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불안감

1. J-프롤로그

2. 동명이인 비슷한

3. H-프롤로그

4. 흔한 이능력 배틀물

5. 기숙사 비스무리

6. D-프롤로그

7. 암살

8. 주머니에 손 넣고

9. 도전

10. 언제나 최초목격자가

11. 입학식

12. 배신자

13. 저랑 싸우실래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굳이 부정할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나랑 쥘, 이난, 조제프가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보통은 학교 내에 있는 기숙사에서 방을 구해다 쓰거나 아니면 통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심지어 빈 방이 4 방이나 있어서 우리 네 명이 거기로 들어와도 된다고 한다. 그래도 가기 귀찮아서 가진 않을 거지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살짝 후회하긴 했다.


"어? 그 애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애들'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굳이 따지자면 별명은 아니고 그냥 보통 말이지만, 그래도 우리 4명이 전부 외국인이다 보니 반쯤 별명처럼 들릴 뿐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어떻게 느끼는 건 다른 문제니까.


"어, 안녕하세요."

등교 중에 우연히 교수를 만났다. 이름이 뭐라 그랬더라. 남은주였나.

"어, 쥘. 안녕."


아직 쥘이 누군지 잘 모르는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며 쥘의 인사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한 마디 이야기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더니 의외로 쥘도 그냥 지나갔다.


"말 더 안해?"

"교수님이 친구냐? 바쁘시겠지."


적어도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 아니면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그럼 나랑 처음 만났을 땐 친구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냐고 물어봤자, 그 때는 비행기 안에서 9시간 동안 있어야 했었는데 뭐가 바빠, 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교 앞까지 와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네 명이서 서로 이야기해서 시간표를 짜 맞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학과다보니 어느 정도 시간이 맞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들을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는 아까 봤던 그 사람이었지만, 저번에는 우리랑 나이대가 비슷하게 보이는 조교가 앞에 앉아서,


"교수님은 웬만하면 이런 수업엔 잘 안 오세요."


라고 했던 기억이 있는 그런 수업이었다. 확실히 교수 입장에서는 초능력이 뭔지 탐구하기도 바쁠텐데, 초능력과 사회의 연관성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겠지. 딱 보기만 해도 왠지 모르게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 해도 될 것 같은 주제고.


"안녕~"

그런데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교수가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이 수업에 유쾌한 기분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이 그런 말도 했었다.


'근데 1학년 학생들이 입학식때 했던 말 기억 못하고 초능력으로 사고치면 교수님이 나올 수도.'

초능력을 쓴 게 아니라서 살짝 애매하긴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마 저번 주말에 그 사건. 쥘이랑 한 홍콩 사람이랑 합심해서 체인 불량배 한 사람을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팬 그 일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어, 왠지 내 탓은 아니긴 한데 괜히 미안해졌다.


"그럼, 학생 여러분들도 다 온 거 같으니 수업을 해볼까요.


두 번째 수업이긴 하지만 여러분들과 이 수업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죠. 첫 시간에 못 만나드려서 죄송합니다. 우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원래는 제가 오리엔테이션때도 이야기했듯 텔레포트를 이용해 수업에 어울리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었죠? 물론 이 수업도 그럴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수업에 어울리는 곳이라 하면, 역시 사회를 다루니 광장이나, 그런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런 곳은 비싸거나 안전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과 강의실을 빌렸어요. 다행히 사전에 여러분들에게 연락이 가서 모두 출석했네요."


빌렸다고는 말하지만, 아마 사회학 강의실이니까 그쪽 교수님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교수는 그러고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되서 저 젊어보이는 사람이 굳이 일부러 헛기침을 하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쨋든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면,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이 참에 확실히 짚고 가야할 게 있는데요.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먼저 할게요."


그 뒤로는 진짜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초능력이 생긴 뒤로, 세상은 확실히 많이 바뀌긴 했다. 그 중 한국이 가장 많이 바뀌었는데, 바로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통일되었다는 점 때문일 거다. 듣기로는 북한 정권이 초능력 때문에 혼란에 빠져 무너졌고, 그걸 남쪽에서 흡수했다고 한다. 이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는 정보와는 조금 다른데. 어쨋든 그 과정에서 통일도 했겠다, 법을 싹 갈아치우고 새로 만들다시피 했고, 조금 긴 논의 끝에 새로운 사회에 맞는 법이 나왔다고 한다.


