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많이 약해서 집보다 병원에서 많이 지냄. 그것도 한 지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이 이곳저곳 더 나은 병원이랑 집값 낮은 곳 찾아서 이사할 정도고. 몇 번이나 입원과 이사를 반복하면서 남주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안 붙이고 다님. 괜히 친해졌다가 떠날 때가 되서 슬퍼하는 걸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반복했으니깐.



그러다가 또 이사를 하고 또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에 입원함. 늘 그렇듯이 정 안 붙일려고 담당 의사랑 간호사 누나들끼리도 사적인 대화는 안 하면서 지내는데 한 여자애가 자기가 있는 병실에 옴. 등 중간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와 때 하나 안 탄 하얀 피부, 그리고 가장 작은 옷도 헐렁한 체구가 인상적인 아이였어. 남주는 어차피 몇 주뒤면 또 이사를 갈 것이기에 그냥 '예쁘네.' 이렇게만 생각하고 무시했어.



부모나 친적같은 보호자가 없어보이는 게 조금 그렇긴 했지만 말야. (나중에야 안 거지만, 여자애는 고아임. 고아원 선생도, 아이들도 관심을 주지 않다가 아플길래 혼자 보낸 거)



근데 그 아이가 위태롭게 걷고,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아슬아슬하게 집는 걸 보고 저러다 더 다칠 거 같아서 남주는 아이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도와줌. 여자애는 당황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도와주는 남주가 내심 고마워서 가만히 있음. 나중엔 먼저 말도 거는데 남주가 한번도 대꾸 안해줘서 볼을 부풀리고 남주를 올려봄. 그게 너무 귀여워서 남주는 웃으면서 그때부터 여주랑 대화를 하기 시작함. '아..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건데...' 이런 우유부단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타박하면서.



서로의 고충도 털어놓고 꽤 친해졌을 무렵, 남주의 가족은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갈 때가 됨. 늘 얼마 있다 떠난다고 말할려던 남주는 뒤늦게 여자애에게 자신은 이제 떠난다고 말함. 처음엔 죽는다는 줄 알고 장난치지 말라고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그게 아니라 이사를 간다는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짐.



"이사라니? 나한테 한번도 간다고 말한 적 없잖아 오빠."



"미안해, 늘 말할려고 했는데 그만..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여자아이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모름. 오히려 남주의 변명아닌 변명을 들을 수록 찡그려 가.



"떠날 거면은 왜 잘해줬던 거야? 왜 기대를 하게 만들었어? 누구도 날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나도 거기에 익숙해져 가는 참이었어. 그런데 오빠가 처음으로 내게 잘해줬어. 순수한 선의를 보여줬다고." 여자애는 슬픈 표정을 한 채로 뒤를 돌아 갈려던 남주의 손을 붙잡음. "어디 가, 제발 가지마. 계속 나와 함께 있어줘. 나, 오빠가 원하는 건 뭐든 줄게. 오빠 폐가 안 좋다며? 나 필요 없으니깐 하나, 아니 다 가져가도 돼. 뼈가 약하다면 내 골수를 줄게. 앞이 잘 안 보인다면 내 눈도 줄게. 만약 먹을 게 하나도 없다면 내 살을 뜯어서 줄게. 그러니깐 제발! 제발 가지 말라고!"



남주는 뒤에서 외치는 여자애의 가녀린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나올려는 걸 최대한 참다가 말함.



"언젠가 병원밖에서 다시 보자." 그리고 억지로 손을 뿌리치고 병원밖으로 뛰어감. 여자애는 놀라가지고 뒤쫒아 가지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함. 그리고 신념에 찬 말투로 말함.



"언젠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절대 놓치지 않을거야. 절대로

.

시간은 꽤 흘러 남주는 고등학교에 입학함. 약물과 재활치료를 통해 약했던 몸도 건강해지고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싫어했던 성격에서 완전히는 아니어도 꽤 밝아짐.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땐 학업에 치중하지 못해서 성적이 꽤 낮았어. 하지만 기회가 적었던만큼 남주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반장도 그런 남주는 보기 좋아서 다가가 공부를 가르쳐주고 성적이 올라가고 많이 친해짐. 가끔은 반 애들이 서로 사귀냐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말할 정도로. 남주는 부끄러워하며 아니라고 소지리르고 반장은 애꿎은 머리만 매만지며 미소를 지음.



