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딸. 마리아 로젠엘테. ( 출처 PixAI )


라인하르트 엘모어는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다

#집착 #빙의 #하렘



1화



"아버지. 저 아카데미 그만두겠습니다."


엘모어 가(家)의 대식당은 한겨울의 벌판과 같았다. 


천장 높이가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홀. 높다란 기둥 사이사이로는 얼바람이 숭숭 드나든다. 


아무리 을씨년스러운 건물도 사람이 드나들면 냉기를 좀 덜어낼 수 있으련만, 지금 대식당에 있는 사람은 단 둘 뿐. 


그리고 이곳의 체감온도는 방금 내 한마디로 인해 실시간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이 애미나이가 시방 지금 뭐라고 했냐?"


엘모어 가의 가주. 호랑이 공작, 프란츠 경. 황도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벌목꾼이라고도 불리는 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북부 출신이 아니라면 알아듣기도 힘들 만큼 심한 북부 사투리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사투리를 들은 것이 언제였더라, 내 친어머니가 바람나서 도망간게 마지막이니까 거의 팔 년. 


엘모어 가가 북부를 떠나 황도에 자리잡게 된 지도 채 십 년이 다 되어가건만 아버지께선 아직까지도 흥분하면 사투리가 나오는 버릇은 고치시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말인 즉슨, 방금 내 발언으로 인해 아버지가 상당히 빡치셨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흠. 흠..어험."


몇 번의 헛기침 소리가 식당에 울렸다. 꽤 점잖은 톤이었지만 내게는 억지로 화를 삭히려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한심하구나. 라인하르트. 할 얘기가 있다면서 갑작스럽게 집에 돌아와놓고 꺼낸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왜. 아카데미 가고 싶다고 그렇게 징징대놓고 벌써 공부가 질렸느냐? 아니면, 네가 끼고 다니는 그 골빈년들이 같이 도망치자고 하던?"


"둘 다 아닙니다. 아버지."


"하아."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의 겨울은 험난하다. 길고 긴 겨울을, 그저 가장이 음식을 구해오기만을 퀭한 눈으로 기다리는 식구들과 지내는 동안 북부의 사나이들은 자연스레 감정을 터놓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부모에게 어리광 피우기 보다 어리광을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북부 사람들이다.


아버지 또한 그런 북부 남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설명도 않는 아들이 적잖이 답답했는지 눈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네. 아버지."


"지금껏 네 경거망동으로 가문에 끼친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보거라."


"총 6만 5천 레오라 입니다."


"그 중 절반은 로젠엘테 가에 빌려서 아직 다 갚지도 못했지. 그 정도면 작은 영지의 일 년 수익금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나는 묵묵부답했다. 아버지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타는 속을 식히듯 한 병에 사백 레오라나 하는, 로젠엘테 산 최고급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네. 아버지."


"지금껏 너의 아이를 가졌다며 찾아온 여자가 몇 명인지, 기억하느냐?"


"총 네 명입니다. 아버지. 제 맹세컨데 피임은 확실히…"


"닥치거라."


"네."


팍. 대공은 불만 가득한 듯 스테이크를 거칠게 찢었다. 그 모습에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고기를 거칠게 찢어 질겅질겅 씹어먹는 모습이 마치 나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의사 표현처럼 느껴졌다.


"라인하르트."


"네. 아버지."


"이유가 뭐냐."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곧있으면 아카데미에서 한 신입생 - 용사 - 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거기에 휘말려 내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말해봤자 믿어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해서 나는 준비해온 대답을 하기로 했다.


"하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냐."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살아남기 위한 내 계획은 아직 아버지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정신병자의 망상.


내가 아버지께 아카데미는 위험한 곳이며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설명해 보아도, 아버지가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면 그저 철없는 아들의 투정일 뿐이다.


대신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최대한의 독기를 품은 눈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엘모어 가의 대공이 호랑이라면 그 후계자인 나는 호랑이 새끼라 할 수 있다. 무예나 기공에 관해서는 아버지의 발끝만큼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예전부터 위압감을 풍기는 것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망나니라는 소문이 하도 퍼져 분위기를 잡아도 코웃음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지금부터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리란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날카로운 것이 확실히 안광만큼은 야망을 품은 대공가의 자식처럼 보였으니까.


"그래. 네가 뜻을 품었다면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네 뜻대로 하려무나.”