"흠, 학계에서는 이걸 뭐라고 부를지도 아직 제대로 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냥 편하게 초능력이라고 부르면 되지 싶은데, 그게 전 세계적으로는 좀 정확하지 않은 단어 선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뭔가 따올 만한 고유명사도 생각보다 문화권별로 다양해서 통일시키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냥 제 수업에서는 제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게요. 이걸 저는 '초능력' 이라고 하고, 이게 흔해진 이 사회를 '초능력 사회' 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들에게 명칭 가지고 세뇌를 시키거나 그럴 생각은 없으니 여러분들은 편하게 생각하고 해석해주시면 되요."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이름 가지고 싸우는 걸 보니 학자들의 속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면, 전 세계는 초능력 사회로 접어든 이후, 많은 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게 초능력에 관련된 수업인지, 사회에 관련된 수업인지 역사 수업인지 모를 내용과 과정을 설명했다. 대충 과정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이해가 되진 않지만, 결국 전 세계도 많이 바뀌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대충 설명하면 그렇게 되서 기어라는 조직이 범국가적인 기업으로 급성장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지는 않아지만, 국가의 정부가 경찰 업무랑 범인 구속 업무를 기어에게 어느 정도 위탁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치안은 기어가 거의 담당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경찰 조직이 전세계적으로 넓어져서 좋은 점은 꽤 많습니다. 우선 인재풀이 엄청 많아졌어요.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범죄는 끊이지 않는데, 그간 정부가 무력하거나 부패해서 경찰로 소용이 없는 나라도 있었죠. 그런 취약점을, 기어는 잘 파고들었죠."


보통 수업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는 쥘이 왠지 모르게 수업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정의감이 투철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도, 기어가 우리에게 좋은 일만 해준다건 아닐텐데. 원체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뭔가가 '좋다' 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안좋은 점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금이 좀 많이 나가긴 하지만요."


역시, 그런 무지막지한 규모의 인력을 정상적으로 돌리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갈 거고, 그 자금을 각국으로부터 얻어낸다. 그래서 세금이 엄청 많이 나가고, 물가도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기어의 요즘 주 업무는 범죄조직, 정확히 말하면 각성제 유통업체인 체인을 뿌리뽑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체인에 관한 것도 설명할까요."


체인. 그동안 범죄조직이나 조직이나 뭐라고 계속 들어왔지만, 체인이 하고 있는 정확한 일은 각성제 제조업, 유통업이라고 한다. 알기쉽게 말하자면 마약 물주, 라고 교수도 먼저 말했다.


"이 체인이란 조직도 기어 못지 않게 거대한 조직입니다. 체인은 기어와 다르게 굳이 기어를 무너뜨리려는 게 목적이 아니지만, 요새는 교전도 하는 거 같더라고요. 특히 기어의 본부가 한국으로 오게 된 다음부턴 한국도 더 이상 치안이 좋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됐죠."


자기의 나라인데, 치안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꽤 덤덤하게 하고 있다.


"계속해서 체인과 기어가 대립하게 되었으니까요. 어쨋든, 한국은 체인 입장에서도 버릴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야 그렇겠지. 체인은 태국이나 라오스같은 인도차이나 반도 쪽, 그리고 러시아 쪽에서 꽤 시장이 큰 편이니까. 그 둘을 지리적으로 잇는 중국, 일본, 한국이 꽤 주요한 거점이다.


"중국은 국가 공안의 힘이 너무 강해서 그 쪽을 이용하기엔 좀 힘들어서, 일본과 한국이 특히 충돌이 자주 일어나죠. 이렇게 말하면 제가 체인 쪽을 너무 안 좋게 말하는 것 같네요."


