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요. 이런 지겨운 생활이 계속된 게요.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요. 유치원에서 방울토마토 키우기 세트를 준 적이 있어요.

 

 

식물을 키워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키우다가 죽여 버리는 건 아닌가. 정말 많은 걱정을 하며 배양토에다가 씨앗을 심었어요.

 

 

다행히 씨앗에서 싹이 피어나며 손톱 크기만 하던 방울토마토는 생명을 키워갔고, 점차 떡잎들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재미있었어요. 매일 아침마다 줄자로 오늘은 방울토마토가 얼마나 자랐는지 길이를 매일 측정했었고, 매일 매일 관찰일지에다가 방울토마토의 성장 일기를 썻었어요. 이 관찰일지는 내 소중한 보물이고, 아직도 내 책장에 보관 중이에요.

 

 

그러다 점점 줄기가 길어지더니, 방울토마토가 힘을 잃고 줄기가 땅으로 쓰러지려고 하더라고요? 나는 울면서 원인이 뭔지 찾느라 종일 인터넷을 뒤져 보았어요.

 

 

찾아보니 해결 방법은 간단했고, 나무젓가락으로 지지대를 만들어주니까 방울토마토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어요.

 

 

마침내 방울토마토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을 때는 나는 정말로 기뻤어요. 마치 내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낸 기분이었지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내가 식물을 좋아 된 게.

 

 

줄기에 매달려 있는 소중하고 아까운 방울토마토 하나를 조심스럽게 따서, 나는 방울토마토의 첫 시식의 영광을 어머니께 드리려고 했지만, 내가 어머니께 토마토를 드리자 어머니의 반응은 정말 냉담했어요.

 

 

“ 집에서 직접 키운 채소는 맛없어. 엄마가 방울토마토 사다 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는 버리고 엄마가 사 온 거 먹자? ”

 

 

“ 근데 오늘 유치원에서는 뭐 배웠니? ”

 

 

내 손으로 처음 키워낸 식물은 아무도 먹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버렸어요.

 

 

그 후 시간이 흘러 내가 초등학생일 때.

 

 

저는 아버지 생일 선물로 줄라고 자그마한 베고니아를 키웠어요.

 

 

아버지께 줄 선물이라서 직접 씨앗을 발아시키고 화분도 내 기준으로는 정말 예쁜 것을 준비했었지요. 아마 그 화분을 사느라 2달 용돈을 다 썻었던 걸로 기억해요.

 

 

파종 후 꽃이 피어나는 데 6개월쯤 걸렸으니까 반년에 걸친 정말 정성 들인 선물이었어요. 

 

 

아버지의 생일날 베고니아는 딱 예쁘게 피어 있었고. 나는 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매우 좋아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베고니아 선물을 드렸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도 냉담했지요.

 

 

“ 음... 꽃을 준비했구나? 예쁜걸? ”

 

 

“ 베고니아는 1년 내내 꽃을 피우는 식물이에요! 항상 예쁜 모습을 유지할 거예요! ”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아빠는 별로 좋아하시는 반응이 아니었어요.

 

 

“ 그래... 그렇구나... 근데 너 오늘 기말고사 성적 나오는 날 아니니? ”

 

 

“ 아. 네. 성적표 드릴게요. ”

 

 

“ 이야! 이번에도 전교 1등이야? 역시 우리 딸이라니까! 나는 이런 선물은 필요 없고, 우리 딸이 1등 하는 게 더 큰 선물이야! 하하! ”

 

 

그래요. 아버지는 제가 정성껏 키운 꽃보다는 제가 1등을 해오는 게 더 좋으셨죠.

 

 

제가 아버지께 드린 베고니아는 아버지가 회사 사무실에 잘 둘 거라고 했지만, 몇 달 뒤 아버지 사무실에 가보니까 제 베고니아는 사무실 구석에서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어요.

 

 

저는 그때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제 자식이 죽은 거 같은 심정이었지요.

 

 

저는 식물 키우는 게 좋았지만, 부모님은 제가 식물 키우는 모습보다는 공부하는 모습을 더 좋아했어요.

 

 

결국 저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계속 공부를 했답니다.

 

 

솔직히 열심히는 한 건 아니지만, 맨날 공부만 해서 그런가,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손가락에 든다는 명문대에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어요.