프란츠 대공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자식의 진지한 모습에 감화된 것 같기도, 아니면 차라리 전부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휴우. 다행이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아버지는 한번 입 밖에 낸 건 담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여기까지 왔으면 반쯤 성공한 거라고 봐도 좋았다. 


솔직히 한 대 맞을 각오 정도는 하고 있었는데.


긴장이 풀린 나는 빵을 조금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식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입에 넣은 음식.


마음 같아선 이대로 밥만 먹고 빨리 뜨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아직 아버지께 부탁할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부탁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부탁 중에서는 힘들기로 손에 꼽을 수 있는 종류였다.


나는 천근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입술을 떼었다.


“아버지.”


“오냐.”


"그럼 저 돈 좀 빌려주십시오."


'콰앙!'



내가 게임 캐릭터에 빙의했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떻게 봐도 내가 하던 게임 속 캐릭터, ‘라인하르트 엘모어’ 였으니까. 


모든 일에 실용적인 북부인답게 나는 절망하기보다 현재 처한 상황을 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게임 속 라인하르트 엘모어는 어떤 캐릭터였나. 가문 하나만 믿고 주인공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엑스트라 악당. 주인공의 히로인 포함 만나는 모든 여자에게 집적대는 망나니.


그리고 스토리의 중반, 혁명파 학생들과 귀족파 학생, 마왕군이 한데 모여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 에피소드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아카데미를 뜨자.’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빨랐다. 황도에서 직접 경호병력을 파견하는 아카데미는 왠만해선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만, 주인공이 입학한 순간부터 온갖 위협이 도사리는 마굴이었다.


엘모어 가의 장남이 아카데미 자퇴라니, 아버지를 포함하여 내 입학을 반대했던 주변 사람들의 눈치는 따갑겠지만 내 목숨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계획을 세웠다. 아카데미를 떠나 원작의 지식을 활용해 어디 안전한 곳에서 놀고 먹을 계획을. 


가장 불안했던 일,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에는 어찌어찌 성공했다. 남은 건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을 정리하는 것 뿐.


따라서 나는 4층 강의동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야. 저기 봐. 라인하르트 선배 지나간다.'


'머리에 붕대 감은거 봐. 다쳐서 입원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부담스럽군.’


일 주일 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등교한 나를 반긴 것은 학생들의 지나친 관심이었다.


학교에서 나는 깨나 유명한 축에 속했다. 이제껏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고,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으면 찾아가서 위협한 덕분이었다. 


달리 말해 나는 이 학교에서 유명한 양아치였다.


그탓인지 내가 다쳤다는 소문은 아카데미 전체에 퍼진 것 같았다. 나를 향한 시선은 평소보다 따가웠고,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카데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분위기 정도는 금방 읽을 수가 있었다. 


내가 다쳤다는 소문을 들은 녀석들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속으로 꼴 좋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대놓고 나를 조롱하거나.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은 소녀는 후자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후훗. 당신.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제가 밤길 다닐때는 꼭 헬멧 쓰고 다니라고 경고했었죠?”


“무슨 뜻이냐.”


“숨기실 필요 없답니다. 뻔한데요. 밤길에 습격당한 거지요? 몽둥이 같은 걸로 한 대 세게 맞으셨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속이 시원하답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오히려 그렇게 원한 살 일 하고 다녀 놓고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죠.”


“습격당한 거 아냐.”


“그러면요?”


꿈벅꿈벅. 마리아가 의아해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색과 같은 회백색 속눈썹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빠한테 맞았어.”


“프란츠 경이? 당신… 또 무슨 사고를!”


 상상도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마리아는 잠시 수업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고 마리아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리아가 내게 속삭였다.


“아무튼. 당신. 이번엔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왜 당장 죽어 못사는 사람처럼 일을 벌리고 다니고 그래? 사람들이 망나니라 부른다고 진짜 망나니가 될 셈이야?”


“그럴 생각 없어.”


“그럼 대체 왜 그러는건데!”


“네 알 바 아냐.”


“알 바 아니긴. 나는 당신의 약혼…!”


다시 목소리가 커지려고 했던 탓일까, 마리아는 급하게 입을 막았다. 시뻘개진 얼굴은 마치 내가 죽일 사람인 것 마냥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이 수업 끝나고 나 좀 따라와. 자초지종을 들어야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던 건 의외였지만,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마리아와의 관계는 내가 정리해야 할 것들 중 하나였고 굳이 마리아가 부르지 않아도 내가 먼저 독대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마리아의 개인실로 이동했다.


