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를 처음으로 만났었던 때는 4년전. 그녀가 중학교 3학년에 막 올라왔을 무렵이었다.


그 때의 나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4년 전 기준으로 초등학생 4학년이었던 목숨보다 소중한 여동생도 있었다.


가장으로써 책임감이 막중했던 나에게는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 4년전, 그러니까 20살의 나는 서울대에 합격한 상태라 수많은 학부모들이 과외 선생님으로 나를 원하던 상태였다.


나름 공부는 자신이 있었기에 수많은 과외 신청에서도 최대한 페이가 쎈 것을 둘러보던 때, 눈을 의심케 하는 제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 3학년 짜리 여학생을 고3 수능 보기 전까지 과외를 시켜 서울대 법대에 입학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당연히 지나치려 했다.


솔직히 서울대 법대가 무슨 지방대 법대도 아니고, 그마저도 될까말깐데 서울대 법대? 어림 없는 소리지. 라며 넘기려 했지만... 그 문장 뒤에 써져 있는 그에 대한 보수. 월 500이라는 글자를 보곤 곧바로 과외 요청을 받아들였다.


500만원. 자그마치 월에 500만원이라는 것이다. 웬만한 대기업 직원의 월급.


그렇게 홀린 듯이 과외를 받아들이고 과외를 하러 만나기로한 첫날. 나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와... 집에 얼마나 돈이 많은거지..."


사실 과외 치고 어마무시한 월급과 주소를 받았을 때부터 이럴 거라곤 예상은 했다. 주소를 받았을 때 그곳에 테헤란로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집의 크기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가정부에게 저택을 안내 받는다.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급스러운 가옥에 들어선다.


내 또래라고 해도 될 정도의 젊으신 과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 간단한 상담을 진행 했고, 나는 곧바로 과외 학생이 있는 2층 맨 끝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 간단하게 노크를 한 뒤 천천히 문을 연 나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주희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 * *



나와 주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와 주희는 굉장히 죽이 잘 맞는 타입이었고, 주희는 아직 고등학교 입학도 안 했음에도 고등학교 2학년 문제를 손쉽게 풀어낼 정도로 똘똘한 아이였다.


칭찬을 아낄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문제를 풀게 한 뒤, 채점을 하던 도중이었다.


"주희야? 이런 간단한 걸 틀리면 어떡하니..."


주희가 틀린 것은 이 문제집에서 가장 쉬운 문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저 주는 문제였다.


"앗... 실수로 마킹 잘 못 했나봐요... 죄송해요 오빠."


"후... 다음에는 그러면 안 된다? 문제를 다 풀었으면 꼼꼼히 검토를 해야지."


라고 간단한 훈계를 한 뒤 주희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앗...!!"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주희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주희와 나의 눈높이는 주희가 아직 한참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주희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2학년 겨울 방학 때의 이야기다.


주희는 고3으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와 놀고 싶다고 했다.


주희는 현재 내 식견으로 봐도 서울대는 우습게 갈 정도의 성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이라도 줄 겸 주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신나게 주희와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저녁이 되고 나는 주희를 그녀의 집 앞에 바래다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오빠."


"으...으응?"


2년 사이에 키가 확 커버려 어느새 170을 넘긴 주희는 174였던 내 얼굴을 거의 동등한 시선으로, 마주 보며 말했다.


주희의 표정에는 결심이 느껴졌다. 주희의 안광은 미세하게 떨려 긴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은 만우절도 아니다.


"저... 진짜 오빠 많이 좋아해요.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저랑 사귀어주세요."


당황스럽다. 주희의 고백을 들은지 3초도 안 되서 나는 어느새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 해야할지 몰라 괜스레 손만 꼼지락 거렸다.


사실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으면서도. 주희가 상처를 받을까봐 나는 뜸을 들였던 것이다.


"그...그럼 이제 답해주세요 오빠."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해야 했다.


"고마워... 고백해줘서."


순간적으로 주희의 동공이 확장 되고,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귀어 달라는 건 조금 무리일 것 같아. 미안해..."


그리고 밝아졌던 주희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버린다.


"제...제가 잘 못 들은...거죠...? 다...다시 한 번 말해..."


이미 내가 한 말을 이해 했지만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주희는 애써 내 대답을 외면하며 다른 답을 요구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희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미안. 이만 가볼게."


나는 그대로 굳어 있는 주희를 내버려두고 주희의 집이 있던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여나 주희가 나를 뒤따라 올까 귀를 기울였지만 또각 거리는 발소리는 나 하나 뿐이었다.


주희가 나를 쫓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서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주희를 애써 무시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과외 선생으로 일임 받은 바, 아무리 관계가 서먹해졌어도 그 의무를 다 해야한다.


다행히 주희는 어색하지 않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내 실수를 지적했다.


"오빠! 오늘은 국어 하는 날이잖아요."


"어... 아? 그렇지... 미안."


나는 주희의 반응을 애써 살피며 조심조심 행동 했다.