 

 

“ 역시 내 딸이야! 내가 졸업한 명문대에 들어가고! 내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구나! 이러면 내 회사도 내 딸에게 물려줄 수 있겠는걸? ”

 

 

대학교 합격 소식을 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는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서 본 아버지의 모습 중에서 제일 기뻐하셨어요.

 

 

“ 안녕하세요! XX 학번 김얀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 이야. 너가 걔지? 수석 입학. 이 정도 성적이면 의대에 가지 왜 여기로 온 거야? ”

 

 

“ 아버지가 여기로 가라고 해서요. ”

 

 

“ 어... 그렇구나... 자 다음! ”

 

 

“ 안녕하세요! XX학번 이얀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 너는 우리 학교 어떻게 들어왔냐? 수시? 정시? 논술? ”

 

 

“ 저어... 그... 부끄럽지만 농어촌 전형으로... ”

 

 

“ 뭐어? 이거 완전 날로 먹었네! ”

 

 

“ 그렇지만 제가 저희 군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습니다! ”

 

 

“ 야 이놈아! 시골구석에서 잘해 봤자지! 자 다음! ”

 

 

신입생 환영회는 솔직히 별 볼 일 없는 애들만 있었어요. 특히 얀붕이라는 얘는 도시에서 살았으면 여기 학교로 못 들어왔을 거 같은데, 시골에 산다는 것만으로 특혜를 받은 낙하산 같은 놈이죠. 

 

 

저는 한평생 공부만 해서 여기로 들어온 건데. 그럼 지금까지의 제 일생이 뭐가 되나요? 

 

 

아무튼 저는 공부만 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냈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늘 항상 학과 수석을 먹는 게 목표였어요. 목표였는데....

 

 

“ 야호! 이번에도 1등이다! 다음 학기도 전액 장학생! ”

 

 

얀붕이는 계속 제 앞길을 막았어요. 맨날 1등 자리를 뺏기고 저는 차석을 하였지요.

 

 

저는 더 열심히 해봤지만, 도저히 그를 이길 수가 없었어요. 참다 못해서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지 직접 가서 물어봤었어요.

 

 

“ 맨날 1등만 하던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

 

 

“ 어? 어... 안녕? 너 우리 학과 맞지? 무슨 일이야? ”

 

 

“ 아니 왜 맨날 1등 자리를 노리냐고. ”

 

 

“ 그야 1등 하면 전액 장학금이니까? ”

 

 

“ 고작 그거 때문에? ”

 

 

“ 응. 돈 아끼면 좋잖아? ”

 

 

저로써는 정말 기가 찼어요.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돈 때문에 수석 자리를 노리는 거라니.

 

 

“ 야 근데 너 얀챈그룹 회장 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야? 애들 사이에서 소문 다났어! ”

 

 

저는 더 이상 들어줄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이만 자리를 떠났답니다.

 

 

“ 야! 야! 어디가! 알려주고 가! ”

 

 

다행히 다음 학년부터는 얀붕이가 군대에 가버려서 제가 학과 수석을 먹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저는 바로 부모님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얀챈그룹 공개채용에 합격하고 부모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제 노력만으로 회사에 들어온 건데, 주위 사람들은 저를 안 좋게 봐주었죠.

 

 

“ 쟤가 개지? 회장 딸? ”

 

 

“ 어 맞아. 여기로 들어올 수 있던 것도 회장이 꽂아 넣어서 그런 거겠지? ”

 

 

“ 당연하지! 설마 아무 도움도 안 받았겠어? ”

 

 

저는 너무 억울했어요. 아무도 제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밤도 새워가며 일했어요.

 

 

“ 그래도 회장님 딸이라 그런가? 일 하나는 잘하네. ”

 

 

“ 회장 딸이잖아! 나도 저렇게 대놓고 밀어주면 다 잘했지! ”

 

 

저는 정말로 열심히 일해서 실적이나 성과를 잔뜩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그마저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힘든 회사생활을 한 지 2년쯤 지났을 무렵에.

 

 

“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이얀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이런 세상에. 대학 시절 항상 제 앞길을 막던 얀붕이가 등장해버렸어요. 대체 왜? 어떻게? 