시간이 흘러서 여름방학이 됐고, 개학할 때가 찾아왔어. 다른 아이들은 당연히 싫어하면서 더 놀고 싶어했음. 남주는 이제야 인생이란 걸 맛봐서 얼른 가고 싶어했지만. 며칠 전 병원에서도 몸이 거의 다 나았으니 집에서 신경만 잘 쓰면 될 거라고 말해 남주의 기분은 최고조였어. 썸을 타던 반장에게 고백을 할 생각도 하고 말야.



그런데 어디선가 가늘고도 담담한 미성이 남주의 뒤에서 들려왔어.



"안녕, 오빠?"



남주는 처음엔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줄 알고 주위를 봤지만, 해질 녘의 시립공원엔 오직 남주밖에 없었음. 누구길래 자길 오빠라고 부르는지 궁금해하며 뒤를 돌아봄.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밝은 갈색눈, 아담한 체구에 근처 여중의 교복을 입고 있는 미녀가 서 있었어. 남주는 이런 미인이 왜 자기한테 아는 체를 하는지, 설마 몰래카메라가 아닌지 주위를 둘러봄.



"후훗, 속일려고 이러는 거 아니니깐 너무 그렇지 마. 나 기억 안나?아, 8년이나 지났으니 잊었을려나, 물론 난 하루도 잊은 적이 없지만 말야."



남주는 8년이랑 말을 듣곤 기억의 구석에 있는 작은 파편을 찾기 시작했어. 그리고 8년전, 어떤 병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어쩌면 첫 친구였을 여자애가 떠오름, 그 여자애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손목을 잡던 건 까먹었지만 말야.



"아 그래, 분명... ##이었나?"



자기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에 여주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어. 그리곤 바로 남주에게 달려가 꼭 껴안으며 말해.



"역시 오빠도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남주도 웃으면서 여주를 안으며 말해.



"첫 친구를 잊을리가 없잖아."



몇 분간 안다가 남주는 주위의 벤치에 앉아 여주의 그동안의 근황을 물음.



"오빠가 떠나고, 나도 고아원으로 돌아갔었어. 그리고 몇 달뒤에 정말로 착하신 분들을 만나 입양됐고 올해 여기로 이사를 왔는데, '우연히' 오빠가 보일 줄은 몰랐네." 그러면서 여주는 배시시 웃어대. 그리고 가방에서 한 인형을 꺼내서 보여줌. 때 하나 안 타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걸. 다시 기억을 헤집자 옛날에 자기가 뽑아준 인형인 것을 깨달고는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껴. '8년간 단 한번도 날 잊지 않은 아이에게 난 그런 식으로 작별을 고했구나...'



남주도 웃으며 자기 근황을 설명함. 치료를 많이 해서 이제 병원에 입원할 일은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절대 없을 거다, 드디어 사는 게 즐거워졌다. 이런 식으로 말야.



"아, 그리고 내가 성적이 좀 낮았는데, 반장이 날 많이 도와주더라고."



여주는 옛날처럼 표정을 굳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어.'제발 남자라고 해. 다른 빌어먹을 걸레년이 아니라고 말해.' 당연히 여주의 그런 생각을 모를 남주는 평범하게 말함.



"어, 여자애인데 단발에 금테 안경을 쓴 게 꽤 귀여운 애야. 물론 너 만큼은-"



여주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고 남주에게 다음에 '꼭' 다시 보자는 말을 하며 집으로 뛰어감. 흐르는 눈물이 슬픔때문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둘다인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남주는 어색해 하면서도 그러자고 답해.



아직 부모님이 들어오지 않아 썰렁한 집에 홀로 들어온 여주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문을 잠금. 그리고 책상 서랍 맨밑에 달린 자물쇠를 따고 한 공책을 꺼냄. 공책엔 남주의 얼굴이나 몸이 엄청나게 그러져 있었음. 그 중 남주의 얼굴을 가장 자세히 묘사한 그림을 보며 스타킹을 찢고 팬티를 옆으로 밀어내 그곳에 손가락을 쑤시며 소리침.



"씨발, 씨발 씨발!! 절대 안 줘. 내 꺼야. 나만이 가질 수 있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라고!" 여주는 탈진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림을 얼굴에 가져가 풀린 눈으로 한껏 담음. '오빠, 걱정 마. 절대 안 놓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