하지만 여전히 평소의 주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개월이 지나, 수능이 끝나고 주희는 졸업을 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젠 서울대 개강을 기다리는 주희를 환영하러 그녀의 학교 정문으로 찾아갔다.


"오빠. 잠깐 따라와 봐요."


교문을 나선 주희는 내가 축하 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내 손목을 붙잡곤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주희야...?"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주희는 내 손목을 놓곤 어느새 나와 같아져버린 키로 나를 동등한 시선으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빠. 1년이면 생각을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응...?"


주희의 목소리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또 다시 듣게 된 주희의 고백.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떨림은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결단 했다는 결심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할 말은 몇 개월 전과 똑같았다.


"...미안.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그리고 수 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그럼 이..."


내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주희가 내 말을 끊곤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릴게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오빠. 안 그럼 후회 하실거에요."


이 때까지의 나만 해도 나는 그녀가 단순히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를 원망 할 거라는 말로만 들렸다. 그녀의 경고가, 단순히 갓 성인이 된 치기어린 원망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의 경고가 단순히 원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은 개학을 하고 난 뒤였다.


캠퍼스를 돌아다니자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들. 그 시선들은 모두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나는 단순히 그것을 착각으로 치부했다. 그 때부터였다. 내 인생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네?! 해고라뇨?!! 점장님 그게 무슨...!"


"아 글쎄 미안하다니까... 편의점 매출도 떨어지는데...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알바 여러명 유지하는게 쉽지 않은거... 너도 알잖아~"


약속했던 과외가 끝나고 그 뒤로 나는 알바로 등록금과 여동생의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하고 있던 모든 알바 자리에서 해고 통지가 날아왔다.


"노...노동청에 신고 할 거에요!"


"아이 미안하다니까... 이렇게 퇴직금도 챙겨 주잖아."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나는 허탈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를 불법으로 해고한 편의점, 카페 등등 내 모든 일자리를 노동청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2주가 지나도 가게들은 멀쩡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한 순간에 모든 알바에서 잘리고. 대학교에선 대놓고 무시와 왕따를 당하는 상황.


그렇게 점점 무너져 가는 내게 유일한 희망은 내 여동생이었다.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자 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여동생은 내 눈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어 오빠...? 나도 같이 알바 할까?"


그 한 순간에 눈물이 울컥했다.


미안했다. 엄마 아빠도 없이 한창 사랑 받을 나이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여동생이다.


항상 생활고에 쪼들려 요즘 애들은 다 가지고 다닌다는 최신형 핸드폰 같은 것 하나 사주지 못했다.


여동생의 옷장 안에는 교복을 제외한 생활복 세네벌이 끝.


하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동생은 고맙게도 전혀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성장 해주었고, 어느새 나를 걱정하며 내 부담을 덜어주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써 여동생을 안심 시키려 나는 말을 쥐어짜내며 말했다.


"아냐... 오빠 괜찮아. 그러니 마저 공부해..."


"응..."


그렇게 여동생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신발장에 걸터 앉은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주희가 한 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내게 충고 했다는 것을.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주희의 연락처를 찾았다.


딱히 주희를 차단하지 않았음에도 주희는 오랫동안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분명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을 기다렸던거겠지.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주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희야... 혹시 내일 잠깐 만날 수 있을까?"


그러자 주희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말했다.


"...내일 오후 1시. 저희 집으로 와요."


"아...알았..."


그렇게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들리는 통화 종료음. 나는 망연자실하며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이 되고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주희는 내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원격으로 문을 열어 나를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라고 시켰다.


주희와는 오랜만의 대면이었다.


고백을 2번이나 거절한 이상 주희와 평상시처럼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고 내가 주희를 피해다녔다.


"오랜만이네요 오빠."


이제는 차가워진 표정으로 묵묵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주희의 앞에서 양주먹을 꽉 쥐며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으며 말했다.


"이...이제 그만 용서 해주면 안 될까... 내가 잘 못 했으니까..."


그러자 주희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네? 뭐를요?"


아직 진심이 모자라다는 뜻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주희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부탁했다.


"제발... 부탁해... 나...나는 괜찮은데 여동생이 피해 보고 있어... 제발..."


그러자 주희는 다리를 꼬며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흐응... 간절함이 부족하신 것 같은데...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해보실래요? 혹시 모르잖아요. 제게 용서 받을지."


주희의 말이 끝나고. 내 무릎은 어느새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양손과 이마를 바닥에 깊게 박는다.


"제발..."


나는 주희의 언질이 있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1분정도 지났을까, 주희가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요 오빠."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만을 들어올렸다. 엎드린 상태에서 올려다본 주희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는, 어쩌면 섬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희는 약간 자세를 숙여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내 턱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오빠?"


나는 마지못해 말했다.


"으응..."


주희는 잔혹한 눈웃음을 지었다.


나와 주희의 눈높이는—. 그렇게 어느새 그녀가 나를 한 없이 내려다 보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