물론 세상의 통념으로 보면 체인이 무조건 나쁜 게 맞지만. 체인의 좋은 점을 굳이 생각해보자면, 기어에게 세금을 내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 있을 거다. 어느 정도의 보호금이라는 명목으로 체인 쪽에서 돈을 걷어가지만, 그게 기어의 세금만큼 비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좋은 점이라고 생각될 만한 게 없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물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기어가 아무래도 공인된 조직이고, 체인은 마약 유통업이니만큼 누가 봐도 어느 쪽이 조금 더 정의에 가까운가는 명백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견이란 걸 잊지 마세요. 제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전공은 아니지만, 인간의 가치관은 사회마다, 시대마다 계속 바뀌어왔어요. 게다가 지금 세상은 한국이 그나마 안정되어 있을 뿐, 다른 나라, 어쩌면 한국의 다른 지역은 여기보다 혼란스럽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몸짓까지 튀어나오진 않아도 어느 의미든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 사람들 중 몇몇은 조금 좋지 않은 곳에서 자라왔거나, 아니면 체인을 옹호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기어보단 체인 쪽이 정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아니, 확실히 있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렇지 않으면 체인이 그 정도로 성장했을 리 없거든요."


이 수업은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들었던 수업이다. 강의 제목을 듣기만 했을 땐 무조건 심심하고 재미없고 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질문하는 학생들도 꽤 많았다. 주로 체인과 기어의 역사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서였지만.


"이번 수업은 여기서 끝내도록 할까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교수는 수업을 끝내겠다고 했다. 끝난다고 명시된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아있었는데, 교수 말로는 우리들에게 학점 후하게 주고 싶어서라고 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사실은 이런 수업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겠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교수가 나가자마자, 쥘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그렇게 물어봤다.

"뭐가."

"기어랑 체인이랑."


아쉽게도 나에게는 독심술이 없어서 쥘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왜."


"그, 저번에 그 사건 있잖아. 그 나랑 한 명이 불량배 팬거. 저 교수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혹시 우리들 중에 체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괜한 짓을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쥘이 사과를 하려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글쎄, 그래도 우리들 입장에선 기어가 확실히 좋은 편 아니야? 세금은 많이 나가지만."

"응, 마약은 인생 망하는 지름길이라고도 하고."


근처에 있던 조제프와 이난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딱히 거리낄 것도 없나.


"나는 체인을,"


증오해, 라고 말하기 전에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강의실 문 바로 앞에서 검은 후드를 쓴, 누가 봐도 수상해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세요."


나나 우리 4명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경계했고, 나는 상대방의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보며 말했다.


"곧 여기에서 강의 듣는 학생인데요."

도저히 안 믿기지만, 그렇다고 하니 굳이 막을 일은 없다. 여기서 학생증이나 그런 걸 요구하기도 웃기는 노릇이고. 그렇지만, 아직 명시된 초능력과 사회 강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25분 정도 남았다.


"저기, 5분 뒤면 수업 시작이라."

"네?"

그럼 수업이 겹친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교수가 수업을 하기 싫어서 일찍 끝낸 게 아니라 이런 이유가 있는 거였나. 모르겠지만, 어쨋든 앞의 사람이 무척 수상하게 보여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뒤편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곧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면, 이대로 일단 나가는 게 좋겠지. 뭔가 그 검은 후드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럼 술이나 마실까?"

이번에 술을 마시자고 한 사람은 처음으로 쥘이 아니었다. 

"이난 네가 왠 일이야?"


"오늘은 좀 다른 데 가고 싶어서. 언젠가 한 번은 데려가고 싶은 술집이 있었는데. 오늘 수업 들으니까 마침 생각난 곳이 있거든."

이난치고는 드문 제안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우리 넷은 그대로 이난이 가자는 대로 갔다.



"저기?"

"응."

조제프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난이 가리킨 곳은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있지만 나름대로 술집이었다. "저기는 좀 그렇지 않아? 뭐, 상관 없으려나."


말로는 상관 없을거라고 하면서도 조제프는 뭔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가본 적 있어?"

"한 번. 조제프랑 둘이 있을 때."


이난은 자기가 제안한 술집인데도 약간 망설이는 말투였다. 거기까지 말하다가, 결정한 듯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랑 쥘이 다음으로 들어갔고, 조제프가 살짝 주저하면서 문을 닫았다.


"각오했던 것 보다 사람 없네?"


