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에게 아직 혼인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리안, 이 혼인은 공작가와의 관계를 굳건히 하기위한 교두보다. 네 개인의 의사 같은건..."

"1왕자라는 이름이 그리 가벼운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타국의 공주와 결혼하는 편이 좋지 않을지..."

"...그럼 이 혼담을 어찌 하잔 게냐. 무르는 건 불가하다."

"왕자가 저 혼자인건 아니지않습니까?"

그날, 내게 들어온 혼담을 동생에게 떠넘겼을 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짊어졌다.


*****


"꺄아아아악!!!"

-크롸아아아아아!!!!

살아있는 자들의 비명, 마물들의 포효.

천년의 제국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오직 두 종류의 소리만이 황도를 지배했다.

그리고 황도의 중심. 지고한 역사를 간직한 황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아, 하아..."

자욱한 불길 속에서 황궁을 헤매는 남자가 있었다.

리안 레온하르트. 이 나라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왕족.

허나 그 칭호도 오늘부터는 의미를 잃으리라.

신의를 가진 귀족도, 충성을 맹세한 기사도, 성실히 일하던 모든 이들은 이미 그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직 검게 타오른 시체더미뿐.

자신 또한 곧 저리 될 것이란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끝나버린 황실이라지만 그 마지막 핏줄마저 추하게 도망칠 순 없다.

도망칠 능력도 없을 뿐더러 도망쳐서도 안됐다.

그렇기에,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발을 움직였고, 마침내 망국의 황자는 모든 것의 원흉 앞에 설 수 있었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흑발과, 눈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진 고아한 여인이 황제의 옥좌에 앉아있었다.

"오셨습니까."

스러져가는 비명 속에서도 청아하게 들리는 목소리.

반갑다는 듯 내뱉는 그 인사에 가라앉혔다 생각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있었군."

"예,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개소리. 이곳에 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운 나쁘게 마물이라도 만났다면 즉사했으리라.

"프리비아."


인류의 배반자이자, 마족의 대탕녀.

이 나라가, 인류가 낳은 가장 큰 오점이라 불리는 여인이 그의 앞에 있었다.

죽인다는 발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신화에나 나오는 마왕과 동격의 괴물. 당장 죽지 않는 것조차 그저 그녀의 선택에 불과하다.

입 밖으로 나오고자 하는 욕설을 누른 후 꺼낸 것은 하나의 의문이었다.

"이유가 뭐지?"

5년 전, 동생의 약혼식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그저 평범했던 여인이다.

고작 5년 만에 저 정도의 힘을 얻기 위해 어떤 업을 지웠을까.

가족을 바치고, 영지를 바치고, 그 나라마저 져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르게 만들었는가.

"그대의 부친은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대귀족이었고, 물려받을 영지 또한 왕도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했다. 약혼자였던 내 동생도 모자람없는 착한 아이였다. 아마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갔다면, 그대는 틀림없이 이 나라의 재상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이 나라가, 이 제국이 저 추악한 마족에게 당할 정도로 형편없어 보였는가! 저들이 약속한 대가가, 그대에게 약속된 미래를 버릴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던가!"

그것은 후회이자, 울분이자, 비탄이었다.

막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잃어버린 것에 대한 망국의 왕자의 한.

그 모든 것을 들은 그녀는 그저 방금의 인사와 같이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들은 제게 약속된 미래보다도, 이 나라의 모든 것보다도 가치있는 것을 주겠다 하였지요."

약속된 미래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말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환한 웃음과 함께, 그녀는 입을 열었다.

"바로 전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침내 얻게 된 그 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전하,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끝까지 날 기만하려하는가!"

이제 알았다. 저 미친년은 그저 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란걸. 진지하게 물은 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천만이 넘는 인간이 죽었다! 천년이 넘는 역사가 사라졌다! 그런데, 네년이 한다는 변명은 고작... 그것 뿐이더냐? 고작 그딴...!"

"고작 그딴 것에, 평생을 거는 자도 있습니다."

입을 열 수 없었다. 갑작스레 드러난 압박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저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이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변화. 그것이 그녀와 나의 격의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

"처음이었습니다. 그리도 가지고 싶었던 것은, 처음으로 본 그 순간부터 마음 속 깊이 사모하였습니다. 전하에게 어울리는 여인이 되는 것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바라보는 눈에는 흥분과 애정이 뒤섞인 진득한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눈을 본 순간, 시원찮은 농담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로서도, 아내로서도 부족하지 않도록 정진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께서 왕족과의 혼담을 가져오셨을 때, 어찌나 가슴이 뛰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이 뒤에 나올 이야기를 알고있었다. 갓 성인이 된 철없던 왕자는, 결혼이라는 말에 질색하며 그것을 동생에게 떠넘긴다.

공작가의 여식이 이미 진행된 혼담을 무른다는 건 불가능 했고, 결국 그녀가 평생을 갈망하던 꿈은 어리석은 왕자의 어리광으로 막을 내리게되었다.

"어째서 저를 거부하신 건지, 수천번을 고민했습니다. 무엇이 그리 부족하였는가 울부짖으며,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전하."

"그렇게 되어서도 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왕자를 포기하지 못한 그녀는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그 운명을 뒤집고자했고, 결국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난..."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알고자 했던 그 모든 이유가 자신에게서 나왔으니까.

"제가 악마와 계약한 것도, 제국을 무너뜨린 것도, 모두..."

결국 이 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그저 자신의 행동의 무게를 알지 못한, 어리석은 왕자...

"전하를 얻기위해서입니다."

"하, 하하...."

오직 나였다.






이거 보고 삘받아서 씀


여캐 파트도 쓰려했는데, 졸려서 못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