 

 

“ 자네 부모님은 무슨 일 하나? ”

 

 

“ 네! XX읍 XX리에서 고구마 농사하십니다! ”

 

 

“ 아니 그게 뭔가. 농사일 하신다고? ”

 

 

“ 예 그렇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농사지은 고구마는 최고입니다! ”

 

 

“ 자네. 우리 회사는 왜 들어왔나? ”

 

 

“ 돈 많이 주지 않습니까! 저는 돈이 좋습니다! ”

 

 

“ 히야! 자네 같이 솔직한 사람은 처음이야! 자넨 솔직해서 좋네! 자네 등산은 좀 하나? ”

 

 

“ 예! 제가 어릴 때부터 산으로 나물 캐러 다녔습니다! ”

 

 

“ 이야!!! 우리 부서에 에이스가 들어왔어! 에이스가!!! ”

 

 

얀붕이는 회사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위기감을 느낀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 찬스를 썻어요.

 

 

얀붕이를 충남에 있는 지부로 보내버렸죠.

 

 

혹시 모를 경쟁자는 제거하는 게 맞는 거니까요!

 

 

그렇게 경쟁자를 보내버리고 다시 평화로운 회사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다시 시간이 흘러. 열심히 일만 했던 저는 어느새 최연소로 부장 자리에 올라갔어요.

 

 

이제 더 이상 제 능력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지만 역시나 제가 부장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거는 제 아버지 덕분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존재했어요.

 

 

“ 우리 같은 일반 사원들이 열심히 해봤자 뭐하나. 어차피 임원진 자식들이 높은 자리는 다 차지할 텐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열심히 봤자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거나 다름없지. ”

 

 

저는 이제 그러려니 싶었죠. 어차피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평생 그렇게 생각할 거거든요. 이제는 신경 쓰지 말기로 했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에 진행했던 회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오전 일과를 마치려고 하는데, 낯선 사람이 우리 부서를 찾아오더라고요? 

 

 

“ 안녕하세요! 이번에 옆 부서로 발령받은 이얀붕 부장입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

 

 

얀붕... 얀붕... 이얀붕? 제가 옛날에 충청도 오지로 보내버린 얀붕이가 돌아왔어요.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 다들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어? 이야! 너 얀순이 아니냐? 아직 여기서 일하는구나? ”

 

 

“ 끼야야야야야악! ”

 

 

얀붕이가 저에게 아는 척을 하자 저는 탕비실로 도망갔어요. 그러고는 전화기를 꺼내서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어요.

 

 

“ 아니 아빠! 내가 몇 년 전에 부탁한 이얀붕 알지? 걔가 지금 우리 회사 본사로 돌아와서 옆 부서 부장 자리에 앉아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 얀붕이 그놈 그거 물건이더라. 그놈이 충남 지부에서 전설을 썻어. 정부를 상대로 하는 국가사업도 몇십개는 따내고, 무슨 수를 썻는지는 몰라도 충남 공장 생산율이 6배로 올라갔더라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한 일이 많은데. 낙수효과 때문인지 지역 사회에서는 충남를 살린 위인이라면서 티비에도 맨날 나오고 그런다더라. 충남에서 이얀붕은 거의 대통령이야. 총선 출마하면 당선될걸? ”

 

 

“ 그래도 내가 본사에는 못 들어오게 하랬잖아! ”

 

 

“ 임원진들 전원 모두가 차기 부장 후보로 이얀붕을 추천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막아! 근데 너는 여태까지 뭐한 거야! 이러다가 회장 자리를 내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한테 뺏기겠어! 좀 더 실적을 낼 수는 없니? ”

 

 

“ 아 또 일 이야기야. 끊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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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는 새로 부장 자리에 앉자마자 엄청난 실적들을 내기 시작했어요.

 

 

근데요. 저로서는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위기감이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편안해진 느낌이었어요.

 

 

번아웃이 온 걸까요? 요즘은 회사에 출근하기도 싫은데. 아침마다 회사 건물 앞 가로수에 핀 목련 꽃을 보는 게, 출근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였어요.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는데. 얀붕이가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근데 요즘은 제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회장 자리에 올라간다면 제가 얻는 게 뭐죠? 거기에 오르면 제가 행복해질 수 있나요? 

 

 

제가 여기 회사에 들어온 것도 아버지가 원해서 들어온 거지, 제가 정녕 원해서 했던 일은 아니지 않나요? 제 평생 제가 원해서 했던 일이 있나요? 다 부모님께 잘 보이려고 했던 일들이 아닌가요?

