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을 나서서 좀더 앞으로 나아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로 쭉 가면 아마..



"오, 여기 기억나네요."



교육 구역, 에버와 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생겨난 곳이었다.


완전히 덩굴에 잠식되고 부서진 정원 구역과 수면 구역과는 다르게, 교육 구역은 이상하게도 깨끗했다.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긴 했지만, 덩쿨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난 여기서 너랑 있을때가 제일 편했어. 합법적으로 땡땡이 치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저도 여기서 함장님이랑 같이 있을때부턴 정말 좋았어요. 그 전은 뭐.."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음,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





그 일 이후에 함교에 복귀해 작업을 이어나갔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에버크롬비는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있을까, 다른 분야도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화학공학이라던가 그런 분야도 그렇게 잘 아는건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자꾸만 작업중 사소한 실수를 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함장이 날 불러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에버의 일을 말했고, 함장은 내가 예상한것 보다 더 흥미를 보였다.


그에게 에버가 마지막에 운 것까지 이야기하자,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자네가 그 아이를 전담해서 교육하는게 좋을거 같네."


"예?"


"그런 천재적인 아이들은 지능때문에 역으로 자아나 성격이 불안정해지기 쉬워.


보직을 아예 그쪽으로 빼줄테니 그 아이, 에버크롬비, 라고 했나? 아무튼 잘 가르쳐 주게."


"아니, 저야 좋긴 한데.."


"내 딸도 그녀와 비슷했다네."


"..."


"자세한 얘기는 그대와 내가 더 친해지면 말해주도록 하지."



그가 살짝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의 딸 이야기는, 반란 진압중 그가 중상을 입어 쓰러졌을 때야 들을 수 있었다.





**





"아 여기! 여기서 엘렌 씨랑 셋이서 같이 밥먹었잖아요!"


"오! 들어와봐요, 이 방 기억 안나요?"


"앗! 저 책 한 스무번은 읽은 것 같은데!"



교육 구역에서 더욱 깊숙히 들어가면서, 에버는 굉장히 신나했다.


그녀에게 어울려 주면서 내 기분도 조금은 좋아졌지만, 그 기분도 오래 가진 못했다.


그녀는 조금 이상할 정도로 신나했다. 


갑자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어딘가로 사라진 다음, 이상한 펜을 가져와서 나랑 내가 기계공학 공부할때 항상 꺼내 썼던 볼펜이라고 한다던가,


복도에 줄서있는 책장에 다가가더니 책을 뽑아와서 그 책을 내가 가르쳐주면서 했던 설명을 줄줄이 말한다던가,


그녀가 내 앞에서 유독 풀어지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밝아 보였다.



"이거 봐요!"



에버가 내 눈 앞에 무언가를 불쑥 들이대었다. 오, 이건 좀 익숙한 물건이다.





**





에버를 본격적으로 맡아서 가르쳐 주기 시작했을때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겐 친구가 없었다.


사실 저런 천재적인 아이들은 집단에서 항상 배척받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다른 아이들과 대화하다가, 서로 너무나도 다른 지적 수준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항상 마찰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결국 아이들 집단 전체가 천재를 밀어내게 된다.


에버는 조금 미묘하게 달랐다.


에버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있었다고 '주장' 했다.



"...여기 있는 다른 애들한테 말 걸어본적은 없어요."


"왜?"


"걔들은 재미없는 얘기만 해요. 초콜릿이 맛있느니 어떤 활동이 재밌느니... 그리고 저어기 있는 놀이터에서 낄낄대면서 막 뛰어다닌다고요.


말이 안 통할것 같아요. 그래서 싫어요."


"그래서 제가 아저씨를 좋아해요. 저보다 아는것도 많고 말도 잘 통하잖아요."


"어.. 나도 어릴때, 너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 있었어."


"진짜요오? 아저씨는 그런적 없을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 나도 어릴때 한 똑똑 했었거든?"


"가끔 애들이랑 말하는거 보면, 그런 적 없어 보여요."


"음.. 너하고는 이유가 좀 달랐거든, 결과는 비슷했지만."



