."


하지만 나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진다는 것은 납득이 안갔다.

그래, 내가 가진건 모든 것에 대한 정보이다.

정신제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단순한 내성 수치 외에도 호감도 역시 영향을 준다는 걸.

단순히 파티원의 전투력을 올리는 데에만 집중했었던 것이 문제였을 수도.

그렇다면.


"호감도를 올린다."


NPC는 지안이가 관여한 부분이 더 많지만 설정의 결과, 즉 NPC에 대한 정보 자체는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다.

다니아, 루시, 화란, 에리, 려. 이 멤버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파티를 꾸렸으니까.

호감도까지 신경 쓴다면 평균 레벨은 더 떨어지겠지만 저번의 딜은 충분히 넘쳤다.

정신제어만 막아도 클각이 보였다.

저번처럼 파티 구인을 시작했지만, 동시에 그녀들이 좋아하는 물건, 음식 등등을 모두 준비해서 충실히 호감도를 쌓았다.

말 역시 성격에 맞춰 가장 좋아할만한 얘기만 해줬다.


마침내 결전을 10일 앞두고 모두 호감도를 95까지 찍을 수 있었다.

이대로면 남은 일정동안 100찍고 전술 훈련까지 가능하다.


...그랬어야 했다.

예상대로 분명히 흘러갔어야 했는데 갑자기 돌발 이벤트가 발생했다.

첫 만남부터 모든 걸 알고 있는 나에게 루시가 작은 의심을 품고 있던 와중, 내가 작성한 계획표를 발견했던 것이다.

마신의 권속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는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서 그녀는 파티를 탈퇴했다.

그리고, 그녀는 힐러였다.

간신히 달랬지만 호감도와 별개로 씹창나버린 신뢰도 때문에 마신과의 결전에서 그녀는 결국 정신제어에 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떤 병신이 신뢰도라는 시스템을 만든 거지?


"시발, 그것도 나구나."


또 다시 섬뜩한 감각을 맛보며 패배했다.

이제는 별 방법이 없는 걸까.



9. 4번째 도전


무력함. 다시 1렙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하루 종일 풀밭에 누워있었다.

빌어먹을만큼 정교한 이 세상이 나를 비웃는 듯 했다. 동시에 여길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이 온몸에 감돌았다.

그래도 이 세계는 그녀의 마음이 남아 살아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대로 무한하게 갇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잊으려 했던 그녀의 기억이 억지로 떠올랐다.

그러지 말라는 듯,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네가 이 게임을 처음으로 클리어 해줬으면 좋겠어.'

'나?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더 사랑하니까.'


그래. 지안이를 위해서라도 클리어 해야한다.

이딴 식으로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다. 좆망겜이지만, 그래도 클리어 해야 내가 그녀를 생각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하루를 손해봤지만 괜찮다. 아직 시도해볼 방법은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로 내려왔을 때였다.


...모든 NPC가 누군가를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용사? 어째서?"


이제껏 없던 일이 왜 이제서야 일어난거지?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용사는 엄청나게 강하다.

내 파티에 넣어서 어떻게든 성장시키고 정상적인 방향으로 이끌면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용사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정해진 정보가 없는데...

그런 고민을 하며 용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안아?"


그녀가 용사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