 

 

아버지께서는 이번 이사 승진 평가 때문에 더 민감해지신 거 같은데, 그냥 그 자리를 얀붕이한테 넘기면 저는 더 편해지지 않을까요? 저는 승진을 해도 더 이상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제가 이런 의미 없는 경쟁하는 의미가 있을까요?

 

 

복잡해진 마음을 식히려고 오랜만에 점심시간에 회사 밖을 산책했는데, 외진 골목에 꽃집 하나가 있더라고요. 꽃은 오랜만이라 한번 들어가 봤는데, 마침 베고니아를 팔고 있더라고요.

 

 

저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꽃이 활짝 핀 베고니아 하나를 구매해서 제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놨어요. 향기롭고. 생기 있고. 삭막한 사무실 분위기를 환기해주는 거 같았죠.

 

 

그래요. 과거 회상을 하면서 생각 해봤는데. 어렸을 때 저는 꽃을 키우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이 지겨운 회사를 때려치우고 꽃집이나 차리고 싶네요.

 

 

책상 위에 베고니아를 바라 보면서 오랜만에 즐겁게 퇴근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해보니까 제 책상 위에 있던 베고니아가 시들해져 있더라고요?

 

 

물을 안 줘서 그런가. 베고니아에게 물을 줄라고 탕비실로 가서 컵에다가 물을 담고 있었어요.

 

 

제가 컵에 물을 받는 그때 반갑지 않은 사람이 탕비실로 들어오더라고요?

 

 

“ 커피 마시게? ”

 

 

얀붕이였어요. 

 

 

“ 아니. 꽃에다가 물 좀 줄라고. ”

 

 

“ 꽃 키워? 무슨 꽃인데? ”

 

 

“ 베고니아. 물을 안 줘서 그런가 좀 시들어졌네. ”

 

 

“ 베고니아한테 물을 많이 주면 안 될 텐데? 내가 한번 봐도 될까? ”

 

 

그러고는 얀붕이는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우리 부서로 들어오고서는, 제 자리에 있던 베고니아를 보며 말했어요.

 

 

“ 이거 햇빛을 안 받아서 그래. 사무실에 햇빛이 너무 안 드네. 이거 옥상으로 옮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

 

 

얀붕이는 제 의견은 듣지도 않고 바로 제 베고니아를 옥상으로 옮겨 버렸어요. 그때 저는 살짝 화가 났어요.

 

 

“ 아니 너 꽃에 대해서 잘 알아? 너 뭐 돼? ”

 

 

“ 내가 20년이 넘게 꽃만 키웠는데 이 정도로 모를까봐? 베고니아는 햇빛을 잔뜩 받고 자라야 해. 그래야 꽃도 이쁘게 피어나. ”

 

 

20년 동안 꽃을 키웠다는 말에 저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어요. 그래도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오니 바람도 맞고 시원하니 좋긴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평소에 궁금했었던 궁금증 한 가지를 물어볼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고 얀붕이한테 한가지 질문을 던졌어요.

 

 

“ 근데 너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야? ”

 

 

“ 그야 열심히 일하면 승진하고, 승진을 하면 돈을 더 많이 주니까? ”

 

 

“ 정말로 다 돈 때문이야?. 그렇게 돈 모아서 뭐 하려고?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 ”

 

 

“ 사실 한가지 계획이 있긴 해. 스마트팜이라고 알아? ”

 

 

“ 스마트팜? 농장 말하는 거야? ”

 

 

“ 뭐... 농장이 맞긴 하는데. 사실 나는 나만의 농장을 가지는 게 꿈이거든. 근데 그게 돈이 좀 많이 들더라고. 그래서 젊을 때 돈을 잔뜩 모은 다음에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면 은퇴하고 농장이나 하려고. ”

 

 

그 말을 들은 저는 오랜만에 신선한 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제 속마음이 나와버리고 말았어요. 

 

 

“ 나도 회사 때려치우고 꽃이나 키우고 싶다... 아! 아니. 이건 그게 아니라. ”

 

 

“ 너도 꽃 키우는 거 좋아해? 의외인데? ”

 

 

“ 뭐... 좋아하긴 하지. ”

 

 

“ 그러면 저기 우돌시에 있는 우돌 식물원 가봤어? ”

 

 

“ 우돌 식물원? 아니 안 가봤는데. ”

 

 

“ 꽃 좋아한다면서 우돌 식물원도 안 가봤단 말이야? 실망인걸? ”

 

 

“ 그런 곳에 놀러 갈 시간이 있어야 가보지. ”

 

 

“ 너 이번 주 토요일에 뭐 하는데? ”

 

 

“ 다음 주 회의랑 프로젝트 발표 준비해야지. ”

 

 

제가 이렇게 말하자, 얀붕이는 대단하다는 듯이 저를 쳐다봤어요.