선천적 자아 과각성 증후군. 내 병명이다. 사람들이 보통 자기 마음을 자기도 모를 때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주로 산모의 멜루나 복용이 원인인 이 병은, 그런 일이 일어날수 없게 한다. 나는 어렸을 떄부터 내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줄 알았다.


그로 인해, 이 병의 환자는 멜루나의 정신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다른 이들은 전부 정신파 때문에 동면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던 거겠지.


아무튼. 이 병때문에 나는 어릴적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자폐적으로 내 내면에 파고들어서, 내 감정과 심리를 마치 해변가에 다가왔다 물러가는 파도를 바라보듯이 관망하는데 내 시간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랬던 나를 지금 이런 어엿한 성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단 한 명의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내 말을 모두 들은 에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나랑 어떻게 보면 비슷한 경우야. 나는 내 마음에 빠져들었고, 너는 지식에 빠져들었으니까. "


"그래서, 해결 방법은 왠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에버크롬비, 지금부턴 나에게 전부 솔직하게 말해줘. 네가 지금 어떤 기분이고, 어떤 마음인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화내지 않고, 전부 들어줄게."



그리고 에버의 표정이 무너졌다.



"흑, 흐으윽, 나도, 흐, 애들이랑, 놀고싶은데에에에, 흡, 애들은, 딴것, 만 하고오오오, 흐윽 ,후으으읍"


"과학 ,흑, 으으윽, 설명 해, 큽, 줬는데, 모르겠다면서 막, 짜증내고오, 흐윽"



그래, 그래, 말을 안 걸어 봤을 리가 없지.



하나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았고, 하나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몰랐다.





둘은 꽤나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




에버가 내 눈 앞에 들이댄건,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화책.


큼지막하게 "친구랑 말이 안통해요!" 라는 제목이 써있었다.


"이건, 나도 기억나네."


"이거 처음 읽고, 완전 제 생각이랑 똑같아서 엄청 놀랐었죠."


"그래, 너한텐 그게 딱이라고 생각했어."



세상에 이런 일이 한두번 있었을까. 아무리 지능이 높더라도 자아는 결국 아이. 그들을 위한 책이 없을리가 없었다.


에버가 어느새 내 옆에 붙어, 내 팔을 꼭 껴안고 있었다. 갑자기 좀 부담스러운데..



"그때 함장님이 말했잖아요, 전부 자기한테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그래서 생각난건데, 함장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자랐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괴팍한 공학자?"


"아니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저는, 제가 아니었을 거에요. 아마 언젠가는 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백과사전 비스무리한게 되버렸을걸요.


마음은 텅 비어있고, 오직 지식만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을 거에요.


저를 지금의 저로 만들어 준건 함장님이에요.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죠."



그녀가 내 팔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확실히 이상하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때부터 스멀스멀 커져가던 작은 의혹이 점점 확실해져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버는 슬쩍 팔 힘을 풀었다.



"음, 어쩌다보니 흥분했네요. 오랜만에 여기 오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어요."


그리곤 다시 잠자코 내 옆을 걷기 시작했다. 아까 신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꽤 심한 감정 기복, 은연중에 살짝 얼굴을 비추는 본심.


결정적으로 그녀가 내 팔을 껴안았을 때의 표정. 의료 구역에 잠시 들러야겠다.





***





교육 구역을 빠져나와,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수면구역은 함선 맨 뒤쪽에 있었고, 교육구역은 맨 앞쪽에 있었다.


이제 함선 상부로 올라가서 관제소를 거쳐 함선 중간쪽으로 가면 함교에 도착할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함선 상부로 올라가기 전에, 의료 구역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올라가던 도중에 내가 의료 구역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대로 쭉 올라가서 관제소 쪽으로 가야하는거 아닌가요?