화려한 방이었다. 고풍스러운 남부 양식의 가구들과 진주, 상아, 사슴뿔 등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품이 눈에 띄었다. 사치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북부인 입장에서는 살짝 거슬리는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아끼던 와인도 로젠엘테 산이었지. 새삼스럽게 나는 내 약혼녀의 가문이 어떤 곳인지를 떠올렸다.


로젠엘테. 황금의 로젠엘테. 제국에 유통되는 황금의 5할이 생산되는 광산을 손에 넣게 된 뒤로 사람들은 로젠엘테 가를 그런 별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재력을 지닌 가문. 현물만 따지면 그 부는 어쩌면 황실마저 넘어설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


다른 두 대가문, 엘모어와 라그로스에 비하면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열두 개의 금광과 세 개의 대상단에서 비롯되는 재력은 그 자체로 권위.


그런 로젠엘테 가의 영애이기에 아카데미에 개인실을 갖는 특례가 허락된다. 


배움 앞에선 모든 학생이 평등하다는 것이 황실이 세운 아카데미의 기치이지만, 더 많은 황금 앞에선 숭고한 가치도 가끔 빛을 잃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마리아 로젠엘테에게는 개인실이 있었다. 학장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한 개인실이. 아카데미가 그녀를 위해 허락한 공간. 그곳에 약혼자를 초대하는 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말만 그렇지 여기 직접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래서, 프란츠 경이 당신에게 화난 이유가 뭔가요? 자세히 설명하세요.”


차도 내놓지 않은 채 마리아가 책상을 탕 치며 말했다. 손님을 대하는 것 치고는 무례한 태도였지만 나는 평소에도 마리아에게 무례한 사람이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예전부터 마리아와 나는 이런 관계였다. 전생의 지식을 가지고 말하면, 아빠 친구 딸 정도의 관계라고 해도 좋았다. 


만나면 얼핏 사이좋은 듯 얘기하지만 서로를 먼저 찾는 일은 없다. 티격태격하다가도 서로가 그어놓은 선은 결단코 넘지 않는, 삭막한 사이.


약혼 관계라지만 달리 말하면 그 뿐인 관계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멋대로 정한 약속이다. 내 기준에선 그런 약속은 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일 터. 그녀의 가문 어른들은 우리 약혼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그쪽 늙은이들 사정은 내 알 바 아니지.


따라서 나는 약혼녀를 대하듯 가볍게 말했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화내셨고, 내게 기공을 담은 술잔을 던지셨다.”


사실만을 전하는 지극히 북부인다운 화법. 그러나 북부인이 아닌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대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런 북부식 화법에 질릴 대로 질린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증거로 벌써부터 눈살을 오만상 찌푸리고 있었으니.


“당신. 매번 느끼는 거지만 문장력이 그것밖에 안돼요? 조각상이나 통나무를 앉혀 놔도 당신보단 잘 말할거야.”


“이 이상 뭘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


“참, 북부인들이란! 여러 가지 있잖아요. 당신이 대체 어떻게 말했길래 프란츠 경이 그렇게 화나셨는지. 아니면 당신이 아카데미를 떠나려는 이유 같은 것 말이에요!”


나는 침묵했다. 아카데미를 떠나는 이유라… 용사의 존재나 원작의 지식을 빼놓고 설명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받았을 때 일반적인 북부식 해결법은 침묵이다. 그 전통에 따라 나는 침묵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내 침묵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마리아는 내가 입을 꾹 닫고 있자 고개를 조금씩 아래로 떨구기 시작했다.


“당신. 진심이군요.”


“그럼 진심이 아닐까. 이미 예전에 결정한 일이다.”


아카데미를 떠나려는 내 마음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데 당연히 빨리 떠나고 싶지.


“왜 그만두겠다는 건데. 당신이 아카데미 다니고 싶다고 했었잖아. 여자 마음대로 만나고. 당신 비슷한 날라리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즐거웠던 거 아니었어? 그게 당신이 원하던 삶 아니었냐고.”


“그건 그렇지.”


마리아는 그동안 내게 쌓인 불만을 토로하듯 말했고, 나는 거기에 짧게 동의했다. 


맞는 말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망나니였고, 망나니처럼 사는 것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원작의 지식을 얻지 못했더라면 한 일 년 정도는 더 그렇게 살았을 거다.


“하다못해 이유라도 가르쳐주세요. 어차피 당신이니까 별 볼일 없는 이유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들어야겠어. 여자 때문인가요? 아니면, 혹시 실수로 누구 죽였어?”