 

 

“ 주말에도 그렇게 일한단 말이야? 주말에는 좀 쉬어. 그렇게 일만 하는 것도 병이야. ”

 

 

“ 그렇지만 나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걸. ”

 

 

“ 이거 안 되겠네. 이번 주 토요일에 나랑 식물원 가보자! 어때? ”

 

 

“ 어...? 너랑? 둘이서? ”

 

 

“ 가기로 한 거다? 토요일에 식물원 앞으로 나와라. ”

 

 

얀붕이는 강제로 약속을 잡아 버렸어요. 그래도 뭐. 가끔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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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어디 놀러 가는 건데, 좀 꾸미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동안 일만 해왔던 저의 옷장에 있는 건 정장과 와이셔츠뿐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저는 정장 차림으로 식물원으로 갔지요.

 

 

“ 회사에서 보던 옷차림 그대로네? ”

 

 

“ 입을게 이거밖에 없더라고. ”

 

 

“ 뭐... 아무튼 들어가자. 표는 이미 사놨어. ”

 

 

식물원 안은 처음 보는 꽃들로 가득했어요. 마치 지상낙원에 온 거 같았지요. 천국이 있다면 대충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 이건 뭐야? ”

 

 

“ 만병초야. 많은 병을 고친다고 해서 만병초라는 이름이 붙었어. ”

 

 

“ 그럼 노란 꽃은? ”

 

 

“ 원추리야. 중국에서는 이걸 먹기도 한다는데. ”

 

 

“ 먹기도 하는구나... 그럼 얘는 이름이 뭐야? ”

 

 

“ 섬말나리인가? 흔하지 않은 꽃인데 이게 다 있네. ”

 

 

얀붕이는 정말 대단했어요. 제가 모르는 꽃들의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모르는 꽃이 없었어요. 마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같았지요.

 

 

“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다 아는 거야? ”

 

 

“ 삼촌이 꽃집을 하시는데, 꽃을 키워서 갖다주면 용돈을 주셨거든. 그래서 꽃에 대해서는 빠삭해. 근데 너 꽃이 그렇게 좋아? 아까부터 꽃에서 눈을 못 떼는데? ”

 

 

“ 어? 내가 그랬어? ”

 

 

“ 어 그랬어. 우리 나이 때에 이렇게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신기하네. 너도 별종인가 보구나? ”

 

 

별종이라니. 무슨 의미일까요?

 

 

“ 나도 꽃이 좋아. 내가 어제 말한 내 농장에서 꽃들을 재배한 다음에, 그걸 모아서 내 식물원을 만들어보는 게 내 소원이야. 너는 그런 생각 없어? 꽃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은퇴하고 꽃집 같은 걸 차리려고 하던데. ”

 

 

“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는 항상 일 생각만 했지. 나는 일밖에 몰라. ”

 

 

“ 그렇구나. 그럼 오늘 하루만이라도 꽃 구경에만 신경 써보는 게 어때? ”

 

 

얀붕이의 말대로 오늘은 일 생각을 집어 치우고 꽃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식물원 안을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꽃들을 구경하다 보니까, 어느새 해가 지며 땅거지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관람을 끝내야 했지요.

 

 

“ 아쉽다. 더 보고 싶었는데. ”

 

 

“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아 맞다. 이거 받아. ”

 

 

얀붕이는 식물원을 나가며 아쉬워하는 저에게 조그만한 선물을 하나 줬어요. 

 

 

“ 다육식물이야. 아까 너 화장실 간 사이에 하나 샀어. 그거는 건조한 사무실에서도 잘 자랄 거야. 책상 위에 두고 키워도 문제없을 거야. ”

 

 

“ 아니 뭘 이런걸... 정말 고마워! ”

 

 

“ 아니야. 오늘 하루 어울려줘서 고마워서 그래. 사실 나도 오랜만에 식물원에 가고 싶었는데, 친구한테 식물원 가자 하고 하면 보통 안 가려고 하잖아? 혼자 가기는 싫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오늘 나와줘서 고마워. ”

 

 

지금까지 얀붕이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랐지만. 얀붕이는 나쁘지 않은 사람인거 같아요. 아니 오히려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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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챈그룹 임원진 회의실 ) 

 

 

“ 자아. 오늘 다들 모인 이유는 아시죠? 차기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현 회장님 나이도 있는데. 슬슬 후보를 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

 

 

삭막한 분위기가 흐르는 회의실. 그때 제일 상석에 앉아있던 김 회장이 말을 꺼냈다.