"600년 묵은 동면통 때문에 말이야. 안그래도 깨어나고 한번 쓰러졌는데, 더럽게 아팠어."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요? 그러면 들렸다 가죠. 함장님이 아파하는건 보고싶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의료구역에 들어섰다. 의료구역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함선의 중앙쯤에 있으며, 좌현과 우현을 잇는 곳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의료 구역은 반란의 격전지였다. 동면에 들기 전부터 반쯤 박살나 있었고, 지금은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복도를 걸으면서 보이는 방들의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깨져있었고, 가끔씩 천장에 구멍이 뚫려 윗층에서 쏟아진 장비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기도 했다.


약품실이 멀쩡해야 할 텐데. 긴장해서 그런지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약품실은 3층에 있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지만, 에버는 지치지도 않는지 나와 같은 속도로 내 옆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러면 좀 곤란하게 된다. 일단 그녀를 뗴어놓는게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일단 실패했다.


3층에 다다르고, 아주 넓은 복도가 눈 앞에 펼쳐졌다.


3층엔 각종 의류 물자가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다량으로 빠르게 각 층으로 운반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넓게 설계된 이 복도는, 반란 떄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원인이었다.


우리가 의료 구역을 점령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인원을 빠르게 투입하기 위해 우현에서 3층으로 진격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문제는, 반군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적과 아군 모두,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그 사망자 중에선 에버의 부모님도 있었다.




여기를 다시 오고 싶진 않았는데. 씁쓸했다.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지금 그녀를 자극하는게 좋은 생각은 아니니까.



"함장님, 여기. 기억하시죠?"



염병.



에버는 어느샌가 옆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말했다.



"여기서 함장님이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그랬었지."


"저는 함장님께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은 걸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품실에 거의 도착했다.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저희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반군 쪽에 서있었을때. 저를 쳐다보던 함장님의 시선을 잊을 수 없어요."



이 배의 선상 반란이 '폭동' 이 아닌 '반란' 으로 불렸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엄마가 함장님에게 총을 마구 쏴댔어요."



반군 수뇌부는 정신파 방어 혈청을 약품실에서 훔쳐갔다. 반란을 일으킬 때 그들의 정신은 멀쩡했다. 나머지 반군은 아니었다.



"제가 눈앞에 펼쳐진 피바다를 보고 미쳐버리기 직전에, 당신이 저를 잡아채서 정원 구역까지 데려갔어요."



그들은 멜루나를 마약으로 재처리 한 다음, 선내에 은밀히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계속 오열하던 저를 몇시간 동안이나 위로해 주시고, 지쳐 잠들때까지 곁에 있어주셨어요."



이상을 알아챘을때는 항해사 여럿과 부선장을 포함한 승객의 1/3이 이미 멜루나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 전부가 반군이 되었다.



"당신은, 저를 위해 그곳에서 목숨까지 걸었는데, 저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어요."


"징징대고, 앵겨붙고, 귀찮게 굴었죠. 그땐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전부 받아줬으니까요."


 

멜루나가 내뿜는 정신파는 인간의 특정한 욕망을 극단적으로 부풀린다.


약한 향수병에 걸린 사람을 고향 집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평생 처박혀있게 만든다.


일을 조금 쉬고 싶어하는 사람을 잠에서 깨어나면 발작을 시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부풀어오르는 욕망은 보통 영향 받을 당시에 가장 거대했던 욕망이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제가 싫어요. 아무리 어릴적의, 불안정한 저였다고 해도


당신, 제가 정말 사랑하고사랑하고사랑하고사랑하는게 계속 그렇게 굴었다는 것 자체가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웠어요."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제일 거대한 상태에서 정신파가 작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저도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기로 했어요. 만약 당신도 저를 사랑하신다면 정말, 정말로 좋아하실만한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한다.


나는 약품실 문을 열었다.


의료실의 최중요 구역 다운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 덩쿨조차도 폴리스틸-납 합금판을 뚫지는 못한것 같다.



"사실 당신이 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고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게 어렴풋이 느껴졌어요.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렇게 헌신하겠나요?"



"하지만, 확실히 당신의 입으로 들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나요?"



정답은 '그렇다' 이다. 나는 그녀를 어떤 의미로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면통은 그냥 핑계였다.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려고 의료 구역에 왔다.