“둘 다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다. 하지만 너한테 알려줄 필요는 없군.”


아까 전부터 대답을 피하고 있었지만 둘러대기 위함은 아니었다. 


원작의 지식과 관련된 것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 없었다. 그러나 특히, 마리아에게는 절대로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마리아가 원작의 서브히로인이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 마리아는 처음에는 주인공과 적대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점차 주인공의 정의로운 면에 감화되고, 결국엔 주인공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귀족파의 대표인 그녀가 주인공 편으로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약혼자인 라인하르트의 죽음. 


그 말인즉 슨, 내가 살아있는 한 원작의 스토리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엑스트라인 라인하르트가 죽고 살고는 게임 스토리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메인 캐릭터인 마리아가 주인공 편이 되지 않는다면 게임의 스토리는 내가 알던 것과 다르게 흘러갈 것이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원작의 스토리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했다. 원작의 전개를 알고 있는 내가 아카데미에 남는다면 그 자체로 스토리가 어그러지는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떠올린 방법은 아카데미에서 나와 관련된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놓는 것.


내 계획은, 이 아카데미에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저는 당신의 약혼녀에요.”


잠시, 마리아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마리아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을까. 알 수 있는 사실은 마리아의 눈이 불안한듯 떨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나를 망나니 취급하는 와중에도 마리아는 꿋꿋이 자신이 내 약혼녀임을 주장했었다.


잠시 마리아의 눈을 쳐다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인정한다. 나는 마리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부분은 마리아가 로젠엘테이기 때문이었다.


망나니 라인하르트 입장에서 로젠엘테의 영애는 독이 든 사과이다. 언제든 손에서 꺼내 먹을 수 있지만 그랬다간 로젠엘테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량 짓이 하고 싶은 라인하르트 입장에서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원작의 배경지식을 아는 지금의 내 입장에서 마리아는, 로젠엘테가 엘모어를 위해 공들여 준비한, 고급 상품처럼 느껴졌다.


귀족가는 명예를 추구한다. 명예는 황금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역사와 정당성에서 비롯된다. 


엘모어와 달리 로젠엘테는 둘 다 지니지 못했고, 그 둘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차하면 그들의 딸을 다른 가문에 팔아 넘겨서라도. 


정략혼. 황금의 딸, 마리아는 로젠엘테가 나와 엘모어 가를 위해 준비한 상품이었다.


‘원작의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뒷사정도 모르고 계속 마리아를 싫어했겠지.’


사실 원작의 내막을 아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마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아는 자기가 약혼녀라는 이유를 대며 시시건건 내 사생활에 간섭하곤 했다. 자기가 가문의 꼭두각시라는 것도 모르고 떽떽대는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망나니 라인하르트는 당연히 그런 마리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껏 마리아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며 그저 아는 사람 정도로만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속으로 연민 정도는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는 나보다 다섯 살 밑. ‘철없다’ 라는 말이 나보다 훨씬 어울리는 나이다.


그 나이대 소녀답게 사랑이나 연애를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을텐데, 유일한 약혼자가 무시한다면 끔찍한 기분일 것이다.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참지 않는 양아치 라인하르트가 그동안 마리아에게만은 관대했던 것도 어쩌면 미안함 때문이었을지도.


아무튼 마리아는 내가 아카데미에서 정리해야 할 첫번째 인간관계였고, 필요한 일을 하는데 사소한 감정은 묻어둘 수 있는 것이 엘모어 가의 남자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품에서 준비해온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그랬지. 이젠 아니야.”


“네?”


나는 마리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엘모어의 인장이 찍힌 하얀색 수표에는 만 오천 레오라. 


아버지께 빌린 3만 레오라의 절반, 내가 예전에 마리아에게 개인적으로 빌렸던 것과 같은 금액이 찍혀 있었다.


수표를 받은 마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듯 나와 수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와의 약혼을 파하겠다. 이건 가문과 관계 없는 오로지 내 결정이다. 그 전에, 내가 네게 빌렸었던 돈을 전부 갚겠다.”


내가 담담하게 말하는 동안 마리아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눈치를 보는 것인지 수표를 든 손을 움찔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아무리 원치 않았던 약혼이라지만, 내 입에서 먼저 파혼 얘기가 나온 게 충격이었던 걸까?


“이제 우린 약혼 관계도 아니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더 이상 억지로 내 약혼녀 행세할 필요는 없다. 네 갈 길을 가라. 마리아 로젠엘테.”


‘네 갈 길은 원작의 주인공 곁이지.’