 

 

“ 당연히 내 딸이 적임자지. 부모가 자식한테 회사를 물려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 ”

 

 

그 말을 들은 정수리가 다 벗겨진 임원 한명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 회장님.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일 잘하는 경영인을 회장 자리에 앉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

 

 

“ 맞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앉혀야 하는 게 맞는 거죠! ”

 

 

옆에 있던 콧수염이 긴 임원 한명이 거들면서 말했다.

 

 

“ 저희 모두 늙었습니다. 모두 고였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 새롭고 젊은 청청한 사람을 올리는 게 맞지 않겠나요? ”

 

 

“ 맞습니다. 저희 모두 해 먹을 대로 해 먹고, 썩을 대로 썩은 사람들입니다. 윗물이 곪아지면 아랫물도 곪아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이제라도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사람에게 새로운 시대를 맡겨야 합니다. ”

 

 

모든 임원이 회장직을 노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자는 의견을 한마음 한뜻으로 굳혀가자 김 회장은 말을 꺼냈다.

 

 

“ 우리 딸도 일 잘하지 않나? 걔가 이번에 낸 실적이 다 몇 개인가? ”

 

 

다시 그 정수리가 다 벗겨진 임원이 말을 받아쳤다.

 

 

“ 맞긴 합니다만. 김얀순 부장보단 그 이얀붕 부장이 더 뛰어나더라고요. ”

 

 

“ 맞아요. 그 사람이 충남 지부에서 한 일이 몇 개입니까? 그 사람 덕분에 항상 사건·사고만 보도되던 우리 회사에서 처음으로 좋은 기사가 났습니다. ”

 

 

“ 예 맞습니다. 그런 재능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회장직에 올라야지요. ”

 

 

김 회장은 똥줄이 타들어 가는 마음이었다. 참다못한 김 회장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속마음을 표출해버렸다.

 

 

“ 다들 정말 너무하네! 내가 이 회사를 여기까지 키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네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

 

 

“ 회장님 혼자서 키워낸 게 아니라, 저희 모두가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구석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배불뚝이 임원이 말을 꺼냈다.

 

 

“ 다들 그러지 마시고. 다음 분기 때 이사 한명을 새로 뽑지 않습니까. 그때 둘 중 누가 더 나은지 다시 평가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

 

 

“ 그래요. 그거 좋네요.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

 

 

“ 하하. 어쩌면 이사가 아니라 차기 회장을 뽑는 평가가 되겠네요. ”

 

 

“ 이만 여기서 회의를 마칠까요? ”

 

 

“ 네 좋습니다. ”

 

 

임원진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끝내 버렸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모든 사람이 다 나갈 때까지 김 회장은 회의실에서 나가지 않고 자리에 남아 회의실 창문 밖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다보았다.

 

 

이것들이.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아무리 내가 회장이라지만 모든 임원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막는다면 나로서도 어찌 못할 텐데....

 

 

절대로 이 회사를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한테 내어줄 수는 없다. 암.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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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어요. 저는 얀붕이가 사준 다육식물을 제 사무실 책상 위에 올리면서 토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생각했어요.

 

 

사실 일요일에도 식물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느라 일요일 내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 종일 얀붕이 생각만 했던 거죠.

 

 

그렇게 오늘도 다육식물을 쳐다보면서 헤벌쭉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우리 부서를 찾아왔더라고요?

 

 

제 부하 직원들은 아버지를 보고서는 모두 어쩔 줄 몰라서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제가 다육식물이나 보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인상이 확 찌푸려지셨어요.

 

 

그날 저녁 아버지는 같이 저녁 식사나 하자며. 저를 집에 부르셨지요.