나는 애써 불안함을 숨기며 말했다.



"동면통 감퇴제 찾고 나면 대답해 줄게."



이젠 시간이 정말로 부족했다. 생기가 없던 그녀의 눈동자에 한순간 빛이 돌아왔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알겠어요. 저도 열심히 찾아볼테니까, 찾고 나면 꼭 대답해줘야 해요?"



그녀는 마취제 보관함 쪽으로 향했다. 나는 혈청 보관함으로 달려갔다.


빨리. 빨리 찾아야 한다.



"흐응, 흥 흐으흥, 흥~?"



에버의 콧노래가 약품실에 울려나갔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보관함을 꼼꼼히 살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한칸 한칸 살펴나갔지만 내가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동면통 감퇴제.. 동면통 감퇴제.. 여기 있다!"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군.


이제 마지막 칸만이 남아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나는 믿지도 않는 신한테 기도하며 마지막 칸을 열었다.




《멜루나 억제 혈청》




찾았다. 주사기 2개가 들어있었다. 나는 두개 다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넣고 고개를 돌렸다.


에버가 내 바로 뒤에 서있었다. 표정을 가다듬자. 


후우.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살짝 벌리면서 일어섰다.



"함장님, 동면통 억제제를 찾았어요. 음.. 히,히힛, 그러니까 이제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나요?"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멜루나 억제 혈청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부정하면, 그녀의 정신을 되돌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사랑해."



에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리며, 달콤하게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뜨고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순식간에 주사기를 꺼내 나에게 휘둘렀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서 피했다.


'와지끈'


뭐지?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바닥을 보니 깨진 혈청 조각이 보였다.


아까 보관함을 뒤질때 바닥에 던져두었던 혈청이었다.


시발, 시발, 시발, 나는 땅바닥에 꼴사납게 널부러졌다.




좆됐다.




'푹'




그리고 에버가 잽싸게 내 위에 올라타 다리에 주사기를 박아넣었다.


에버는 내 위에 올라타 엎드려서, 내 얼굴 바로 위에 그녀의 얼굴을 놓았다.


이제 그녀의 표정은 형언할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기름칠이 되지 않아 금방이라도 부서질듯이 삐걱거리며 맞물려 돌아가는 부품들.


사람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될줄은 몰랐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포기할순 없었다. 포기하면 안된다. 



"함장님.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다리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허리 위쪽도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굳이 태양계로 돌아갈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우리 둘이 쭉, 쭈욱 같이 살면 돼요."



나는 왼팔에 힘을 주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주사기를 든 왼손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들키면 안된다.



"저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의미도 없어요. 반란? 폭동?


제가 거기서 죽어나간 사람들 때문에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려봤을것 같아요? 큽, 크웁, 크힉, 크히힛"



그녀가 왼쪽 입꼬리를 한계까지 뒤틀며 쿡쿡거렸다.


거짓말.


그녀는 반란이 끝난 후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부모님, 초대 함장, 엘렌 씨가 모두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다며, 내 품에 안겨 몇번이나 울어댔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방비 할때를 노려야 했다.



"오직 당신.


당신, 후훗, 만이 제 안에 있어요.


아아, 제 마음, 제 감정, 제 지식, 그리고 제 몸까지도.


전부 당신과 저만을 위해, 존재해요."



그녀는 내 슈트 지퍼를 내리고 한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나머지 한손으로는 내 맨가슴을 쓰다듬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왼팔의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에버를 구해야 한다.



"함장 대리로 있을때, 제 텔로미어 역행증을 다른사람에게도 옮기는 연구를 끝냈어요.


지금 당신이 잠들고 다시 일어나 보면, 당신도 저와 같이 몇백년을 살 수 있을 거에요.


우리 목숨이 다할때까지, 당신이 저에게 보여준 이 별들의 바다 속으로, 둘이 같이 가라앉아요."



그녀는 안절부절하다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같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어떤 수줍음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을 점점 가까이 해왔다.



"사랑해요, 로건."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입술에 닿았다.