어떻게 생각해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걸로 나는 원작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진 셈이었으니 죽음에서 벗어났고, 이제껏 망나니의 약혼자 행세를 하느라 속 썩이던 마리아도 이제는 제 갈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쪽에서 멋대로 파혼했다고 하면 로젠엘테의 늙은 너구리들도 마리아를 뭐라고 하지 못할 터.


“앞으로 내가 너를 찾는 일는 없을 것이다.”


내 할 말을 전부 마친 나는 조금 급하다시피 방을 빠져나왔다. ‘기다려…!’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마리아에게 내 의지가 굳음을 알리고 깔끔하게 헤어지기 위해서였다.


서로간에 아쉬움이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은 다소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걸 정리하는 것도 마리아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저 나이대 애들은 이런 일도 겪어 봐야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법이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탓인지, 나는 요즘 들어 생각이 점점 꼰대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수업이 끝난 아카데미의 저녁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렌지색 햇빛이 창틀을 타고 들어와 카펫에 빗살무늬를 새겼다.


나는 첫 목표를 성공적으로 끝낸 것에 내심 흡족해하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아직 아카데미에서 할 일이 몇 가지 더 남아있었다.





마리아 로젠엘테는 혼란스러웠다. 슬픔?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슬픔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지만 한편으로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예전부터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녀가 당한 것은 실연…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 너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건가?


언젠가 마리아가 라인하르트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논지는 이러했다. 


어차피 서로 가문에 묶인 사이인데 아카데미에서까지 약혼자 행세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졸업 전까지는 약혼 신경쓰지 않고 하고싶은 대로 할 테니 너도 하고싶은 대로 해라.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마리아가 이성의 끈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꽤나 오래 라인하르트를 알고 지내며 그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했던 덕분이었다. 


라인하르트 엘모어는, 그녀의 약혼자는, 자기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또 그놈의 합리. 마리아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당장 반박하지 못했던 것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혼자로서의 도리 등을 내세워봤자 통하지 않으리란 건 뻔했다. 


그렇다면, 감정을 내세우며 그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러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가문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려놓고 한판 크게 싸웠더라면 좋았을 것을.



 - 네 갈 길을 가라. 마리아 로젠엘테. 앞으로 내가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흥! 정말…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 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가끔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저런 성격으로 여자는 어떻게 그렇게 잘 꼬시나 몰라!”


애초에 그녀는 로젠엘테의 영애였다. 엘모어에 전혀 꿀릴 것이 없는 대가문의 후계. 그런 집안의 외동딸이 뭐가 아쉬워서 자기 싫다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 


차라리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고 걷어차버린 그 바보 날라리가 아쉬워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약혼녀가 있는데 그냥 방치해 두고, 별 볼일 없는 여자들과 놀아나는 머저리.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마리아는 한 가지를 깨닫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방금까지 하던 짓은 그저 현실부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말로 그녀가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라인하르트의 말대로 했을 터였다. 


그의 말대로 약혼 따윈 신경쓰지 않은 채 아카데미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졸업 후엔 그 추억들을 고이 가슴에 묻어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엘모어 가로 시집갈 것이고 엘모어 가의 안주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해관계 만으로 연결된 부부생활. 정략혼으로 맺어진,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부부 생활을.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매달리고, 상처받고. 그녀에게만 일방적으로 손해인 약혼 관계를 형식적으로나마 지키려 노력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마리아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이제 저는 그의 약혼녀가 아니었지요.’


지금의 마리아는 라인하르트의 약혼녀가 아니었다. 그를 유일하게 묶어둘 수 있었던 빚도 오늘 전부 돌려받았다.


객관적으로 지금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다른 여자들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못했다. 


그 돼지년들은 적어도 침대 위에서라도 라인하르트에게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었으니까.

 

라인하르트 엘모어에게 마리아 로젠엘테는, 아카데미에 널린 창녀들 보다도 못한 인간이었던 걸까.


‘그런가. 그랬을지도.’


그제서야 마리아는 지금껏 그녀를 괴롭혔던,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감정들 중 하나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비참함.


밤은 아직 길었고 그녀가 아직 이름붙이지 못한 감정은 그밖에도 수없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라인하르트 엘모어의 약혼녀가 아니게 된 그녀가,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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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기는 3일 전에 다 썼는데 마지막 심리 묘사가 마음에 안들어서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고친게 더 별로인것같기도 하네요. 


* 모바일로 보니까 너무 벽돌이라 살짝 수정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