 

 

“ 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는 알지? ”

 

 

“ 이사 승진 평가가 코앞인데 고작 그깟 식물 하나에 정신이 팔려있어? ”

 

 

“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 너도 사내에서 이얀붕이 좋은 평가를 받는 거 알지? 시골구석에서 출세한 이 시대의 마지막 자수성가라나 뭐라나. 그런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한테 우리 회사를 홀라당 넘기려고 그래? ”

 

 

개도 밥 먹을 때는 안건 들인다는데. 아버지는 제가 개만도 못한가 봐요.

 

 

“ 가족도 아닌 남한테 어떻게 회사를 넘겨! ”

 

 

그때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왜 얀붕이가 남이야! 나랑 결혼할 사람인데! ”

 

 

“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저는 저질러 버렸어요.

 

 

“ 얀붕이는 이제 우리 가족이야! 남이 아니라고! 나 얀붕이랑 결혼할 거야! ”

 

 

“ 아니. 뭐라고? 언제...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그런 놈이랑... ”

 

 

“ 얀붕이랑 내가 같은 대학 나온 거 알지? 그때부터야. ”

 

 

아버지는 제 말을 들으시고는 생각에 잠기셨어요. 더 이상 대화를 하시려고 하지 않았죠. 제가 큰 실수를 한 걸까요? 

 

 

근데 제가 말한 것처럼 얀붕이랑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퇴직 후 같이 농장에서 오순도순 꽃을 키우며 사는 행복한 귀농 생활. 히... 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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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어김없이 지겨운 출근길이었다.

 

 

하지만 이 지겨운 출근길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내 꿈의 스마트팜을 세울 자금을 거의 다 모아간다. 

 

 

몇 달만 더. 조금만 더 모은다면.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계획하고 설계한 내 명의의 스마트팜이 생기는 것이다.

 

 

몇 달 후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내가 그렇게 원하던 슬로우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오늘도 힘내자! 조금만 더 힘내서. 이 지겨운 회사를 때려치우자!

 

 

“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

 

 

역시나 오늘도 똑같은 사무실 분위기였다. 원래 아침에는 다들 죽어가는 모습이어야 맞는 거지. 하지만 다 죽어가야 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부하직원 한명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마치 내가 오기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출근한 나를 보자마자 말을 건넸다,

 

 

“ 부장님. 전화 왔습니다. ”

 

 

“ 일과 시작 전부터? 누군데? ”

 

 

나에게 걸려 온 전화가 있다며 수화기를 들고 있던 부하직원은 말하기 어려워하며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 회장님입니다. ”

 

 

오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 회장님이라고? 여기 회사 회장? ”

 

 

“ 네... 그렇습니다. ”

 

 

왜지? 왜 일개 부장인 나를. 그것도 비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회장님 본인이 직접 나를 찾으시는 거지? 

 

 

일단 나는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얀붕 부장입니다! ”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활기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넘어로 굴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네가 이얀붕 부장인가? ”

 

 

“ 네 그렇습니다! ”

 

 

“ 오늘 자네랑 할 말이 있네. 저녁에 시간 되나? ”

 

 

“ 예 당연합니다! 무조건 가겠습니다! ”

 

 

“ 그럼 오늘 저녁 6시 30분에 회사 앞 일식집에서 보게나. ”

 

 

“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예약할까요? ”

 

 

“ 그럴 필요 없네. 그럼 이따 보세. ”

 

 

그렇게 전화는 끊어졋다. 

 

 

대체 이게 무슨 일 일까? 회장님이랑 일대일 통화를 다 해보고? 나뿐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던 부하직원들도 모두 숨을 죽이며 내 통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부장님 회...회장님이 뭐라 하십니까? ”

 

 

“ 저녁에 같이 밥 먹자네? ”

 

 

“ 예? 왜 먹잡니까? ”

 

 

“ 나도 잘 모르겠어. 왜일까.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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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과의 식사 자리라니. 다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되는 시간이 오는 게 유독 빠르게 온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내가 그렇다. 체감상 1시간밖에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였고, 일식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어있었다.

 

 

회사 앞 일식집이라. 보통 우리 회사 임원진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다. 가격도 비싸고 100% 예약제라서 보통 사람은 갈 수 없는 그런 곳이다.

 

 

내가 여기를 와보는 날이 오는구나...

 

 

일식집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식당 직원들이 90도로 인사를 하며 나를 접대했다.

 

 

“ 6시 30분에 오시기로 한 이얀붕씨가 맞나요? ”

 

 

“ 예 그렇습니다. ”

 

 

“ 다른 일행분은 이미 와계십니다. 방을 안내해드리죠. ”

 

 

일났다. 내가 회장보다 늦게 오다니. 일부러 15분 빨리 온 건데 30분은 더 빨리 왔어야 했나?