온 힘을 다해 왼팔을 그녀의 목으로 휘둘렀다.



'푸욱'



그녀의 몸이 내 몸 위로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목에 박힌 혈청을 손에서 놓고, 마지막 남은 힘으로 살짝 떨고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을 차리자, 아직도 에버는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내 다리 사이의 '생리 현상'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를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직 내 다리에 박혀있던 마취제를 뽑아냈다. 고급품이었는지,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속도가 빨랐다.


나는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그녀를 등에 업고, 관제소로 걷기 시작했다.


의료 구역에서 빠져나와 다시 상부행 통로로 들어오자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폐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있었나 봐요..."



동면관은 에버에게서 정신파의 영향이 사라지자 600년 만에 그녀를 내보냈다.


그러나 함내 어딘가에 멜루나가 아직 남아있었고, 그녀는 기껏 깨어나자마자 다시 정신파 때문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부족하네요.."


"빨리 함교로 가서 항로를 돌려야 해. 그리고 우리 둘다 동면하면, 괜찮을 거야."



그녀에게 주사한 혈청은 임시방편이다. 아직 배 안에 멜루나가 남아있었고,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그녀는 다시 미쳐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 전에 그녀를 동면시켜야 했다. 나는 의지를 다졌다.



"함장님."


"왜?"


"아까 제가 했던 말, 전부 기억하시죠...?"


"...기억해."


"지금 저는, 멜루나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아요."



억제 혈청은 주사 후 일정 시간동안 신체에 남아있는다.



"그러니까 아까같은 저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함장님의 진심을 들어두고 싶어요."



"그러니까 함장님도 저한테 전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를, 사랑하시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사랑해."


"......"



그녀는 내 어깨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한때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이곳에는, 이제 우리 둘 만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관제소로 향했다.


상부에 도착하고, 관제소로 향하는 복도에서 에버는 이제 걸을수 있겠다며 내 등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아까 말한 제 병을 함장님에게도 옮기는 거요, 이미 준비를 거의 끝내놓았었어요."



"태양계로 돌아가게 되면, 그걸 받아 주세요."



"..."



이유는 짐작이 갔다. 나는 그녀에게 확실히 듣기 위해 물었다.


"...이유가 뭐야."


"멜루나는, 아시다시피, 그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을 부풀려요."


"아까처럼 같이 우주를 표류하고 싶다는 욕망까지는 아니었지만,


함장님과 제 인생 전부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당신이 죽고 난 뒤로 몇백년을 마저 살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에요."



후천적 텔로미어-역행 증후군 환자의 노년은 대체로 비참하다.


소중한 사람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려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결국 고독사하거나 자살하는게 일반적인 경우였고,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유아퇴행, 경계선 성격장애, 조현병 등등의 정신질환을 앓다가 죽는다.


그녀의 병은 반란 직후에 발병했고, 그녀의 정신은 그 전부터 불안정했다.


그녀는 나 없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함께 하더라도, 끝까지 멀쩡하게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함장님,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저와 함께, 병들어 주세요."





"..."



그녀와 부탁을 받아들이면, 나도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우리의 말로가 어떨지는 알수 없었다. 역행 증후군의 환자는 매우 드물었고, 역행 증후군 환자끼리의 사랑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우리 둘 다 불행해 질 수도 있었다.


참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알겠어."


"너와 함께, 병들어 줄게."





그녀는 오래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는 관제소에 도착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우주를 보여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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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좋은 광경이긴 한데, 이대로 끝나면 얀데레물이 아니라 좀 뒤틀린 순애물이겠죠?

에버의 얀데레 행각은 정신파 영향 때문이었고, 본심은 얀데레까진 아닌걸로 보이네요.

저도 이런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본심 자체가 완전 왜곡된 애정으로 뒤틀려야 완벽한 얀데레 아닙니까?

이것때문에 실망하시는 분이 있을거 같아서 굳이 스포일러를 남깁니다.

3편이 마지막 편입니다. 거기 나올 에버의 폭주는 순수히 그녀 본인의 의지입니다.