그 술집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디자인은 어지러운 듯 하면서도 깔끔했고, 술과 안주의 종류도 다양했다. 술은 정말 온갖 게 다 있었는데, 오랜만에 우리 4명이 제일 좋아하는 술을 각각 고를 수 있었다.


"여기는 분위기가 좀 섞여 있어서. 체인도 오고, 기어도 오는 그런 곳이야. 재미는 있는데 안전을 생각하면 안 오는 게 좋지. 그래도 한 번은 올 만 하다고 생각했어. 한국이 어떤지도 알려줄 겸."


그렇게 말하면 이난이 왜 우리를 이 술집으로 초대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우리들이 주문을 마칠 때 쯤, 사건이 일어났다. 한 여자가 술집의 문을 홱 열고 들어온 것이다. 여자는 제일 독한 술을 달라고 하더니 술을 받자마자 한 번에 꿀떡꿀떡 넘겼다.


"아따 술 한 번 잘 마시네."


조제프가 속삭였다. 네 명 중 가장 여유로운 성격이라 저리 말은 해도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그 여자에게 쏠렸다. 그래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지 그 독한 술 한 병을 다 비웠다.


"에이, 씨발. 좆같은 거."

여자는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욕을 입에 달았고, 그 어투도 걸걸해 술집 안에 있는 사람이면 다 들을 만 했다. 아무래도 독한 술을 퍼마시면서 욕을 하는 것 보니 무슨 일이 있던 것은 확정이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지만.


"저기, 좀 조용히 해주실래요?"

평소라면 쥘이 했을 말을,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했다. 깡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어, 싸운다 싸운다."

그동안 계속 뭔갈 고민하던 쥘이 화색을 찾았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나도 그게 재미있어보여서 딱히 말리진 않았다. 말린다고 하더라도 둘이 순순히 따라줄 것 같지는 않고.


"야, 넌 누가 이길 거 같냐."


"나는 저 남자. 아무리 깡말랐다고 해도 기어 소속이라는데 술 꼴은 여자 쯤은 이기겠지."


"저 여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일단 눈빛 부터가 예사롭지 않은데. 기어 경찰을 앞에 두고도 저런 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이난이 물어본 말에, 쥘은 남자 쪽이 이길 거라고 봤고, 조제프는 여자 쪽의 편을 들어주었다.


"박,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두 명이 싸워서 누가 이기느냐, 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싸우느냐에 더 관심이 갔다.


"이미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경찰학교에서 가르치냐. 너희들이 우리 동생 죽여놓고 그딴 식으로 나와?"


하지만 아직 몸으로 치고박고 할 그런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여자 쪽은 남자 쪽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고.

"동생?"

"저 여자 체인이네." 이난이 말했다.


"저 여자랑 남자는 처음 보는 사이갖고, 체인 조직에서 보통 동생이라고 하면 자기의 후배들을 한 번에 통틀어서 가르키는 말이니까."

이난 이 친구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제쳐두고, 확실이 그녀는 체인이었다. 나는 왠지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쥘에게 살짝 물었다.


"쥘, 괜찮아?"

"뭐가?"

"아니, 너, 체인이."

"아, 그거. 미안. 좀 이따가 말할 테니까 그 때 이야기하자."


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술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보는 것마저 걱정될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회복했다. 걱정해서 손해봤다. 그나저나 쥘 얘는 또 뭘 이야기한다는 거야. 그래봐야 쓸 데 없는 이야기일 게 뻔하지만.


"이 개새끼가."


아무튼 다시 그 싸움으로 옮겨가서, 드디어 격돌이 시작되려고 했다. 먼저 인내의 한계를 느낀 쪽은 여자 쪽이었다. 여자가 왼팔을 사용해 풀스윙으로 남자의 볼을 노리려고 했다. 남자는 피할 수 없어보였다. 아니, 피할 생각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의 그 주먹이 남자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뭔가에 묶인 듯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표정을 보아하니 남자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만 하세요."


술집의 구석진 곳에서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낮은 여자 목소리였고, 듣기만 해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목소리였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순문학은 많이 써봤으나 이런 류의 소설은 어디다 감평받을 기회도 별로 없기에....

※모음집은 이번 달 가기 전에 올리겠읍니다.... 제발 그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