 

 

“ 회장님. 일행분 들어가십니다. ”

 

 

직원들이 창호로 된 미닫이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평소 사진으로만 봤었던 회장님이 앉아 계셨다.

 

 

“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쇼. ”

 

 

직원들이 다시 미닫이문을 닫고 나갔다. 회장님은 방에 들어온 나를 직시 하셨다.

 

 

“ 자네가 이얀붕인가? ”

 

 

“ 네! 회장님! 이런 자리에 불러주시고 감사합니다! ”

 

 

“ 언제까지 서 있을 건가. 빨리 자리에 앉게. ”

 

 

나는 재빠르게 바닥에 놓여 있던 좌식 의자에 앉았다.

 

 

“ 그래... 자네에 대해서는 내가 계속 들어봤지. 자네 일을 정말 잘하더군? 특히 충남 지부에서 있을 때 말이야. ”

 

 

“ 과찬이십니다. 충남 지부가 제 고향 근처라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습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일만 잘 마무리했을 뿐입니다. ”

 

 

“ 겸손하기까지. 이런 진부한 이야기 말고 바로 본론을 들어가겠네. ”

 

 

올 것이 왔다. 대체 뭘까. 이런 말단 직원인 나를 부른 이유가. 뭔가 큰 이유겠지? 설마 충남 지부 이야기를 꺼내시는걸 보니까, 내가 충남 지부에 있을 때 횡령 좀 한 걸 걸렸나? 아니 그때 커피믹스 몇 박스 좀 빼돌린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회장님이랑 직접 면담까지 할 정도로?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나? 

 

 

“ 저 회장님 제가 정말 죄송! ”

 

 

“ 내 딸이랑 결혼한다면서? ”

 

 

“ 예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

 

 

잠깐만. 회장님이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내가 예측한 거랑 완전 다른 말이 나온 거 같은데.

 

 

“ 자네 같은 사람이면 내 딸을 줄 수 있지.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이번에 이사 자리 새로 뽑는 거 알지? 얀순이 그놈은 글러 먹었어. 내가 봐도 너무 무능해. 만족스럽지가 않아. 내 자식이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하는데, 역시 시험관으로 태어난 놈이라 그런가. 그니까 그 대신 자네가 그 자리를 받고 차후에 회장 자리를 물려받게나. 내 가족이 된다면 뭐 상관없지. ”

 

 

갑자기 이사 자리를 준다고? 나한테? 대체 왜? 나는 승진할 생각도 없는데?

 

 

“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내 딸이 어디가 좋아서 만나게 된 건가? 그런 빈 깡통 같은 여자를. 자네가 대학생 때 먼저 꼬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꼬신 건지도 궁금하네. ”

 

 

이거는 또 무슨 소리일까. 나랑 얀순이는 대학생 때 말 한마디 섞어본 게 전부인데.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였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했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회장님이 안좋게 보시려나?

 

 

“ 뭔가? 확인해보게. ”

 

 

“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

 

 

“ 그래도 확인해보게. 그걸 자네가 어떻게 확신하지? ”

 

 

이런 문자 메시지 보다는 회장님과의 자리가 더 중요합니다. 라고 말해보려고 했지만, 이 말을 했다가 또 어떤 말을 들을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아서 회장님의 말씀대로 문자를 확인해 봤다.

 

 

“ 이번 주말에 뭐해? 주말에 아무 일도 없으면 나랑 같이 다시 그 식물원에 가지 않을래? 아직 못 본 꽃들이 많은데 저번 주말처럼 에스코트 좀 해줄 수 있어? 이번 주말에 식물원에서 무슨 행사도 한다는데, 식충식물 체험이었나? 네펜데스에게 당하는 것처럼 몸이 갇혀보는 체험도 진행한데. 재밌을 거 같지 않아? ”

 

 

얀순이한테 온 문자였다.

 

 

식충식물 체험이라니. 식물원 직원 중에 친한 사람이 있어서 아는데, 이런 행사는 진행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네펜데스 체험? 이 수상한 체험은 대체 뭘까? 

 

 

“ 무슨 문자인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하나? ”

 

 

“ 그게 말입니다.... ”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까. 아니 회장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부분을 어디서부터 다시 설명해 드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